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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발굴조사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태종이 화살을 맞을 뻔한 벌판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성동구 성수2가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태종이 화살을 맞을 뻔한 벌판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90필지밭 84필지임야 3필지대지 3필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쏜 화살은 빗나가, 그가 세워둔 차일 기둥에 꽂혔다.사람들은 그날 이후 이 벌판을 '화살이 꽂힌 벌'이라 불렀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동구 성수2가의 국유지는 총 90필지, 393,499㎡였습니다. 밭이 84필지 291,254㎡로 가장 많았고, 임야가 3필지 101,345㎡, 대지가 3필지 899㎡ 있었습니다. 성수동이라는 이름은 6.25 전쟁 후 1950년에 만들어진 비교적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 이전 이 자리는 '뚝섬', 혹은 '둑도(纛島)', '살곶이벌'이라는 훨씬 오래된 이름으로 불려왔습니다. 성수2가는 옛 동뚝도리, 곧 웃말이라 불리던 마을에 해당합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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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우면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소가 잠든 산자락, 왕자의 태를 묻은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초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서초구 우면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소가 잠든 산자락, 왕자의 태를 묻은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필지논 4,413㎡ 소가 편안히 졸고 있는 형상의 그 산자락 아래,단 한 뙈기의 논만이 나라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초구 우면동의 국유지는 단 1필지, 4,413㎡였습니다. 그 전부가 논으로 확인되며, 다른 지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면동(牛眠洞)이라는 이름은 마을을 감싼 우면산(牛眠山)에서 그대로 유래했습니다. 산의 생김새가 마치 소가 편안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면산은 서초동, 방배동, 우면동, 양재동의 경계를 이루며, 소가 졸고 있는 모습이라는 그 정겨운 형상 덕에 오래도록 이 일대 사람들에게 친근한 산으로 자리해왔습니다. 우면동은 우면산 아래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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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대문구 북아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나라 땅으로 남았던 마을 숲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대문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서대문구 북아현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나라 땅으로 남았던 마을 숲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26필지밭 18필지임야 2필지 · 전량 국유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논밭 사이, 단 한 뙈기의 숲만은끝내 개인의 소유로 넘어가지 않고 나라의 땅으로 남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국유지는 총 26필지, 61,702㎡였습니다. 밭이 18필지 56,496㎡로 국유지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임야가 2필지 1,933㎡, 대지가 5필지 1,464㎡, 논이 1필지 1,808㎡ 있었습니다. 특히 임야 2필지는 북아현동 전체 임야 면적과 정확히 일치해, 이 마을 산림 전부가 국유지였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북아현동 전체의 토지 현황을 다루며, 무덤 41,011㎡라는 이 시리즈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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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동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신촌천변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 다섯 뙈기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국유지 심층편) 1912년 마포구 동교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신촌천변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 다섯 뙈기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5필지논 3필지밭 2필지 135필지의 조용한 다리 마을 가운데,단 다섯 뙈기만이 나라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 14,737㎡였습니다. 그 가운데 논이 3필지 11,649㎡로 가장 많았고, 밭이 2필지 3,087㎡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마포구 동교동 전체 자료를 다룬 바 있습니다. 동쪽 다리라는 뜻의 동교(東橋)에서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신촌천을 사이에 두고 서교동과 짝을 이루던 조용한 농촌이었습니다. 총 135필지 가운데 오씨가 22필지로 1위를 차지하며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오씨 우위 구도를 보였고, 훗날 이 마을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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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1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임금이 직접 밭을 갈던 적전, 선농단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국유지 세부)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1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임금이 직접 밭을 갈던 적전, 선농단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총 11필지밭 5필지임야 2필지논 2필지대지 2필지 곤룡포를 벗고 쟁기를 잡은 임금이,백성들 앞에서 손수 밭을 갈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는 총 11필지, 17,130㎡였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5필지 3,424㎡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고, 임야가 2필지 11,107㎡로 면적에서는 가장 넓었습니다. 논이 2필지, 대지가 2필지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자료는 제기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지목별 세부 내역입니다. 이번 글에 대한 안내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1912년 제기동 전체의 토지 현황이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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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3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세종이 세운 말 목장 정자, 화양정 터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광진구 편 (국유지 세부)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3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세종이 세운 말 목장 정자, 화양정 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총 31필지밭 23필지논 6필지임야 1필지대지 1필지 임금이 정자를 짓고 앉아,말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던 언덕이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는 총 31필지, 93,557㎡였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23필지 58,839㎡로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논이 6필지 6,049㎡, 임야가 1필지 27,996㎡, 대지가 1필지 671㎡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자료는 화양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지목별 세부 내역입니다. 이번 글에 대한 안내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1912년 화양동 전체의 토지 현황이 아니라, 그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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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강서구 등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산등성이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서구 편 · 국유지 특집 1912년 서울 강서구 등촌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산등성이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20필지130,387㎡논 64.1%등마루골 옛터 제목 후보 ①1912년 강서구 등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 8필지의 기록 ②궁중에 진상하던 역마를 기르던 산등성이 마을 ③1912년 등촌동 국유지 20필지, 등마루골이었던 시절의 기록 ④산등성이 마을에서 이름을 얻은 등촌동의 국유지 현황 ⑤1912년 등촌동 국유지 논·밭·임야 현황 봉제산과 증미산이 원래 하나로 이어진 산줄기, 그 등성이를 중심으로 이 마을은 자리를 잡았다. 등촌동. 이 마을 이름은 등마루로 이루어져 '등마루골'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등촌'으로 표기된 것이다. 지금의 봉제산과 한강변의 증산(염창산)은 원래 같은 산줄기로 이어진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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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동구 상일동 소재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게가 많던 시내, 그 위쪽 마을의 나랏땅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동구 편 · 국유지 특집 1912년 강동구 상일동 소재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게가 많던 시내, 그 위쪽 마을의 나랏땅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3필지7,735㎡논 2필지게내 위쪽 마을 제목 ①1912년 강동구 상일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 2필지의 기록 ②게가 많던 시내, 그 위쪽 마을의 나랏땅, 상일동 국유지 현황 ③1912년 상일동 국유지 3필지, 아직 경기도 광주군이었던 시절 ④상일리에서 상일동으로, 50년이 걸린 서울 편입 ⑤1912년 상일동 국유지 논·밭 현황 게가 많이 살던 시내의 위쪽 마을, 이곳의 나랏땅을 들여다본다. 상일동. 이 이름은 게내(蟹川)—게가 많이 서식해 붙은 이름으로, 지금은 직강 공사를 거쳐 고덕천이라 불린다—의 위쪽(上)에 위치한 '상일리'에서 유래했다. 1914년 게내·게내안말·동자골 등 여러 자연부락이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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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아직 서울이 아니었던 시절, 왕자들의 무덤이 있던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남구 편 · 첫 회(국유지) 1912년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아직 서울이 아니었던 시절, 왕자들의 무덤이 있던 마을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6필지292,966㎡밭 74.5%궁마을(궁촌)의 자리 제목 후보 ①1912년 강남구 수서동의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밭 74.5%의 기록 ②왕자들의 무덤이 있던 궁마을, 수서동 국유지 1912년 기록 ③1912년 수서동 국유지 16필지, 아직 경기도였던 시절 ④탄천 서쪽의 그 마을, 수서동이라는 이름의 뜻 ⑤1912년 수서동 국유지 논·임야·잡종지·밭 현황 지금은 강남의 일부이지만, 1912년의 이 마을은 아직 서울이 아니었다. 수서동. 이 이름은 한강의 지류인 탄천 서쪽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그런데 1912년 당시, 이 마을은 지금과 달리 서울이 아니었다. 수서동은 조선 후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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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앞, 중구 남대문4가 5필지의 땅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114년 전 종이 위에 남은 숫자 하나가, 지금 우리 발밑을 설명하고 있다
"숭례문 앞, 5필지의 땅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114년 전 종이 위에 남은 숫자 하나가, 지금 우리 발밑을 설명하고 있다 5필지 전체 국유지 12,185㎡ 전체 면적 77.3% 대지 비율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는 국유지 5필지, 총 12,185㎡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대지는 3필지 9,418㎡, 잡종지는 2필지 2,766㎡로, 대지가 전체 면적의 약 77%를 차지했습니다. 이 수치는 숭례문과 남대문시장을 낀 도심 한복판의 토지 이용 실태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쓰입니다. 1912년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대부분은 교과서 어딘가에 묻어둔 먼 과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해에 작성된 토지조사부 한 장이, 지금 이 순간 남대문로4가에서 삽을 뜨기 전 반드시 펼쳐 봐야 하는 서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땅은 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종이는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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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의금부 터에 남은 대지 1필지, 7,130㎡의 기록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편 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의금부 터에 남은 대지 1필지, 7,130㎡의 기록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 국유지 1필지면적 7,130㎡지목 대지1912년 토지조사사업 제목 후보 ①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의금부 터의 대지 기록 ②1912년 공평동 국유지 현황: 대지 1필지 7,130㎡의 비밀 ③서울 한복판, 공평동 땅속엔 무엇이 있었나: 1912년 국유지 정리 ④600년 역사가 잠든 공평동, 1912년 토지 기록으로 다시 읽다 ⑤공평동 국유지 7,130㎡는 왜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인가 서울 한복판, 26층 빌딩 지하 4미터 아래에서 600년 전 골목길이 그대로 나왔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종로 한복판, 스타벅스와 은행 본점이 늘어선 그 거리 밑에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겹겹이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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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뼈를 붙이는 돌이 나던 고개, 아홉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편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뼈를 붙이는 돌이 나던 고개, 아홉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9필지국유지 전체 47,094㎡총면적 · 약 1.4만 평 3종지목 구성 66.0%임야 면적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는 국유지 9필지, 총 47,094㎡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2필지 31,084㎡, 밭 5필지 15,328㎡, 대지 2필지 680㎡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66.0%가 임야, 32.6%가 밭으로, 논이 한 필지도 없는 고갯마을 특유의 산밭 중심 구성을 보여 줍니다. 이 고개의 돌은 부러진 뼈를 붙인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약이 되는 돌이 나던 고개가 있었습니다. 은평구 녹번동의 산골고개입니다. 산골이라 불린 이 광물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자연동으로, 뼈가 부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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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텁바위와 복사골, 네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텁바위와 복사골, 네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4필지국유지 전체 4,528㎡총면적 · 약 1,370평 2종지목 구성 75%대지의 필지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에는 국유지 4필지, 총 4,528㎡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1필지 3,752㎡, 대지 3필지 776㎡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필지 수의 75%가 대지라는 점은 이 일대가 이미 집들이 들어선 도시형 마을이었음을 보여 주며, 이는 농촌형 국유지가 많은 시리즈 안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이번 대장에는 논이 한 배미도 없습니다. 시리즈를 따라오신 분들은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마을들의 국유지에는 어김없이 논이 등장했습니다. 갈대벌의 신정동에도, 언덕의 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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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학이 날던 언덕, 다섯 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영등포구 편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학이 날던 언덕, 다섯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5필지국유지 전체 14,750㎡총면적 · 약 4,462평 4종지목 구성 69.8%임야 면적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는 국유지 5필지, 총 14,750㎡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2필지 10,297㎡, 논 1필지 2,945㎡, 밭 1필지 862㎡, 대지 1필지 644㎡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69.8%가 임야로, 신길동의 국유지는 마을 뒷산의 나지막한 구릉이 중심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어떤 마을의 국유지 대장은 단 다섯 줄이면 끝났습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양천구 신정동을 기억하시나요. 국유지 31필지, 45만 ㎡가 넘는 갈대벌의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샛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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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은행나무 정자 아래, 갈대벌 393,271㎡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양천구 편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은행나무 정자 아래, 갈대벌 393,271㎡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31필지국유지 전체 453,327㎡총면적 · 약 13.7만 평 5종지목 구성 86.7%잡종지 면적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는 국유지 31필지, 총 453,327㎡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논 13필지 36,760㎡, 밭 5필지 14,105㎡, 잡종지 10필지 393,271㎡, 수도용지 2필지 8,525㎡, 대지 1필지 664㎡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86.7%가 잡종지였으며, 이는 안양천 하류의 갈대벌과 저습지가 국유지로 편입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서울 국유지의 87%가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니었던 동네가 있습니다. 지도를 펼쳐 놓고 잠시 상상해 보세요. 1912년 어느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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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부처의 빛이 머문 마을, 대지 열한 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편 1912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부처의 빛이 머문 마을, 대지 열한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8필지국유지 전체 15,748㎡총면적 2종지목 구성 북한산 그림자가 내려앉는 골짜기, 절집의 등불이 마을 이름이 된 땅. 1912년의 불광동은 열여덟 장의 토지대장 위에 그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동네가 110여 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연신내역의 인파도, 불광천변의 산책로도 없던 시절. 그 시절의 불광동을 숫자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놀랍게도 그 답은 이미 존재합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남긴 기록 속에 말이죠. 오늘은 그 기록을 한 장 한 장 펼쳐보겠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불광동이라는 땅의 첫 장부를 손에 쥐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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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울 전체 편 — 소유 기록 총람1912년 서울의 땅은누구의 것이었을까? 123,251필지 대장에 남은 주인들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울 전체 편 — 소유 기록 총람 1912년 서울의 땅은누구의 것이었을까? 123,251필지 대장에 남은 주인들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총 123,251필지 총면적 277,227,048㎡ 국유지 7,883필지 일본인+동척 9,708필지 소유 국적 9개국 AI 요약 브리핑 1912년 서울 전체에는 123,251필지, 총 277,227,048㎡의 토지가 12개 지목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소유 기록을 보면 김씨 21,112필지, 이씨 19,730필지가 최상위였고, 국유지 7,883필지(6.4%), 일본인 5,904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3,804필지, 창덕궁 188필지가 뒤를 이었으며, 미국·프랑스·중국·독일·영국·러시아·덴마크·그리스 등 외국인 소유 토지가 총 6,627필지에 달했습니다. 서울의 땅주인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총람은 문화유산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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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왕실 얼음창고 곁, 무덤의 땅 다섯 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왕실 얼음창고 곁, 무덤의 땅 다섯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2필지총 58,387㎡분묘지 29.8%지목 4종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는 국유지 12필지, 총 58,387㎡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이 5필지 26,343㎡로 가장 넓었고, 분묘지 5필지 17,381㎡, 잡종지 1필지 11,722㎡, 대지 1필지 2,938㎡ 순이었습니다. 특히 무덤의 땅인 분묘지가 국유지의 약 29.8%를 차지해, 조선왕실 제사용 얼음창고였던 동빙고의 역사와 맞닿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이 동네 국유지의 3분의 1은, 무덤이었습니다. 장부를 열자 낯선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분묘지. 논도 밭도 대지도 아닌, 무덤의 땅.이 시리즈에서 좀처럼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던 지목이 동
7분 분량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장부 한 줄에 담긴 밭 162,618㎡, 버들 나루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영등포구 편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장부 한 줄에 담긴 밭 162,618㎡, 버들 나루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필지총 162,618㎡밭 100%시리즈 신기록 3관왕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에는 국유지 1필지, 총 162,618㎡가 있었습니다. 이 중 밭이 1필지 162,618㎡로, 양화동 국유지 전체가 단 하나의 필지, 단 하나의 지목인 밭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필지 수는 시리즈 전체 최소이지만 한 필지의 면적은 축구장 약 22.8개에 달해, 단일 필지 규모로는 시리즈 역대 최대급 기록입니다. 이 동네의 국유지 장부는, 단 한 줄이면 끝납니다. 보통 한 동네의 국유지 기록을 열면 여러 필지가 줄줄이 이어집니다.논 몇 필지, 밭 몇 필지, 대지 몇 필지. 그런데 1912년 양화동의 장부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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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송파구 삼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나루터가 사라진 자리, 4필지 전부가 잡종지였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송파구 편 1912년 서울 송파구 삼전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나루터가 사라진 자리, 4필지 전부가 잡종지였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4필지총 63,160㎡잡종지 100%시리즈 신기록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는 국유지 4필지, 총 63,160㎡가 있었습니다. 이 중 잡종지가 4필지 63,160㎡로, 삼전동 국유지 전체가 단 하나의 지목인 잡종지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논도 밭도 대지도 없이 잡종지 비율 100%를 기록한 이 구성은 삼전도 나루터가 있던 한강변 모래벌 지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서울의 수백 개 동네 기록을 뒤져도, 이런 땅은 처음이었습니다. 논이 한 필지도 없습니다.밭도 없습니다.대지도, 임야도, 하천도 없습니다. 1912년 삼전동의 국유지 장부에는 오직 한 단어만 반복됩니다.잡종지. 잡종지. 잡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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