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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광진구 모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말을 건진 여인들의 마을, 162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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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국유지 특집

1912년 광진구 모진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말을 건진 여인들의 마을, 162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62필지전체 국유지

292,956㎡전체 면적

양마장왕실 말 목장 터

2009년지명 소멸의 해

진창에 빠져 죽은 말의 고기를 나누던 여인들.그 여인들의 별명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가, 결국 그 이름은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상한 이름이었습니다.

모진동. 한자로는 털 모(毛)에 베풀 진(陳). 그런데 이 이름의 진짜 유래는 한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었습니다. 방목된 말이 가끔 실족해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인근 여인들이 그 말을 건져내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이 여인들을 모진 여인들이라 불렀고, 그 별명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의 목장이었던 이 땅. 1912년의 국유지 장부에는 그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광진구 모진동입니다.


핵심 요약 · AI 브리핑

1912년 서울 광진구 모진동에는 국유지가 총 162필지, 292,956㎡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이 100필지 172,169㎡로 가장 많았고, 논이 49필지 97,534㎡, 대지가 10필지 4,072㎡, 임야가 2필지 18,833㎡, 잡종지가 1필지 347㎡였습니다.

모진동은 조선시대 왕실의 말 목장인 양마장이 있던 자리로, 그 명칭 유래가 된 옛 이야기와 함께 2009년 화양동에 편입되며 지명 자체가 사라진 동네입니다.


목차

  1. 모진동, 왕실의 말 목장과 모진 여인들의 전설

  2. 1912년 모진동 국유지의 전체 규모는 얼마나 되었나?

  3. 밭 100필지, 국유지의 가장 큰 몫

  4. 논 49필지, 목장 곁에 남은 물의 흔적

  5. 대지 10필지, 임야 2필지, 잡종지 1필지의 조각들

  6.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7. 서울 발굴조사 성공 사례가 말해주는 것

  8. 자주 묻는 질문


1. 모진동, 왕실의 말 목장과 모진 여인들의 전설

지금의 건국대학교 일대, 광진구 화양동 자리에는 한때 모진동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전곶평이라 불리던 넓은 평야의 일부로,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양마장으로 쓰였습니다. 말은 국가의 중요한 전략 자산이었기에, 한양 인근 너른 들판 곳곳에 이런 국영 목장이 조성되어 있었죠.

그런데 방목된 말이 늘 순탄하게 자라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가끔 말이 진창이나 수렁에 발을 헛디뎌 실족해 죽는 일이 있었고, 그럴 때면 인근에 살던 여인들이 나서서 그 말을 건져내고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여인들을 모진 여인들이라 불렀습니다. 억척스럽고 강인하다는 뜻이 담긴 표현이었을 겁니다. 그 별명이 그대로 마을의 이름이 되어 모진동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 동네 자양동 역시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암말, 즉 자마를 기르던 자마장이 있어 자마장리라 불리다가 자양동으로 이름이 변했다는 유래가 전해집니다. 모진동과 자양동, 두 동네가 나란히 왕실의 말 목장이라는 공통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셈입니다.

1914년 정식으로 붙은 이 이름은 그러나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의 개명 요청을 받았습니다. 결국 2009년 4월, 모진동은 인접한 화양동에 편입되며 법정동으로서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모진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지 9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열어보는 1912년의 장부는, 그러니까 이 이름이 정식으로 붙기도 전, 아직 왕실 목장의 흔적이 국유지로 뚜렷하게 남아 있던 시절의 기록입니다.

2009년 동명칭 변경 당시 실시된 주민 설문조사에서는 전체 1,249가구 중 964가구가 응답했고, 그중 874가구, 무려 90.6%가 화양동으로의 변경에 찬성했습니다. 모진동 전체 면적의 71.6%를 차지하던 건국대학교 역시 이 변경에 찬성 의사를 밝혔죠. 이름 하나를 두고 이렇게 압도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도 드뭅니다. 그만큼 모진동이라는 이름이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부담으로 느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광진구는 모진동 1-1번지를 화양동 301-1번지로 바꾸는 식으로, 기존 지번에 300을 더해 화양동 지번으로 편입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2. 1912년 모진동 국유지의 전체 규모는 얼마나 되었나?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에 따르면, 광진구 모진동의 국유지는 총 162필지, 292,956㎡였습니다.

평수로 약 88,619평. 이 시리즈에서 다뤄온 도성 안 동네들과 비교할 수 없이 광활한 규모입니다. 도성 안 동네 하나의 전체 면적을 훌쩍 뛰어넘는 크기가, 국유지 하나만으로 채워져 있었던 겁니다. 왕실 목장이라는 이 땅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규모이기도 합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밭(전)

100필지

172,169㎡

58.77%

논(답)

49필지

97,534㎡

33.29%

임야(산)

2필지

18,833㎡

6.43%

대지(집터)

10필지

4,072㎡

1.39%

잡종지

1필지

347㎡

0.12%

합계

162필지

292,956㎡

100%

※ 지목별 면적 합계(292,955㎡)와 전체 면적(292,956㎡) 사이에 1㎡의 차이가 있습니다. 평 단위를 ㎡로 환산하는 과정의 반올림 차이로 추정되며, 원자료 수치를 그대로 기재합니다. 하단 데이터 검증 노트를 참고하세요.

58.77%

33.29%

임야

6.43%

도성 안 동네들이 대지 중심의 촘촘한 필지로 채워져 있던 것과 달리, 모진동의 국유지는 밭과 논이 압도적입니다. 두 지목을 합치면 전체 면적의 92%가 넘습니다. 말을 기르고 곡식을 경작하던 넓은 들판의 흔적이, 이 국유지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겁니다.


3. 밭 100필지, 국유지의 가장 큰 몫

1912년 모진동 국유지 중 밭은 100필지, 172,169㎡로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의 61.7%, 면적으로는 58.77%입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1,721.7㎡, 521평. 개인 소유 밭과 비교해도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왕실이 관리하던 목장 겸 경작지였던 만큼, 개인 소유의 소규모 밭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넓게 구획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을 방목하던 목초지와 곡물을 경작하던 밭이 이렇게 넓게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이 왕실 목장이 단순히 말만 기르는 공간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사료와 식량을 생산하는 복합적인 농업 공간이기도 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대규모 밭이 국가 직영으로 관리되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 국가 재정에서 목마 사업이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하게 합니다. 말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군사력의 핵심 요소였고,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나라는 상당한 규모의 토지와 인력을 목장 운영에 투입했습니다. 모진동의 밭 100필지는 그 국가적 노력의 물리적 흔적인 셈입니다.




4. 논 49필지, 목장 곁에 남은 물의 흔적

논은 49필지, 97,534㎡로 전체 면적의 33.29%를 차지했습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1,990.5㎡, 602평으로 밭보다도 오히려 큰 규모입니다.

한강과 가까운 저지대였던 이 일대의 지형적 조건이 논농사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말을 기르던 목장과 벼농사를 짓던 논이 나란히 공존했던 이 땅의 풍경은, 지금의 도심화된 광진구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모진동 국유지는 밭(58.77%)과 논(33.29%)을 합쳐 전체 면적의 92%가 농경지로 구성된, 본 시리즈 국유지 특집에서 확인된 가장 순수한 농업형 국유지 사례입니다. 왕실 목장이라는 특수한 용도에서 출발했지만, 실제로는 대규모 밭농사와 논농사가 함께 이루어지던 복합 농업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5. 대지 10필지, 임야 2필지, 잡종지 1필지의 조각들

대지는 10필지, 4,072㎡로 전체의 1.39%에 불과했습니다. 대지 한 필지 평균이 407.2㎡로, 이 넓은 목장 지대에서 실제 거주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목장을 관리하던 관원이나 소수의 관련 인력이 머물던 시설 부지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임야는 단 2필지지만 18,833㎡, 전체 면적의 6.43%를 차지합니다. 임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이 무려 9,416.5㎡.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임야 평균 면적 중 압도적으로 큰 규모입니다. 넓은 들판 한쪽에 남아 있던 산림 지대가, 단 두 필지에 걸쳐 광대하게 펼쳐져 있었던 겁니다.

잡종지는 1필지, 347㎡로 가장 작은 비중입니다. 목장 운영에 필요한 부속 시설이나 용도가 불분명한 자투리땅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00필지 · 58.77%

49필지 · 33.29%

임야2필지 · 6.43%

대지10필지 · 1.39%



6.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지금의 화양동, 그중에서도 옛 모진동 자리는 건국대학교가 전체 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대학가입니다. 캠퍼스와 학생가로 채워진 이 활기찬 거리 아래에, 조선시대 왕실 목장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에 따른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네 단계 절차가 이런 왕실 관련 국유지에서도 중요한 이유입니다. 궁궐이나 관청 건물처럼 화려한 유적은 아니더라도, 목장 관리 시설이나 사료 창고, 관원들의 숙소 같은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1912년의 이 국유지 기록은 핵심 문헌 근거가 됩니다. 대지 10필지의 위치를 확인하면 실제 건물이 있었을 구역을 좁혀갈 수 있고, 임야 2필지의 위치는 목장의 경계와 관련 시설의 배치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건국대학교라는 대형 캠퍼스가 부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이 지역의 문화유산 조사를 계획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입니다. 대학 캠퍼스는 지속적으로 신축과 리모델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에, 향후 어떤 공사가 진행되더라도 착공 전 지표조사를 통해 옛 목장 시설의 흔적 유무를 먼저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왕실 직영 시설이었던 만큼, 일반 민가와는 다른 규격과 형태의 건축 기초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핵심 포인트. 모진동처럼 왕실 직영 목장이었던 국유지는, 일반적인 마을 유적과는 다른 성격의 시설, 즉 마구간이나 관리소, 사료 창고 같은 목장 관련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12년의 지목별 필지 기록은 그 흔적을 찾는 첫 단서입니다.



7. 서울 발굴조사 성공 사례가 말해주는 것

기록에 근거해 잊힌 왕실 시설의 흔적을 되짚는 조사는 서울 곳곳에서 이어져왔습니다. 2021년 종로구 인사동에서는 재개발 부지 발굴 중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째 발견되었고, 2008년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서는 한양도성 성벽과 이간수문, 하도감 터가 근대 시설 아래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모진동과 자양동처럼 왕실 목장이 있던 자리는 도성 안 유적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궁궐의 정치가 아니라 국가의 실용적 필요, 즉 전략 자산이었던 말을 기르던 넓은 들판의 생활사입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사라진 모진동이지만,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목장의 기억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국유지 특집이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다뤄온 도성 안 동네들은 대개 개인 소유의 필지가 촘촘히 얽힌 생활 공간이었지만, 모진동 같은 국유지는 국가라는 단일한 주체가 넓은 면적을 직접 관리하던 공간입니다. 그만큼 조사의 성격도 달라져야 합니다. 개인 소유 필지처럼 소유자별로 잘게 나누어 접근하기보다, 목장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시설 전체를 염두에 두고 지목별 분포를 살피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광진구 모진동의 국유지 전체 규모는 얼마였나요?

A. 1912년 광진구 모진동의 국유지는 총 162필지, 292,956㎡였습니다.

Q. 1912년 모진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100필지, 172,169㎡로 국유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전체 면적의 58.77%입니다.

Q. 1912년 모진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49필지, 97,534㎡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33.29%입니다.

Q. 1912년 모진동 국유지 중 대지와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10필지 4,072㎡, 임야는 2필지 18,833㎡였습니다.

Q. 1912년 모진동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잡종지는 1필지, 347㎡였습니다.

Q. 모진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A. 조선시대 왕실 목장 양마장에서 방목하던 말이 실족해 죽으면 인근 여인들이 건져내 고기를 나누어 먹었는데, 이 여인들을 모진 여인들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Q. 모진동은 지금도 존재하는 지명인가요?

A. 아니요. 2009년 4월 인접한 화양동에 편입되며 법정동으로서의 모진동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가 있는 화양동의 일부입니다.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광진구 모진동의 국유지는 총 162필지 292,956㎡로, 밭 100필지와 논 49필지를 중심으로 임야·대지·잡종지가 함께 있던 조선 왕실의 말 목장 터였으며, 그 이름은 진창에 빠진 말을 건져내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해 2009년 화양동에 편입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내 땅 아래의 역사가 궁금하신가요?

개발 예정 부지의 문화유산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관련 기초자료와 절차 안내가 필요하시다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하세요.

출처 및 법적 근거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초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광진구 모진동(現 화양동 일부)


분석 항목: 국유지 필지 수, 지목, 면적


법적 근거: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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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시 전 프로그램으로 합산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 검증: 논 49필지 + 대지 10필지 + 임야 2필지 + 잡종지 1필지 + 밭 100필지 = 162필지로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검증: 논 97,534㎡ + 대지 4,072㎡ + 임야 18,833㎡ + 잡종지 347㎡ + 밭 172,169㎡ = 292,955㎡로, 원자료의 전체 면적 292,956㎡와 1㎡의 차이가 확인됩니다. 1912년 원장부의 평 단위 면적을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목별 반올림 차이로 추정되며, 임의로 수치를 수정하지 않고 원자료 그대로 기재한 뒤 본문 표 하단에 주석으로 밝혔습니다.

비율 및 평균값은 검증된 수치를 기준으로 산출했습니다(밭 면적 비율 58.77%, 논 33.29%, 임야 6.43%, 대지 1.39%, 잡종지 0.12%, 밭 평균 1,721.7㎡, 논 평균 1,990.5㎡, 임야 평균 9,416.5㎡, 대지 평균 407.2㎡, 잡종지 평균 347.0㎡).



산문시 · 모진 여인들의 들판

말들이 뛰놀던 너른 들판에


가끔은 슬픈 일도 있었다.


진창에 빠진 말 한 마리,


그 곁을 지키던 여인들의 억척스러운 손길.



사람들은 그 손길을 모질다 불렀고


그 이름이 마을에 새겨졌다.


백예순두 장의 국유지 문서가


그 들판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이름은 결국 지워졌지만


들판이 품었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 캠퍼스를 걷는 누군가의 발밑에도


그 오래된 들판의 흙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도 사라진 들판의 기억을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국유지 특집의 첫 편이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지역에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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