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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기차가 서기 전, 논과 밭이었던 땅의 기록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년 국유지 기초자료 정리

7일 전
8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영등포구 편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기차가 서기 전, 논과 밭이었던 땅의 기록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년 국유지 기초자료 정리

76필지전체 국유지

530,346㎡전체 면적

7종지목 종류

38.9%철도용지 비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는 국유지 76필지, 총 530,346제곱미터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35필지 237,895제곱미터로 가장 넓었고, 철도용지가 단 1필지 206,493제곱미터로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습니다.

나머지는 대지 29필지, 잡종지 5필지, 분묘지 3필지, 논 2필지, 임야 1필지 순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기차가 서기 전, 영등포는 강 옆의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지금 영등포역 앞을 가득 채운 철길과 상가, 높은 건물들의 자리에는 원래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토지를 필지 단위로 처음 조사하던 그 시절, 영등포동에는 국가 소유의 땅이 일흔여섯 필지, 넓이로는 오십삼만 제곱미터가 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국유지 기록에는 다른 동네와는 다른 특별한 지목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바로 철도용지입니다. 단 한 필지뿐이지만 그 넓이는 이십만 제곱미터를 훌쩍 넘습니다. 이 숫자 하나가 왜 영등포가 서울의 다른 동네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를 말해줍니다.

오늘은 백 년 전 영등포동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논밭 마을이 어떻게 철도의 도시로 바뀌어 갔는지, 그리고 이 오래된 숫자가 지금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왜 여전히 중요한 자료로 쓰이는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영등포역 앞을 지날 때마다 이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실지도 모릅니다.


목차

01핵심 요약, 이 숫자부터 먼저 확인하세요

021912년의 영등포동, 그 시절 이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03국유지 76필지 530,346제곱미터, 숫자로 먼저 만나보기

04철도용지 1필지 206,493제곱미터, 영등포를 영등포답게 만든 땅

05밭 35필지 237,895제곱미터, 가장 넓게 펼쳐졌던 삶의 터전

06대지 29필지 50,482제곱미터, 마을 사람들이 살아간 자리

07잡종지와 논, 강가 마을의 또 다른 얼굴

08분묘지와 임야,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기록

09이 숫자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

10기초자료 하나가 만든 변화, 실제 조사 성공 사례

11자주 묻는 질문

12한 줄로 정리하는 영등포동 국유지 이야기


01

핵심 요약, 이 숫자부터 먼저 확인하세요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는 국유지가 모두 일흔여섯 필지 있었고, 그 넓이를 합하면 530,346제곱미터에 달했습니다. 축구장으로 치면 일흔네 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넓은 지목은 밭으로, 서른다섯 필지 237,895제곱미터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44.9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철도용지입니다. 필지 수로는 단 하나뿐이지만 넓이는 206,493제곱미터, 전체의 38.9퍼센트에 이릅니다. 필지 하나가 마을 전체 국유지의 삼분의 일을 훌쩍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나머지는 대지 스물아홉 필지 50,482제곱미터, 잡종지 다섯 필지 26,661제곱미터, 분묘지 세 필지 2,393제곱미터, 논 두 필지 6,082제곱미터, 임야 한 필지 337제곱미터 순으로 이어집니다. 지목의 종류만 일곱 가지, 논과 밭, 대지 같은 익숙한 땅부터 분묘지, 철도용지처럼 흔히 보기 힘든 지목까지 고르게 섞여 있다는 점이 영등포동 기록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02

1912년의 영등포동, 그 시절 이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영등포라는 이름은 물가에서 올리던 굿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음력 이월 초하루 무렵 바람을 다스리는 신을 맞아들이는 영등굿을 지내던 자리라 하여 영등포라 불리게 되었고, 여기에 물가를 뜻하는 포자가 붙었다는 것입니다. 한강을 낀 나루 마을다운 유래입니다.

이런 조용한 강변 마을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1899년에 일어납니다.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지금의 영등포역 자리에는 원래 노량진역이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900년 9월, 한강철교가 놓이면서 열차가 한강을 건너 서울 도심까지 곧장 이어지게 되었고, 바로 이때 영등포역이 지금의 자리에서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합니다. 조용한 나루 마을이었던 영등포가 철도라는 새로운 문물의 관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이 들어서고 십여 년이 흐른 1912년, 조선총독부는 근대적인 토지 소유 체계를 정리하기 위해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입니다. 이때 작성된 토지대장 덕분에 우리는 철도가 놓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영등포동 모습을 숫자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역 주변으로는 비가 오면 땅이 진흙처럼 질어진다 하여 죽마루라 불리던 마을도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런 지명 하나하나가 그 시절 이 동네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국유지 일흔여섯 필지 가운데 밭과 논을 합한 농경지가 여전히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철도가 들어섰다고 해서 마을이 하루아침에 도시로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차역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여전히 논밭을 갈고, 다른 한쪽에서는 철로가 뻗어나가는, 두 시대가 겹쳐 있던 순간이 바로 1912년의 영등포동이었던 셈입니다.

이미지 프롬프트 · 위치 2 (2장) 1900년대 초 영등포역 앞, 초가와 목조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서 짐을 나르는 한국인 인부들과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따뜻한 색감의 수채화 일러스트 스타일. 이미지 안에 문자, 숫자, 로고는 전혀 포함하지 않음. 등장인물은 반드시 한국인으로만 구성.


03

국유지 76필지 530,346제곱미터, 숫자로 먼저 만나보기

말로 풀어놓은 이야기를 표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숫자로 보면 영등포동 국유지의 전체 그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비중

35필지

237,895㎡

44.9%

철도용지

1필지

206,493㎡

38.9%

대지

29필지

50,482㎡

9.5%

잡종지

5필지

26,661㎡

5.0%

2필지

6,082㎡

1.1%

분묘지

3필지

2,393㎡

0.5%

임야

1필지

337㎡

0.1%

전체 국유지

76필지

530,346㎡

100%

44.9%

철도용지

38.9%

대지

9.5%

잡종지

5.0%

1.1%

분묘지

0.5%

임야

0.1%

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보입니다. 밭은 서른다섯 필지에 걸쳐 흩어져 있는데, 철도용지는 단 한 필지뿐인데도 그 넓이가 밭 전체와 거의 맞먹습니다. 필지 하나의 크기가 이렇게 크다는 것은, 그 땅이 자잘하게 나뉜 여러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거대한 시설을 위해 통째로 확보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특별한 필지부터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04

철도용지 1필지 206,493제곱미터, 영등포를 영등포답게 만든 땅

전체 일흔여섯 필지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줄이 있습니다. 철도용지, 단 1필지, 206,493제곱미터. 평수로 환산하면 육만 평이 넘는 크기입니다. 마을 전체 국유지 면적의 삼분의 일 이상이 오직 이 필지 하나에 담겨 있었던 셈입니다.

이 필지가 무엇이었는지는 앞서 살펴본 역사가 말해줍니다. 1900년 영등포역이 지금의 자리에서 정식으로 문을 연 뒤, 역 구내와 선로, 조차장으로 쓰이던 땅이 국가 소유의 철도용지로 등록된 것입니다. 기차가 서고 화물이 오르내리고 선로가 갈라지던 그 넓은 부지 전체가 법적으로는 하나의 필지로 묶여 있었던 겁니다.

철도용지라는 지목은 이 시리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동네는 논과 밭, 대지, 임야처럼 사람이 농사짓고 살아가던 땅으로 채워져 있지만, 영등포동은 다릅니다. 국유지 지목 목록 맨 위에 철도용지라는 낯선 이름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마을이 순수한 농경 마을이 아니라 근대 교통의 거점으로 이미 성격이 바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문화유산 조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필지는 오히려 더 흥미로운 대상이 됩니다. 넓은 면적을 단일 시설이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땅 아래에 근대 철도 시설의 기초와 옛 선로의 흔적, 혹은 그보다 앞선 시기의 생활 유적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05

밭 35필지 237,895제곱미터, 가장 넓게 펼쳐졌던 삶의 터전

철도용지가 상징적인 존재라면, 밭은 영등포동 국유지의 실질적인 몸통이었습니다. 서른다섯 필지, 237,895제곱미터로 전체 면적의 44.9퍼센트, 어느 지목보다도 많은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른다섯이라는 필지 수는 마을 곳곳에 밭이 잘게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철도용지처럼 하나의 거대한 필지가 아니라, 여러 농가가 저마다의 밭뙈기를 일구며 살아가던 흔적입니다. 역이 들어서고 철로가 놓이는 중에도, 그 주변 대부분의 땅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숫자는 1912년의 영등포동이 완전히 도시화되기 전, 농업과 근대 교통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문화유산 조사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밭으로 이용된 땅을 특히 눈여겨봅니다. 지표가 크게 파헤쳐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경작만 반복된 땅은, 그 아래에 더 이른 시기의 흔적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입니다.



06

대지 29필지 50,482제곱미터, 마을 사람들이 살아간 자리

대지는 사람이 실제로 집을 짓고 살아가던 땅을 말합니다. 영등포동에는 스물아홉 필지, 50,482제곱미터의 대지가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전체의 9.5퍼센트에 해당하는 규모로, 필지 수만 놓고 보면 밭 다음으로 많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대지가 스물아홉 필지로 비교적 여러 곳에 나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 주변으로 크고 작은 집터가 여럿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앞서 언급한 죽마루 같은 역전 마을의 존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철도라는 새로운 산업이 들어오면 그 주변으로 사람과 상점, 숙소가 자연스럽게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영등포동의 대지 스물아홉 필지는 바로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역전 마을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일 가능성이 큽니다.


07

잡종지와 논, 강가 마을의 또 다른 얼굴

잡종지는 논이나 밭, 대지처럼 분명한 용도로 분류하기 어려운 땅을 아우르는 지목입니다. 영등포동에는 다섯 필지, 26,661제곱미터의 잡종지가 있었습니다. 필지 수는 많지 않지만 평균 면적이 제법 넓은 편인데, 이는 철도역 인근에 흔히 형성되는 공터나 하역장, 자재 적치장처럼 특정한 산업적 쓰임새를 가진 땅이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반면 논은 단 두 필지, 6,082제곱미터로 전체의 1.1퍼센트에 그칩니다. 한강과 맞닿은 동네치고는 뜻밖으로 적은 숫자입니다. 그만큼 영등포동의 국유지는 물을 대어 벼를 기르는 논보다는, 철도와 그 주변 시설, 그리고 밭 중심의 토지 이용으로 이미 무게중심이 옮겨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강가 마을이면서도 논농사보다 철도와 밭이 앞서 있었다는 점, 이것이 바로 영등포동만의 독특한 지형도입니다.


08

분묘지와 임야,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기록

가장 작은 두 지목으로 이 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분묘지는 세 필지 2,393제곱미터, 임야는 단 한 필지 337제곱미터에 불과합니다. 전체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0.5퍼센트와 0.1퍼센트로 미미합니다.

하지만 문화유산 조사에서는 이렇게 작은 필지일수록 오히려 더 세심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분묘지는 말 그대로 누군가의 무덤이 있던 자리입니다. 세 필지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은 특정 가문이나 마을 공동체가 오랫동안 관리해온 묘역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는 뜻일 수 있고, 이런 땅은 조사 과정에서 매장문화재나 민속 유산의 실마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임야 한 필지, 337제곱미터는 넓지는 않지만 철도와 밭, 대지 사이 어딘가에 자그마한 수풀이나 언덕이 함께 있었음을 보여주는 조각입니다. 작은 숫자라고 지나치기보다, 이 마을 지형의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09

이 숫자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제 진짜 중요한 질문을 던질 차례입니다. 백 년도 더 지난 이 토지 기록이 왜 지금까지도 계속 소환되는 걸까요.

문화재 발굴조사나 문화재 발굴 기관이 어떤 지역을 조사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실제로 땅을 파기 전, 지형과 옛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가늠하는 사전 조사입니다. 이 단계에서 1912년 국유지 자료처럼 지목과 필지 규모가 상세히 기록된 옛 토지대장은 대단히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됩니다.

땅의 지목이 논이었는지 밭이었는지, 대지였는지 철도용지였는지에 따라 그 아래 남아 있을 흔적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오랫동안 대지로 쓰인 땅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했다는 뜻이라 주거지 유적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게 되고, 철도용지처럼 근대 시설이 오래 자리했던 땅은 근대 산업유산의 흔적과 그보다 이전 시기의 지층이 함께 겹쳐 있을 가능성을 살피게 됩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좁은 범위를 시험 삼아 파보는 시굴조사와, 일정 구간을 표본으로 확인하는 표본조사의 범위와 방법이 정해지고, 이 사전 단계를 거친 뒤에야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 살펴본 영등포동 국유지 일흔여섯 필지, 530,346제곱미터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끝나는 정보가 아닙니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개발이나 조사가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펼쳐 봐야 할 기초 자료가 되는 셈입니다.


10

기초자료 하나가 만든 변화, 실제 조사 성공 사례

이런 기초조사 자료가 실제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는 서울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심 재개발이나 철도 부지 정비 공사를 앞두고 진행되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조사팀이 가장 먼저 펼쳐 보는 것이 바로 옛 지적도와 토지대장입니다.

한 지역에서는 오래된 지적 자료를 통해 특정 부지가 근대 철도 시설로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이 먼저 확인되면서, 시굴조사 범위를 근대 시설물의 기초 구조와 그 하부 지층으로 좁혀 효율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밭으로만 이용되어 온 구간은 지표 교란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판단 아래 표본조사의 우선순위가 조정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초자료 하나가 조사의 방향과 순서, 나아가 조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까지 바꿔놓는 경우가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영등포동의 이 국유지 기록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저 옛 통계처럼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이 일대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펼쳐질 자료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206,493제곱미터에 이르는 철도용지 한 필지는, 근대 철도 유산에 관심을 둔 조사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좌표가 될 것입니다.



검증 노트

이 글에 사용한 수치는 제공된 원자료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검증했습니다. 지목별 필지 수를 모두 더하면 2(논)+29(대지)+3(분묘지)+1(임야)+5(잡종지)+35(밭)+1(철도용지)로 일흔여섯 필지가 되어, 전체 필지 수 76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을 모두 더하면 530,343제곱미터로, 원자료에 기재된 전체 면적 530,346제곱미터와 3제곱미터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평에서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반올림 오차로 보이며, 원자료의 오류로 단정하지 않고 그대로 밝혀둡니다.

또한 원자료의 밭 항목에 "191년"이라는 연도 표기가 있었는데, 이는 "1912년"의 오기로 판단되어 본문에서는 바로잡아 표기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영등포동 기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철도용지라는 지목의 등장입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시리즈에서 철도용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지목이 아니며, 단일 필지 면적이 206,493제곱미터에 달해 지금까지 다룬 동 단위 기록 가운데서도 매우 큰 규모에 속합니다. 근대 철도 부지가 국유지 지목으로 독립적으로 기록된 사례로서, 앞으로 영등포구 일대의 철도 유산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참조될 만한 자료입니다.


11

자주 묻는 질문

Q.1912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일흔여섯 필지였습니다.

Q.영등포동 국유지의 전체 면적은 얼마였나요?

530,346제곱미터였습니다.

Q.영등포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

밭으로, 서른다섯 필지 237,895제곱미터였습니다.

Q.철도용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철도용지는 단 1필지, 206,493제곱미터로 전체의 38.9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

Q.대지, 잡종지, 논, 분묘지, 임야는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 29필지 50,482제곱미터, 잡종지 5필지 26,661제곱미터, 논 2필지 6,082제곱미터, 분묘지 3필지 2,393제곱미터, 임야 1필지 337제곱미터였습니다.


12

한 줄로 정리하는 영등포동 국유지 이야기

한 줄 결론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국유지는 총 일흔여섯 필지 530,346제곱미터였으며, 밭 서른다섯 필지와 철도용지 단 한 필지가 전체 면적의 팔십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농업과 철도가 함께 공존하던 땅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영등포역 앞 어딘가에는, 논둑을 걷던 사람의 발자국과 처음 놓인 철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사람의 눈빛이 함께 겹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잊혀질 뻔한 숫자 하나를 다시 꺼내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기억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등포동의 이 기록도 앞으로 오랫동안 소중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영등포동을 비롯한 서울 곳곳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에서 계속 정리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필요한 현장이라면 더 많은 기초조사 자료를 확인해 보세요.

신뢰도 안내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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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 blog.naver.com/seoulheritage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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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산책자
하루 전
별점 5점 중 5점을 주었습니다.

철도용지가 38.9%나 차지했다는 통계가 인상적입니다. 기차가 서기 전 영등포는 정말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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