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 한 자리와 밭 한 배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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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 한 자리와 밭 한 배미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필지국유지 전체
1,338㎡총면적
2종지목 구성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 백 년 전에는 밭 한 뙈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맑을 청, 서늘할 량. 청량리라는 이름 그 자체처럼 조용했던 땅의 기록이 여기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과 경의중앙선이 만나고, 시장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붐비는 지금의 청량리. 그 한복판에 백 년도 더 된 조용한 기록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땅을 필지 하나하나 세어보던 그 시절, 청량리동에도 나라가 소유한 땅이 있었습니다. 필지 수로는 단 두 곳, 면적을 다 합쳐도 1,338㎡, 테니스 코트 몇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작다면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기록이 지금도 문화재 발굴조사 현장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하는 기관에서 여전히 들춰보는 자료라면 어떨까요. 필지가 크든 작든, 그 안에는 그 시절 사람이 살았는지 농사를 지었는지를 말해주는 단서가 촘촘히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백 년 전 청량리동으로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는 국유지 2필지, 총 1,338㎡가 있었습니다. 이 중 대지는 1필지 694㎡, 밭은 1필지 644㎡였습니다. 즉, 청량리동 국유지는 대지와 밭이 거의 같은 비중으로 나란히 존재했으며, 대지가 밭보다 약 50㎡ 더 넓어 사람이 머무는 자리와 먹고사는 자리가 함께 붙어 있던 작지만 완결된 삶의 단위였습니다.
목차
청량리, 맑고 서늘한 절의 이름을 품은 마을
1912년 청량리동 국유지 전체 현황은 어땠나요?
대지 1필지,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의 기록
밭 1필지, 삶을 지탱했던 땅의 흔적
데이터 검증 노트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과 출처
1.청량리, 맑고 서늘한 절의 이름을 품은 마을
청량리라는 이름은 청량사라는 오래된 절에서 왔습니다. 맑을 청에 서늘할 량. 이름 그대로 맑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한적한 마을이었죠. 낮은 능선과 밭이 어우러진 사이로 초가집 몇 채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계절을 따라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하루를 채워갔습니다.
이 지역은 조선 말기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자리했던 곳과 가까이 맞닿아 있었고, 이후 나라의 산림을 연구하는 기관이 들어서면서 숲과 마을이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1911년 경원선 철도가 놓이고 청량리역이 문을 열면서, 이 조용하던 마을은 서서히 교통의 요지로 변모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912년의 국유지 기록은 바로 그 변화의 문턱, 아직은 논밭이 마을의 중심이던 시절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2.1912년 청량리동 국유지 전체 현황은 어땠나요?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는 국유지가 두 필지 있었고, 그 넓이를 모두 합하면 1,338㎡였습니다. 이 가운데 대지가 한 필지, 694㎡로 조금 더 넓은 비중을 차지했고, 밭이 한 필지, 644㎡로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습니다.
구분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중 |
대지 | 1필지 | 694㎡ | 51.87% |
밭(전) | 1필지 | 644㎡ | 48.13% |
전체 국유지 | 2필지 | 1,338㎡ | 100% |
※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대지694㎡
51.87%
밭644㎡
48.13%
이 표에서 눈에 띄는 건 대지와 밭의 균형입니다. 필지 수는 각각 하나씩으로 같고, 면적 차이도 겨우 50㎡ 남짓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이 균형은, 이 국유지가 순전히 농사를 짓기 위한 땅도, 순전히 거주만을 위한 땅도 아니었다는 걸 짐작하게 해줍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청량리동 국유지는 사람이 머무는 자리와 그 사람이 먹고사는 자리가 나란히 붙어 있던, 아주 작지만 완결된 형태의 삶의 단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대지 1필지,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의 기록
대지는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집터를 뜻합니다. 청량리동에 남아 있는 이 694㎡의 대지는, 지금은 도로와 건물 아래 완전히 자취를 감췄지만 한때는 누군가의 마당이었고, 부엌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자리였을 겁니다.
한 필지에 불과한 대지가 국유지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두 가지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자리가 오래전부터 사람이 머물러온, 마을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 자리였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인근의 관청이나 시설과 관련된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입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건, 이 작은 대지 하나가 그 시절 청량리동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라는 점입니다. 지금 문화유산 조사 현장에서 옛 대지의 위치를 유독 꼼꼼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대지가 있던 자리는 곧 생활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4.밭 1필지, 삶을 지탱했던 땅의 흔적
대지 바로 곁에는 644㎡의 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논만큼 물 관리가 까다롭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작물을 심을 수 있는 밭은, 집 가까이에 두고 매일 드나들며 돌보기에 알맞은 땅입니다. 청량리동의 이 밭도 아마 그런 자리였을 겁니다.
집터와 밭이 이렇게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는 그 시절 흔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당을 지나 몇 걸음 만에 밭에 닿을 수 있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작은 땅에서 나는 것들로 밥상을 채웠을 겁니다. 두 필지라는 숫자는 언뜻 보면 너무 적어서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록은 더 또렷하게 읽힙니다. 넓은 마을 전체가 아니라, 아주 작은 한 구획, 어쩌면 한 가구가 살아가던 최소한의 단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지목별 필지 수 합계는 1 + 1 = 2필지로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 합계 역시 694 + 644 = 1,338㎡로 전체 면적과 오차 없이 일치합니다. 반올림 오차나 전사 오류 없이 완전 정합된 데이터입니다.
5.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왜 이런 백 년 전 토지 기록이 지금까지도 계속 소환되고 있을까요. 문화재 발굴조사나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어떤 지역을 조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진행하는 작업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지표조사란 실제로 땅을 파기 전, 그 지역의 지형과 옛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가늠하는 사전 조사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1912년 국유지 자료, 즉 옛 토지대장은 아주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됩니다.
땅의 지목이 대지였는지 밭이었는지에 따라 그 아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흔적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오랫동안 대지로 이용된 땅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했다는 뜻이라 주거지 유적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게 되고, 밭으로 오래 이용된 땅은 반대로 지표면 아래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시굴조사와 표본조사의 범위와 방법이 정해지고, 이 사전 단계를 거친 뒤에야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청량리동의 이 국유지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지 수가 단 두 곳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 가치가 작아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규모가 작을수록 특정 위치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훗날 이 지역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때 매우 구체적인 실마리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큽니다.

6.자주 묻는 질문
Q1.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2필지, 1,338㎡였습니다.
Q2. 청량리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1필지, 694㎡가 있었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51.87%를 차지했습니다.
Q3. 청량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1필지, 644㎡가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48.13%였습니다.
Q4. 대지와 밭 중 어느 쪽이 더 넓었나요?
A. 대지가 694㎡로, 밭 644㎡보다 약 50㎡ 더 넓었습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
A.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매장유산 조사 절차에서 옛 토지 이용을 확인하는 문헌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7.한 줄 결론과 출처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국유지는 총 2필지 1,338㎡였으며, 대지 694㎡와 밭 644㎡가 나란히 어우러진, 작지만 온전한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자료 및 법령 안내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 1. 31. 개정) ·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 1. 11. 시행)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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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을 청, 서늘할 량.절의 이름이 마을의 이름이 되던 그 시절,두 장의 문서만이 조용히 남았다.마당 하나와 밭 한 뙈기,그 사이를 오가던 몇 걸음의 하루.지금 우리가 무심코 지나는청량리역 앞 분주한 거리 밑에는누군가의 마당을 쓸고 밭을 매던조용한 하루하루가 여전히 겹겹이 쌓여 있다.잊혀질 뻔한 두 장의 숫자가다시 한 사람의 온기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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