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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종각 네거리 곁, 대지 두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일 전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2시간 전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편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종각 네거리 곁, 대지 두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필지국유지 전체

360㎡국유지 총면적

100%대지 비율

약 109평평 환산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는 국유지가 2필지, 총 360㎡ 있었습니다.

이 2필지 360㎡는 모두 대지로, 논·밭·임야 같은 다른 지목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즉, 1912년 관철동 국유지는 한양 도심 한복판의 집터 두 곳, 한 필지 평균 180㎡ 규모였습니다.

매일 수만 명이 지나가는 종각 젊음의 거리.그 땅 아래, 나라 땅은 딱 두 필지뿐이었습니다.

믿기 어렵죠.

술집 간판이 번쩍이고, 버스킹 소리가 울리고, 약속 장소를 찾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곳.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골목 중 하나인 종로구 관철동입니다.

그런데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땅을 한 필지씩 재던 그해. 이 동네에서 국가 소유로 기록된 땅은 고작 두 필지, 360㎡였습니다. 전용 84㎡ 아파트 네 채를 겨우 붙여놓은 넓이죠.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두 필지는 모두 대지, 그러니까 사람이 집을 짓고 살던 땅이었습니다. 논도 밭도 산도 아니었어요.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릴게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종로의 보도블록 아래, 조선 사람들이 밟던 마당이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종각역을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은 달라질 겁니다.


목차

  1. 1912년 관철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였나요?

  2. 관철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3. 1912년, 종로 한복판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4. 숫자로 보는 관철동 국유지 360㎡

  5. 왜 전부 대지였을까? 도심의 땅이 말해주는 것

  6. 360㎡는 얼마나 넓을까? 감으로 느끼는 넓이

  7.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8. 종로 땅 밑에서 나온 한양,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

  9. 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10. 자주 묻는 질문

  11. 한 줄 결론




011912년 관철동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였나요?

답부터 드릴게요.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국유지는 2필지, 총 360㎡였습니다.

그리고 이 2필지는 전부 대지였습니다. 대지 2필지, 360㎡. 국유지 전체와 대지 수치가 정확히 같습니다.

숫자만 보면 너무 작아서 허무할 수도 있어요. 다른 동네 편에서는 국유지가 수십 필지씩 나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은 숫자가 오히려 관철동이라는 땅의 성격을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관철동은 처음부터 농사짓는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한양의 심장, 운종가 바로 곁에 붙은 도시의 동네였죠. 빈 땅이 거의 없고, 한 뼘이라도 비면 집이 들어서던 곳. 그런 곳에서 나라 땅이 두 필지 남아 있었다는 건, 그 자체로 도심의 밀도를 증언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관철동 국유지는 대지 2필지 360㎡가 전부였습니다.


02관철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관철동이라는 이름, 뭔가 단단하게 들리지 않나요? 사실 두 동네 이름에서 한 글자씩 빌려 만든 이름입니다.

먼저 '관'은 관자동에서 왔습니다. 관자는 망건에 달던 작은 고리 장식이에요. 이 일대에 관자를 만들던 장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철'은 철물교에서 왔습니다. 청계천 위에 놓였던 다리 이름이죠. 다리 근처에 쇠붙이와 철물을 팔던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장신구 장인과 철물 상인. 이름에서 벌써 손으로 물건을 만들고 사고팔던 사람들의 체온이 느껴집니다. 관철동이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주변 동네들을 합치면서 정식으로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이 다루는 1912년 기록은, 관철동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생기기 직전의 땅을 지금의 관철동 범위로 묶어 본 자료라고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이름보다 땅이 먼저 있었던 셈이죠.


031912년, 종로 한복판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잠깐 눈을 감고 1912년 종로로 가볼게요.

종로 큰길에는 조선 시대 내내 시전 행랑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구름처럼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운종가라고 불렸죠. 비단, 무명, 종이, 어물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좁은 골목과 작은 집들이 빼곡했습니다.

관철동은 바로 그 운종가의 남쪽 뒤편입니다. 위로는 종로, 아래로는 청계천. 보신각 종소리가 가장 가깝게 울리던 동네이기도 합니다.

1912년은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던 해였습니다. 전차가 종로를 달리기 시작한 지 십여 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모든 땅에 번호를 매기고, 주인과 용도를 장부에 적어 넣고 있었습니다.

그 장부 속에서 관철동의 나라 땅 두 필지는 '대지'라는 이름으로 적혔습니다. 누군가의 마당이었고, 누군가의 부엌이었고, 어쩌면 관청 부속 건물이 서 있던 자리였을 땅입니다. 장부는 말이 없지만, 대지라는 두 글자는 그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남겨두었습니다.



04숫자로 보는 관철동 국유지 360㎡

말로 풀어낸 이야기를 표 하나로 정리해볼게요.

구분

필지 수

면적

비율

전체 국유지

2필지

360㎡

100%

대지

2필지

360㎡

100%

논·밭·임야 등

0필지

기록 없음

0%

지목별 면적 비율

대지

360㎡

논·밭·임야

0㎡

이미지 설명: 1912년 관철동 국유지 지목 비율. 대지 2필지 360㎡가 전체의 100%를 차지한다.

필지 수로도 100%, 면적으로도 100% 대지입니다. 지목이 하나뿐이라 표가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조사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선명한 자료가 드뭅니다.

두 필지를 나란히 놓으면 이런 그림이 됩니다. 원자료에는 필지별 면적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아, 아래는 평균값으로 나눈 이해용 도식입니다.

약 180㎡국유 대지 · 필지 A(평균)

약 180㎡국유 대지 · 필지 B(평균)

이미지 설명: 관철동 국유 대지 2필지를 평균 면적 180㎡씩 나누어 표시한 개념도. 실제 필지별 면적은 다를 수 있다.


05왜 전부 대지였을까? 도심의 땅이 말해주는 것

이번 시리즈에서 여러 동네를 걸어왔습니다. 산자락 아래 논이 이어진 동네도 있었고, 밭과 임야가 뒤섞인 동네도 있었죠.

관철동은 완전히 다릅니다. 국유지 전부가 대지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이곳은 조선 오백 년 동안 한양 도성 안에서도 가장 붐비는 상업 지대였으니까요.

도성 안 한복판에 논을 둘 여유는 없습니다. 물길이라고 해봐야 청계천 하나. 땅은 곧 집이고, 가게고, 창고였습니다. 그러니 나라 땅이 남아 있더라도 그 역시 건물이 서는 대지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국유지가 두 필지뿐이라는 건, 관철동 땅 대부분이 이미 개인 소유로 잘게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인과 장인들이 저마다 작은 필지를 쥐고 살던 동네. 관자를 깎고, 철물을 팔던 사람들의 삶터가 필지 하나하나에 스며 있었던 셈입니다.

관철동 국유지가 100% 대지였다는 것은, 이 땅이 1912년 이전부터 이미 완전한 도시였다는 증거입니다.


06360㎡는 얼마나 넓을까? 감으로 느끼는 넓이

360㎡라는 숫자, 솔직히 감이 잘 안 오죠. 몇 가지로 바꿔볼게요.

평으로 바꾸면 약 109평입니다. 두 필지로 나누면 한 필지 평균 180㎡, 약 54평이에요. 조선 도성 안 중소 규모 한옥 한 채가 마당까지 품고 들어설 만한 크기입니다.

농구 코트 한 면이 대략 420㎡니까, 관철동 국유지 전체는 농구 코트 하나보다 조금 작습니다.

지금의 관철동 전체 면적은 약 0.081㎢, 그러니까 81,000㎡ 정도입니다. 여기에 360㎡를 대보면 약 0.44%. 동네 전체를 백 칸으로 나눴을 때 반 칸도 채 안 되는 넓이입니다. 1912년 당시의 경계는 지금과 조금 달랐을 수 있으니, 이 비율은 규모를 체감하기 위한 참고 수치로 봐주세요.

작다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발굴 현장에서는 한 채의 집터, 한 줄의 담장 기초가 한 시대를 증명하기도 합니다. 크기가 아니라 위치가 중요한 땅. 관철동의 360㎡가 바로 그런 땅입니다.



07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백 년도 넘은 두 줄짜리 기록이 왜 지금 필요할까요?

종로 같은 도심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재개발을 하려면, 땅을 파기 전에 그 아래 문화유산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그 절차를 정하고 있어요.

순서는 보통 이렇습니다. 가장 먼저 문화재 지표조사.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토지대장, 현장 지표면을 살펴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오늘 본 1912년 국유지 기록이 바로 이 단계의 기초 자료입니다.

다음은 표본조사. 조사 범위 중 일부를 표본으로 골라 얕게 확인합니다. 이어서 시굴조사. 트렌치라고 부르는 좁고 긴 구덩이를 파서 유구가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죠. 그리고 유적이 확인되면 마지막으로 전면 발굴조사로 넘어갑니다.

관철동처럼 국유지가 전부 대지였던 곳은 판단 포인트가 분명합니다. 대지는 사람이 건물을 짓고 살던 땅입니다. 그 아래에는 건물 기초, 담장, 아궁이, 우물, 생활 도구 같은 흔적이 층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한 자리에 여러 시대의 집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경우도 흔하죠.

그래서 문화재 발굴 기관은 도심 대지를 조사할 때 층위를 특히 꼼꼼히 봅니다. 1912년 지목이 대지였다는 한 줄은, 시굴조사 트렌치를 어디에 얼마나 깊게 넣을지 정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08종로 땅 밑에서 나온 한양,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

"도심 한복판에 뭐가 남아 있겠어?" 이런 생각, 한 번쯤 해보셨죠. 그런데 종로는 그 생각을 여러 번 뒤집은 곳입니다.

대표적인 곳이 관철동에서 멀지 않은 공평동입니다.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고층 빌딩을 짓기 전 발굴조사를 했더니, 조선 한양의 골목길과 집터가 층층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이 유적은 없애지 않고 빌딩 지하에 그대로 보존됐고, 지금은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걸어서 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종로 청진동 일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재개발 전 조사에서 피맛길을 따라 늘어섰던 조선 시대 건물터와 생활 유물이 대량으로 확인됐습니다. 시전 뒷골목의 삶이 흙 속에 그대로 봉인되어 있었던 거죠.

이 성공 사례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조선 시대부터 줄곧 대지였던 도심의 땅이라는 것. 그리고 옛 지적 기록과 지표조사를 통해 유적 가능성을 미리 짚었기에, 공사 도중 유적이 훼손되는 일을 막고 보존과 개발을 함께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관철동의 대지 두 필지도 같은 계보에 서 있습니다. 운종가 바로 뒤, 보신각 종소리가 들리던 집터. 언젠가 이 자리에 조사가 이뤄진다면, 1912년의 이 짧은 기록이 가장 먼저 펼쳐질 겁니다.



09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검증 노트

원자료는 "국유지 2필지 360㎡"와 "국유지 중 대지 2필지 360㎡" 두 항목입니다. 두 수치가 정확히 일치하므로 필지 수·면적 모두 대지가 100%이며, 합계 불일치나 누락은 없습니다.

360㎡는 평으로 약 108.9평입니다. 109평을 ㎡로 환산하면 약 360.3㎡가 되므로, 원장부가 평 단위(약 109평)로 기재되었고 ㎡ 환산 과정에서 반올림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제공된 360㎡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필지별 개별 면적은 원자료에 없어, 본문의 180㎡는 단순 평균값입니다. 관철동이라는 동명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생겼으며, 1912년 자료는 현재 관철동 범위를 기준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관철동은 국유지 전부가 대지로만 구성된 '100% 대지형' 동네입니다. 앞서 소개한 용산구 문배동이 국유지 전부가 논이었던 '100% 논형'이었다면, 관철동은 정확히 반대편에 선 도심형 기록입니다.

국유지 360㎡는 시리즈 안에서도 매우 작은 규모에 속합니다. 규모는 작지만, 한양 도성 한복판의 지목 구성을 보여주는 기준점으로 기록해 둡니다.


10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2필지였습니다.

1912년 관철동 국유지의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총 360㎡, 약 109평이었습니다.

1912년 관철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2필지 360㎡로, 국유지 전체가 대지였습니다.

관철동 국유지에 논이나 밭, 임야도 있었나요?

원자료 기준으로 논·밭·임야 등 다른 지목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이 문화재 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대지는 사람이 살던 땅이라 건물지·생활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표본조사 범위를 정하는 기초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11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국유지는 총 2필지 360㎡였으며, 그 전부가 사람이 살던 대지였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종각역 출구를 나서면, 아주 잠깐만 발밑을 봐주세요. 그 아래 어딘가에 관자를 깎던 장인의 작업대가, 철물을 팔던 상인의 문지방이, 보신각 종소리에 잠을 깨던 누군가의 방바닥이 조용히 누워 있을지 모릅니다.

두 필지, 360㎡. 장부 속에서는 한 줄이지만, 그 땅 위에서는 누군가의 평생이었습니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잊힐 뻔한 한 줄을 다시 읽어주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동네 땅 밑에는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까요? 서울 25개 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기초자료 보러 가기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신뢰도 안내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종소리 가장 가까운 골목에


나라의 땅은 두 칸뿐이었다



논도 밭도 아닌


사람이 눕고 일어나던 자리



관자를 깎던 손끝과


철물교 건너던 발소리가


삼백육십 제곱미터 아래


아직 식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912년 종로구 관철동의 이슈

  1.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 2필지 360㎡ 정리

  2. 1912년 관철동 국유지 현황: 대지 2필지, 총 360㎡

  3. 종각 젊음의 거리 아래 나라 땅은 얼마였을까? 1912년 관철동 역사

  4. 관철동 역사, 1912년 국유지가 전부 대지였던 이유는?

  5.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읽는 1912년 종로 관철동 국유지 기록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관철동 편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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