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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9월 10일
5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초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서초구 잠원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44필지밭 면적 84.0%대지 24필지임야 2필지

중전과 세자빈은 직접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이며,백성들에게 길쌈의 본을 보였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총 44필지, 529,318㎡였습니다. 밭이 18필지 444,825㎡로 면적의 84.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이었고, 대지가 24필지 59,243㎡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임야도 2필지 25,249㎡ 있었습니다.

잠원동(蠶院洞)이라는 이름은 두 마을의 이름을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이 자리는 '잠실리(蠶室里)'라 불렸는데, 1963년 서울로 편입될 때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과 이름이 겹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를 피하려고 잠실리의 '잠(蠶)' 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院)' 자를 합쳐 지금의 잠원동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습니다.

잠실리라는 원래 이름에는 조선 왕실의 특별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 1년(1470) "각 도에 잠실을 1개씩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중기 문신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요사이 또 설치한 신(新) 잠실은 한강 아래쪽 서쪽 동네 원단동에 있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 원단동이 바로 지금의 잠원동 일대입니다. 잠실은 견사(絹絲)를 만들기 위해 누에를 치는 국립 시설로, 중전과 세자빈이 직접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치는 일을 익혀 백성들에게 길쌈 시범을 보이려 했던 곳입니다.

실제로 지금 신반포16차 아파트 자리에는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잠실리 뽕나무가 고사목 상태로 남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재개발 과정에서도 서울시가 이전을 허가하지 않아, 2024년 보존을 조건으로 재건축 허가가 났을 만큼 소중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1912년의 이 자리 국유지 장부에서, 밭이 18필지에 불과했음에도 444,825㎡, 국유지 전체 면적의 84.0%라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뽕나무밭이었던 이 자리의 특성이, 이 극단적인 데이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목차

  1.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2. 국유지 밭 18필지, 뽕나무밭의 실체

  3. 국유지 대지 24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4. 국유지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5. 데이터 검증 노트

  6. 지목별 현황 표

  7.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9. 자주 묻는 질문

  10. 한 줄 결론


1.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서초구 잠원동의 국유지는 총 44필지, 529,318㎡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160,119평입니다.

조선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불려온 이 마을은, 1914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가 되었고,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며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잠포동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잠원동이 되었습니다. 1975년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 서초구가 강남구에서 분리 신설되며 서초구 관할이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서초구의 염곡동, 양재동, 신원동, 우면동, 반포동, 내곡동을 다루었습니다. 이번 잠원동 국유지 편은 그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지금의 잠원동은 서초구 반포동, 강남구 압구정동에 이어 2021년 기준 서울 주택 매매가 3위를 차지하는 손꼽히는 부촌으로 성장했습니다.


2. 국유지 밭 18필지, 뽕나무밭의 실체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에는 밭이 18필지, 444,825㎡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40.9%지만, 면적으로는 84.0%라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24,712.5㎡, 약 7,476평이라는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도 최상위권의 방대한 규모입니다. 왕실이 직접 관리하던 신잠실의 뽕나무밭이 대부분 국유지로 편입되어 있었음을 이 수치가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미지 제작 프롬프트 21912년 잠원동 국유 뽕나무밭 풍경을 수채화로 표현. 넓은 뽕나무 밭에서 누에 치는 여인들과 뽕잎을 나르는 한복 차림의 한국인들의 모습. 화면에 텍스트 없음.


3. 국유지 대지 24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잠원동 국유지에는 대지가 24필지, 59,243㎡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54.5%로 가장 많은 필지 수를 이루는 지목입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은 2,468.5㎡, 약 747평으로 넉넉한 규모입니다. 잠실도회를 관리하던 시설과 관계자들이 머물던 집터들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4. 국유지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잠원동 국유지에는 임야가 2필지, 25,249㎡ 있었습니다.

임야 한 필지의 평균은 12,624.5㎡, 약 3,820평이라는 넓은 규모입니다. 한강변에 가까운 이 자리의 산림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5.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 검증: 대지 24 + 임야 2 + 밭 18 = 44필지로, 전체 합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검증: 59,243 + 25,249 + 444,825 = 529,317㎡로, 전체 면적 529,318㎡와 1㎡의 극히 근소한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평(坪) 단위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상적인 반올림 오차로 판단됩니다.


6. 지목별 현황 표

구분

필지 수

면적(㎡)

필지 비율

면적 비율

18필지

444,825㎡

40.9%

84.0%

대지

24필지

59,243㎡

54.5%

11.2%

임야

2필지

25,249㎡

4.5%

4.8%

전체

44필지

529,318㎡

100%

100%

표 설명: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으로, 대지가 필지 수, 밭이 면적에서 각각 최대 비중을 차지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

잠원동은 조선 왕실 여성들이 직접 누에를 치며 백성에게 시범을 보였던 실제 국립양잠소가 있던 자리로, 그 흔적인 서울시 기념물 제1호 잠실리 뽕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는 이 시리즈 각별한 사례입니다. 잠실동(송파구)과 이름이 겹쳐 개명했다는 사연도 흥미롭습니다.

염곡동, 양재동, 신원동, 우면동, 반포동, 내곡동에 이은 서초구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7.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잠원동의 기록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조선 전기 신잠실도회의 정확한 시설 배치와 규모를 확인하는 일은 조선시대 왕실 양잠 정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잠실리 뽕나무를 중심으로 한 옛 뽕나무밭의 원형 경계를 정밀하게 확인하는 일도 이 지역 산업사 연구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서잠실(서대문구 연희동), 동잠실(송파구 잠실동)과 이 신잠실을 함께 비교 조사한다면, 조선시대 국가 양잠 정책의 전체 그림을 온전히 복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전과 세자빈이 직접 뽕잎을 따며 백성에게 본을 보였던 그 정성은, 5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지금도 죽은 뽕나무 한 그루의 모습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잠실리 뽕나무, 죽어서도 지켜낸 양잠의 역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이 고사목은,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 깊은 나무입니다. 2010년대 후반 재개발 과정에서 옮겨질 위기에 처했지만 서울시가 허가하지 않았고, 2024년에는 보존을 조건으로 재건축 허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조선 왕실 양잠 문화의 살아있는 증거로서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낸 귀중한 사례입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9.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44필지, 529,318㎡(약 160,119평)였습니다.

Q. 잠원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원래 잠실리(蠶室里)였으나, 1963년 서울 편입 때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과 이름이 겹쳐 잠실리의 '잠' 자와 인근 신원리의 '원' 자를 합쳐 지금의 잠원동이 되었습니다.

Q. 신잠실은 무엇인가요?

A. 조선 성종 대 설치된 국립 양잠 시설로, 중전과 세자빈이 직접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를 쳐 백성들에게 길쌈 시범을 보이던 곳입니다. 서잠실(연희동), 동잠실(잠실동)과 함께 전국 세 곳의 잠실 중 하나였습니다.

Q. 잠실리 뽕나무는 지금도 남아 있나요?

A. 네. 조선 전기 것으로 추정되는 고사목이 신반포16차 아파트 인근에 남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0.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총 44필지 529,318㎡로, 밭이 면적의 84.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을 이루었으며, 조선 왕실 여성들이 직접 누에를 치며 백성에게 본을 보였던 신잠실의 오랜 기억을 지금도 죽은 뽕나무 한 그루의 모습으로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대지·임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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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중전과 세자빈은 직접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이며,


백성들에게 길쌈의 본을 보였다.



열여덟 곳의 드넓은 밭이 이 국유지 면적의 대부분을 채웠다.



스물넉 채의 집터와 두 곳의 숲이 그 곁을 함께 지켰다.



잠실동과 이름이 겹치자, 이 마을은 잠실과 신원의 이름을 합쳐 새로 태어났다.



5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뽕나무 한 그루는 죽어서도 자리를 지켰다.



이제 그 밭이 있던 자리에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잠원동 국유지의 44필지에 다시 그 왕실 양잠의 정성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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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산책자
하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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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던 자리였다니, 잠원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이렇게 깊은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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