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문배산 자락을 적신 논 두 배미의 기록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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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문배산 자락을 적신 논 두 배미의 기록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1912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 2필지 총정리
1912년 문배동 국유지 현황, 논 2필지 3,768㎡ 완전 분석
문배산 자락의 옛 논, 국유지 두 배미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문화유산 기초조사로 다시 보는 1912년 문배동 국유지 기록
논 2필지 3,768㎡, 1912년 문배동 국유지는 왜 전부 논이었을까

두 필지, 삼천칠백육십팔 제곱미터. 이 숫자가 문배동의 전부였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지하철 삼각지역과 숙대입구역 사이, 오피스텔과 사무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용산구 문배동 땅 밑에는 백 년도 더 된 기록이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토지를 필지 하나하나 조사하던 그 시절, 문배동에 있던 국가 소유의 땅은 단 두 곳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필지, 면적으로는 3,768제곱미터에 이르는 이 땅이 전부 하나의 지목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바로 논이었습니다. 대지도, 밭도, 임야도 아닌 오직 논. 문배동이라는 작은 동네의 국유지 기록 전체가 물을 머금은 논 두 배미로만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이 땅의 지형과 물길을 그대로 증언하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단서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 현장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들리지 않을까요.
오늘은 그 백 년 전 문배동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보려 합니다. 필지 두 곳, 숫자로는 단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문배산이라는 사라진 산의 흔적과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 하천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왜 이렇게 작은 기록 하나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소중하게 다뤄지는지, 그리고 이 땅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전혀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目次
목차
핵심 요약, 이 숫자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이유
1912년의 문배동, 그 시절 이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유지 2필지 3,768㎡, 숫자로 먼저 만나보기
논 2필지 3,768㎡, 문배산 자락을 적셨던 물길의 흔적
국유지 전부가 논이었다는 것, 이 작은 동네만의 특별한 기록
이 숫자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
기초자료 하나가 만든 변화, 실제 조사 성공 사례
검증 노트, 이 기록을 있는 그대로 전해드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한 줄로 정리하는 문배동 국유지 이야기
01
핵심 요약, 이 숫자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이유
1912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에는 국유지가 두 필지 있었고, 그 넓이를 모두 합하면 3,768제곱미터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필지는 예외 없이 전부 논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대지도 밭도 임야도 없이, 오직 논 두 배미가 문배동 국유지 기록의 전부였던 셈입니다.
숫자만 보면 단출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필지 수가 두 곳에 불과하니 다른 동네의 서른 필지, 쉰 필지에 비하면 규모도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기록이 오히려 더 선명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국유지 전체가 단일 지목, 그것도 논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예로부터 물과 매우 밀접한 땅이었다는 걸 곧바로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넓은 논밭과 대지, 임야가 복잡하게 뒤섞인 동네보다, 오히려 이렇게 단순하고 일관된 기록이 그 땅의 성격을 더 또렷하게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2필지전체 국유지
3,768㎡전체 면적
100%논 비율

02
1912년의 문배동, 그 시절 이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문배동을 떠올리면 삼각지 로터리 인근의 오피스텔과 사무용 건물, 그리고 경부선 철길을 따라 늘어선 도시적인 풍경이 먼저 그려질 겁니다. 하지만 백 년 조금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문배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지역의 옛 지형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지금의 신계동 자리에 있었던 문배산이라는 나지막한 산에서 이 동네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산이 있었다는 것은 그 주변으로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와 완만한 경사지가 함께 있었다는 뜻이고, 실제로 이 일대에는 청파로 아래를 따라 만초천이라는 하천이 흘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욱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하천은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지만, 1912년 그 시절에는 문배동 들녘을 적시는 실질적인 생명줄이었을 겁니다.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좁고 완만한 저지대에 고이면, 그 땅은 자연스럽게 논으로 개간되기 마련입니다. 넓은 평야가 아니라 산과 하천 사이에 낀 좁은 땅이었기 때문에 필지 수 자체는 많지 않았을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두 필지, 3,768제곱미터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훗날 이 일대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산업지대로 탈바꿈하며 부채꼴 모양의 독특한 경계를 갖추게 되지만, 1912년의 문배동은 아직 산과 물과 논이 어우러진 조용한 농촌 마을에 가까웠던 셈입니다.
03
국유지 2필지 3,768㎡, 숫자로 먼저 만나보기
말로 풀어놓은 이야기를 표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숫자로 보면 문배동 국유지의 전체 그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구분 | 필지 수 | 면적 |
전체 국유지 | 2필지 | 3,768㎡ |
논 | 2필지 | 3,768㎡ |
밭 | 0필지 | 해당 없음 |
대지 | 0필지 | 해당 없음 |
임야 | 0필지 | 해당 없음 |
이 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두말할 필요 없이 논이 차지하는 비율입니다. 필지 수로도, 면적으로도 100퍼센트가 논입니다. 다른 동네의 국유지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 보통 논과 밭, 대지, 임야가 저마다의 비중으로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문배동은 그런 혼합이 전혀 없이 오직 하나의 지목으로만 국유지 전체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문배동 국유지는 두 필지 3,768제곱미터 전부가 논이었으며, 다른 지목은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04
논 2필지 3,768㎡, 문배산 자락을 적셨던 물길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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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 있으려면 반드시 안정적인 물이 있어야 합니다. 문배동에 두 필지, 3,768제곱미터에 이르는 논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동네 어딘가에 꾸준히 물을 댈 수 있는 물길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셈입니다. 앞서 살펴본 만초천, 그리고 문배산에서 흘러내렸을 작은 계류가 바로 그 물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도로와 건물 아래 완전히 모습을 감췄지만, 백 년 전 이맘때쯤이면 문배동의 논에도 못자리가 만들어지고, 여름이면 초록빛으로 물든 벼가 산자락 아래에서 자라났을 겁니다. 두 필지라는 작은 규모는, 넓은 평야가 아니라 산과 하천 사이의 좁고 아늑한 땅에서 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규모는 작아도 이 논은 그 시절 문배동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터전이었을 겁니다.
논농사는 혼자서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을 대고 빼는 시기를 이웃과 맞추고, 모내기와 추수 때마다 서로 일손을 거들며 마을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다져졌습니다. 지금 문화유산 조사에서 옛 논의 위치와 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논이 있던 자리는 곧 물길이 지나던 자리이고, 물길이 지나던 자리는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렀던 자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05
국유지 전부가 논이었다는 것, 이 작은 동네만의 특별한 기록
문배동 국유지 기록을 다른 동네와 나란히 놓고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시리즈에서 함께 살펴본 여러 동네들은 대체로 논과 밭이 함께 섞여 있거나, 대지와 임야까지 골고루 분포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배동은 필지 두 곳, 면적 3,768제곱미터 전체가 예외 없이 논이었습니다.
이렇게 단일 지목으로만 국유지가 구성된 사례는 시리즈 전체를 놓고 보아도 흔치 않은 기록입니다. 필지 수가 적다는 것 자체는 아쉬울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성격이 더 또렷하게 읽힙니다. 문배동의 국유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을 머금은 저지대, 산자락 아래 형성된 좁은 논이었다는 사실을 별도의 추정 없이 기록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작은 숫자라고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단순하고 일관된 기록일수록 조사 현장에서는 더 명확한 판단 기준이 되어줍니다. 지목이 뒤섞여 있으면 그 땅의 성격을 하나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문배동처럼 전부가 하나의 지목이라면 이 땅이 오랫동안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곧바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06
이 숫자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왜 이런 백 년 전, 그것도 단 두 필지에 불과한 작은 토지 기록이 지금까지도 계속 소환되고 있을까요.
문화재 발굴조사나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어떤 지역을 조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진행하는 작업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지표조사란 실제로 땅을 파기 전에 그 지역의 지형과 옛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유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사전 조사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옛 토지대장, 그러니까 오늘 살펴본 것과 같은 1912년 국유지 자료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참고 자료가 됩니다.
특히 문배동처럼 국유지 전체가 논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지역은 조사 방향을 정하는 데 오히려 더 명확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오랫동안 논으로 이용된 저지대는 지속적인 경작과 물 관리로 인해 지표면 아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반면, 산자락과 맞닿은 경계 지점은 지형 변화나 매몰 가능성을 함께 살펴야 하는 구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시굴조사, 즉 좁은 범위를 시험 삼아 파보는 조사와 표본조사, 일정 구간을 표본으로 삼아 확인하는 조사의 범위와 순서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이 사전 단계를 충분히 거친 뒤에야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문배동 국유지 2필지, 3,768제곱미터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끝나는 정보가 아닙니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개발이나 조사가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펼쳐 봐야 할 기초 자료가 되는 셈입니다.
07
기초자료 하나가 만든 변화, 실제 조사 성공 사례

이런 기초조사 자료가 실제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는 서울 도심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재개발이나 도로 정비를 앞두고 진행되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조사팀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옛 지적도와 토지대장입니다.
한 지역에서는 오래된 지적 자료를 통해 특정 필지가 과거 오랫동안 논으로만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를 근거로 시굴조사 구간을 효율적으로 좁혀 조사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목이 자주 바뀌었거나 여러 용도로 혼재되어 있던 구역은 표본조사의 우선순위를 더 높여 신중하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조사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초자료 하나가 조사의 방향과 순서, 나아가 조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까지 실질적으로 바꿔놓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문배동의 이 국유지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저 두 줄짜리 옛 통계처럼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이 지역에서 조사가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펼쳐질 자료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필지 수가 적다고 해서 그 가치가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명확한 기록일수록 조사의 첫 단추를 정확하게 꿰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08
검증 노트, 이 기록을 있는 그대로 전해드립니다
검증 노트
이번 문배동 자료는 제공된 원자료가 국유지 총 2필지, 총면적 3,768제곱미터이며 전부 논으로 분류된다는 단일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필지 수와 면적을 더해보아도 전체 합계와 정확히 일치하며, 별도의 반올림 오차나 수치 불일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밭, 대지, 임야 등 다른 지목에 대한 자료는 원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해당 지목이 문배동 국유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임의로 다른 수치를 추정하거나 채워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미기재 항목 없이 논 단일 지목으로 명확히 전해드립니다. 앞으로 문배동과 관련한 추가 자료가 확보되는 대로 이 기록은 계속 보완해나갈 예정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지금까지의 시리즈 기록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동네가 논, 밭, 대지, 임야 등 여러 지목이 섞여 있는 형태였습니다. 문배동처럼 국유지 전체가 단 하나의 지목, 그것도 논으로만 100퍼센트 구성된 사례는 시리즈 안에서도 눈에 띄는 기록입니다. 필지 수 자체는 적지만 지목의 순도만큼은 이번 시리즈에서 손꼽힐 만한 동네로 남을 것 같습니다.
09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두 필지였습니다.
1912년 문배동 국유지의 전체 면적은 얼마였나요.
전체 면적은 3,768제곱미터였습니다.
문배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은 두 필지, 3,768제곱미터로 국유지 전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문배동 국유지 중 밭이나 대지, 임야는 있었나요.
원자료 기준으로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국유지 전체가 논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지목이 단순하고 명확할수록 시굴조사와 표본조사의 범위를 정하는 데 참고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10
한 줄로 정리하는 문배동 국유지 이야기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용산구 문배동 국유지는 총 두 필지 3,768제곱미터였으며, 그 전부가 예외 없이 논으로 이루어진 대단히 단순하고도 선명한 기록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심코 지나다니는 삼각지 인근, 문배동의 빌딩 숲 아래에는 백 년 전 누군가가 논둑을 오가며 못자리를 살피던 시간이 여전히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필지 두 곳, 면적 3,768제곱미터라는 작은 숫자가 사실은 문배산 자락과 만초천이 함께 빚어낸 그 시절 사람들의 하루하루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 짧은 기록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잊혀질 뻔한 숫자 두 줄을 다시 꺼내어 그 안에 담긴 물길과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배동의 이 작은 기록도 앞으로 오랫동안 소중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신뢰도 안내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용산구 문배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용산구 문배동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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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논 2필지, 3,768㎡라는 작은 숫자 안에 문배산 자락의 옛 풍경이 담겨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지금의 오피스텔 지대와 비교하니 격세지감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