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강동구 성내동 국유지는 몇 필지 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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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성 안쪽,
그 땅은 논이었고 밭이었다"
114년 전 종이 위의 숫자가, 풍납토성 담장 안 마을의 하루를 증언한다
32필지
전체 국유지
105,438㎡
전체 면적
70.9%
밭 비율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에는 국유지 32필지, 총 105,438㎡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밭이 17필지 74,803㎡로 가장 넓었고, 논이 11필지 27,180㎡로 뒤를 이었으며, 대지 2필지 991㎡와 임야 2필지 2,462㎡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 자료는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안쪽 마을의 1912년 토지 이용 실태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쓰입니다.
성내동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은, 그저 여느 서울 동네 이름이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름 안에는 아주 구체적인 지리가 숨어 있다. 성(城)의 안(內)쪽 동네, 즉 풍납토성이라는 백제 왕성 담장 바로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아파트와 관공서가 빼곡히 들어선 강동구의 행정 중심지지만, 114년 전 이 땅은 백제의 흔적을 품은 채 조용히 농사짓는 마을이었다. 그 시절 이 땅의 주인 중 한 축이 바로 국가였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이 숫자를 다시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다.
목차
풍납토성 안쪽 마을, 1912년 성내동으로 들어가며
국유지 32필지, 105,438㎡의 전체 그림
밭 17필지 74,803㎡ — 성내동 땅의 절대다수
논 11필지 27,180㎡ — 물길이 있던 자리의 증거
대지 2필지, 임야 2필지 — 작지만 놓칠 수 없는 조각
지목별 비교, 숫자로 다시 읽는 성내동
1912년 성내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 경기도 광주군의 기록
풍납토성이 증명한다 — 문화유산 지표조사가 중요한 진짜 이유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풍납토성 안쪽 마을, 1912년 성내동으로 들어가며
성내동의 유래는 명확하다. 풍납토성 안쪽에 마을이 있어서 성안말, 혹은 안말이라 불렸고, 그 이름이 그대로 한자화되어 성내리, 지금의 성내동이 됐다. 성안말과 곰말, 안말, 벌말이라는 작은 자연마을들이 1914년 하나로 묶이면서 지금의 동네 이름이 자리를 잡았다.
풍납토성은 다들 알다시피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토성이다. 그 담장 안쪽에서 백 년 넘게 농사를 지어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땅의 상당 부분이 국가 소유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특별한 땅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1912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성내동의 국유지는 서른두 필지, 십만 제곱미터가 넘는 규모로 장부에 남았다. 그 안에는 논도 있었고 밭도 있었고, 사람이 사는 대지와 산자락의 임야도 함께 있었다.
성내동은 이후로도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성동구 소속이 됐고, 1975년에는 강남구로, 1979년 강동구가 독립하면서 비로소 지금의 강동구 성내동이 됐다. 과거에는 벽돌, 옹기, 화분을 굽는 공장들이 모여 있던 서울 외곽의 공업 지역이기도 했고, 6·25 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정착하며 마을의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지금은 강동구청, 강동경찰서, 강동소방서 같은 관공서들이 모여 있는 강동구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았지만, 그 시작은 풍납토성 담장 안쪽에서 논밭을 일구던 작은 마을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이 숫자들이 다시 일깨워 준다.

2국유지 32필지, 105,438㎡의 전체 그림
숫자부터 정리하고 가자. 1912년 성내동 국유지는 모두 서른두 필지, 합쳐서 105,438㎡였다. 평수로 환산하면 약 31,895평, 축구장 열네 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더 넓은 규모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전체 국유지 | 32필지 | 105,438㎡ | 100% |
밭 | 17필지 | 74,803㎡ | 70.9% |
논 | 11필지 | 27,180㎡ | 25.8% |
임야 | 2필지 | 2,462㎡ | 2.3% |
대지 | 2필지 | 991㎡ | 0.9% |
한 줄 요약 · 1912년 성내동 국유지는 밭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경 마을 구조였으며, 그 사이사이 논과 소규모 대지, 임야가 함께 자리했다.
3밭 17필지 74,803㎡ — 성내동 땅의 절대다수
성내동 국유지의 압도적인 주인공은 밭이다. 열일곱 필지, 74,803㎡라는 숫자는 전체 국유지 면적의 무려 70.9%에 해당한다. 필지 하나당 평균 4,400㎡가 넘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밭들이 마을 곳곳에 퍼져 있었다는 뜻이다.
밭은 논보다 물 관리 부담이 적고 다양한 작물을 심을 수 있어, 지형이 다소 높거나 물을 대기 어려운 자리에도 폭넓게 조성된다. 성내동의 밭이 이렇게 넓게 분포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의 지형이 완전히 평탄한 저지대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함께 보여준다.
넓은 밭이 국유지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성내동이라는 지역 전체의 토지 이용 구조를 짐작하게 해준다. 마을 한가운데 넓은 밭이 자리 잡고, 그 주변으로 논과 집터가 이어지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공간 구조는 지금의 행정구역이나 도로망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이며, 오직 이런 옛 지적 자료를 하나하나 들여다볼 때만 비로소 그 시절 마을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4논 11필지 27,180㎡ — 물길이 있던 자리의 증거
논이 있으려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성내동에 열한 필지, 27,180㎡에 이르는 논이 있었다는 건, 이 마을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물을 댈 수 있는 물길이나 저수 시설이 있었다는 뜻이다. 풍납토성 바로 안쪽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한강과 가까운 저지대의 습윤한 토양이 논농사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모내기와 추수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일손을 보탰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결속이 다져졌다. 지금 문화유산 조사에서 옛 논의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논이 있던 자리는 곧 물이 흐르던 자리이고, 물이 흐르던 자리는 사람이 오래 머물렀던 자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5대지 2필지, 임야 2필지 — 작지만 놓칠 수 없는 조각
대지는 991㎡, 임야는 2,462㎡. 필지 수만 보면 각각 두 곳씩, 전체 비중으로는 3%가 채 안 된다. 그러나 이 작은 숫자에도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대지는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집터를 의미한다. 국유지 안에 형성된 대지가 두 필지에 불과했다는 건, 마을의 국유지 대부분이 경작지였고 실제 거주는 소규모로 이뤄졌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 두 곳이 관청이나 오래된 마을 중심지와 관련됐을 가능성도 함께 남는다.
임야 역시 마찬가지다. 풍납토성 담장 바깥, 혹은 마을 뒤편 어딘가에 나지막한 산자락이나 구릉이 있었고, 그 일부가 국가 소유의 산림으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넓은 논밭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대지 하나가, 오래된 마을 중심지의 흔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사 현장에서는 오히려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필지들이 오히려 조사 현장에서는 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넓은 논밭 사이에 유독 도드라지는 작은 대지 하나, 혹은 유독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 임야 한 조각이, 사실은 옛사람들이 오래도록 머물렀던 흔적일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유산 조사자들은 큰 필지보다 오히려 이런 작은 필지들의 위치와 형태를 더 꼼꼼히 들여다보곤 한다.
6지목별 비교, 숫자로 다시 읽는 성내동
밭74,803㎡ (70.9%)
논27,180㎡ (25.8%)
임야2,462㎡ (2.3%)
대지991㎡ (0.9%)
네 가지 지목을 나란히 놓고 보면, 성내동은 명백히 밭 중심의 농업 마을이었다. 논과 밭을 합치면 전체 국유지의 96.7%에 이르러, 이 땅이 얼마나 철저하게 경작지 위주로 이용됐는지를 숫자가 그대로 증언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성내동은 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담장 안쪽 마을이라는, 시리즈 내에서 보기 드문 입지적 특성을 지닌다. 국유지 96% 이상이 논밭으로 구성된 전형적 농경형 국유지 표본으로 기록해 둔다.
71912년 성내동은 서울이 아니었다 — 경기도 광주군의 기록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1912년 당시 성내동은 지금처럼 서울에 속한 땅이 아니었다. 성안말, 곰말, 안말, 벌말 등 자연마을들이 1914년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로 병합됐고, 이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건 그로부터 무려 49년이 지난 1963년의 일이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살펴본 32필지, 105,438㎡의 국유지 기록은 엄밀히 말하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던 자료다. 지금의 행정구역만 보고 이 기록을 서울시 소유로 단정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행정구역의 변천은 성내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12년 당시 지금의 강동구 일대는 대부분 경기도 광주군 소속이었고, 서울로 편입된 시점 역시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옛 지적 자료를 볼 때는 항상 그 시절의 행정구역 이름을 함께 확인해야, 자료의 출처와 맥락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문화유산 조사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어느 도의 어느 군, 어느 면에 속했던 땅인지에 따라 참고해야 할 관련 문헌과 지적 자료의 계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1912년 행정구역 안내1912년 당시 성내동 일대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였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편입 이후 성내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본 기록은 1912년 원자료의 행정구역 기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8풍납토성이 증명한다 — 문화유산 지표조사가 중요한 진짜 이유
성내동 국유지 기록이 특별한 이유는 단 하나, 이 마을이 풍납토성이라는 이름 자체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은 1997년 아파트 재건축 공사 도중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유구가 확인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곳이다. 평범한 주택가로만 여겨졌던 땅 아래에서, 2천 년 가까운 시간을 건너뛴 백제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이 사례가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논밭이나 주택지라 해도, 지표 아래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가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라는 네 단계 절차를 엄격히 규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성내동처럼 풍납토성과 지리적으로 맞닿은 지역에서 개발이나 재건축이 예정되어 있다면, 1912년 국유지 기록과 같은 근대 지적 자료는 지표조사 단계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문헌이 된다. 땅의 지목이 논이었는지 밭이었는지에 따라 지표 아래 보존 상태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고, 그 판단이 시굴조사와 표본조사의 범위와 순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이 절차를 건너뛰었다가 공사 도중 유구가 확인되면, 공정 전체가 멈추고 그 손실은 지표조사 비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실제로 풍납토성 일대에서는 재건축이나 신축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사전 조사가 필수 절차로 자리 잡았다. 공사가 이미 시작된 뒤 유구가 확인되면 그 순간부터 현장은 통째로 멈추고, 문화재청과 관련 기관의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약 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반면 착공 전 지표조사를 통해 미리 위험 구간을 파악한 현장은, 필요한 구간만 표본조사나 시굴조사로 좁혀 진행하면서 전체 공사 기간을 훨씬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성내동의 이 국유지 기록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은 그저 옛 통계처럼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이 지역에서 개발이나 정비 사업이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펼쳐볼 자료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순간, 오늘 정리한 필지 수와 지목, 면적 하나하나가 실제 조사의 실마리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9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32필지, 105,438㎡였습니다.
Q.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11필지, 27,180㎡로 전체의 약 25.8%였습니다.
Q.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17필지, 74,803㎡로 전체의 약 70.9%를 차지해 가장 넓은 지목이었습니다.
Q. 대지와 임야는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2필지 991㎡, 임야도 2필지 2,462㎡였습니다.
Q. 1912년 당시 성내동은 서울이었나요?
A. 아니요. 1912년 당시 성내동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였으며, 1963년에야 서울특별시로 편입됐습니다.
10한 줄 결론
1912년 성내동 국유지는 총 32필지 105,438㎡, 밭 17필지 74,803㎡와 논 11필지 27,180㎡를 중심으로 대지와 임야가 함께 어우러진 땅이었다. 풍납토성 담장 안쪽, 백제의 시간을 품은 이 마을의 국유지 기록은 오늘, 지표조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그 땅을 말하게 한다.
데이터 검증 노트
밭 74,803㎡ + 논 27,180㎡ + 대지 991㎡ + 임야 2,462㎡ = 105,436㎡로, 제시된 전체 면적 105,438㎡와 2㎡ 차이가 확인된다. 이는 1912년 원자료가 평(坪) 단위로 기록된 뒤 ㎡로 환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상적인 반올림 오차로 판단되며, 원문의 숫자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병기한다.
서울 곳곳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을 하나씩 되짚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동네의 잊힌 숫자를 꺼내 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토지조사부 기반)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동구 성내동(1912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문화유산 기초조사 참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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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담장 안, 논 한 배미와 밭 한 뙈기. 그 위로 백 년이 넘는 계절이 지나갔다. 성안말 사람들은 알았을까, 자신들이 딛고 선 땅이 왕성의 안쪽이었음을. 논 열한 필지, 밭 열일곱 필지. 숫자로 남았지만, 그 안엔 하루하루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내동은 그 자리에 있고, 풍납의 흙은 여전히 말이 없다. 다만 우리가, 그 침묵을 다시 읽어낼 뿐이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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