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남산 북쪽 기슭, 집터 한 자리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중구 편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남산 북쪽 기슭, 집터 한 자리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필지국유지 전체
1,586㎡총면적 · 약 480평
100%지목 대지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에는 국유지가 1필지, 1,586㎡ 있었습니다.
이 1필지의 지목은 대지였으며, 논·밭·임야 등 다른 지목의 국유지는 없었습니다.
즉, 남산동1가 국유지는 대지 1필지 1,586㎡가 전부였고, 면적으로 약 480평 규모였습니다.
명동 한복판, 남산으로 오르는 비탈길 아래에 백 년 넘게 주인이 ‘나라’였던 땅이 딱 한 자리 있었습니다.
단 한 필지입니다.
그런데 이 한 필지가 조금 이상합니다. 논도 밭도 아니고, 산자락의 임야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던 땅, 대지였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퇴근길에 스쳐 지나간 명동 골목 어딘가. 그 아래에 1912년의 집터가 그대로 겹쳐 있다면 어떨까요.
재개발 공사장 가림막 너머에서 조선시대 건물지가 튀어나와 공사가 멈췄다는 뉴스,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그 뉴스의 첫 장면은 사실 굴착기가 아니라, 이런 오래된 종이 한 장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은 남산동1가의 그 한 필지를 따라가 봅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도심의 작은 숫자 하나가 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는지 분명히 보이실 겁니다.

목차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남산동1가는 어떤 동네였을까?
숫자로 보는 남산동1가 국유지 현황
왜 하필 ‘대지’였을까? 집터 한 자리가 말해주는 것
1,586㎡, 약 480평은 어느 정도 크기일까?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도심 발굴조사, 종이 한 장이 바꾼 성공 사례
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에 있던 국유지는 1필지, 면적은 1,586㎡였습니다. 그리고 이 1필지의 지목은 대지였습니다.
국유지 목록을 펼쳤는데 줄이 딱 하나. 처음 이 자료를 봤을 때 솔직히 ‘이게 전부야?’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리즈를 계속 써오면서 알게 된 게 있습니다. 필지 수가 적은 동네일수록 오히려 이야기가 선명해진다는 점입니다.
서른 필지, 쉰 필지가 뒤섞인 동네는 평균을 내야 겨우 성격이 보입니다. 반면 한 필지뿐인 동네는 그 한 줄이 곧 동네의 얼굴이 됩니다.
남산동1가의 얼굴은 ‘집터’였습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누군가 일하던 자리. 이 사실 하나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뼈대입니다.
한 줄 요약: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는 대지 1필지, 1,586㎡가 전부였습니다.
2.남산동1가는 어떤 동네였을까?
남산동은 이름 그대로 남산 아래 동네입니다.
지금은 행정상 명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1가부터 3가까지 나뉘어 있습니다. 명동의 번화가에서 남산 쪽으로 몇 걸음만 올라가면 길이 슬쩍 기울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 비탈이 남산동의 무대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의 남산 북쪽 기슭은 흔히 ‘남산골’이라 불렸습니다.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벼슬 없이 가난하게 책만 읽던 선비들이 이 일대에 모여 살았다는 데서 나온 표현입니다.
화려한 궁궐 가까운 북촌과 달리, 남산 아래는 소박한 살림집이 비탈을 따라 촘촘히 들어선 곳이었습니다. 좁은 골목, 낮은 담장, 마당 한 켠의 장독대. 그런 풍경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이 동네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개항 이후 남산 북쪽 기슭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인근에 일제의 통감부와 관련 시설이 들어서면서 남산 아래는 식민 권력의 중심 공간으로 빠르게 재편됩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이 일대가 일본식 지명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이후 지금의 남산동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됩니다.
1912년은 바로 그 한가운데였습니다. 조선의 선비 마을이 식민 도시의 한 구획으로 바뀌어 가던 시점. 토지조사사업은 그 변화의 순간을 필지 단위로 얼려 둔 기록입니다.
남산동1가의 국유지 1필지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한 줄은 격변기 한복판의 도심 집터를 가리키는 좌표이기 때문입니다.

3.숫자로 보는 남산동1가 국유지 현황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숫자를 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AI든 사람이든 표로 보면 한눈에 들어옵니다.
구분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전체 국유지 | 1필지 | 1,586 | 100% |
대지 | 1필지 | 1,586 | 100% |
논 | 0 | – | 0% |
밭 | 0 | – | 0% |
임야 | 0 | – | 0% |
대지
1,586㎡
논
0㎡
밭
0㎡
임야
0㎡
이미지·표 설명: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 현황. 전체 1필지 1,586㎡이며, 지목은 대지 1필지 1,586㎡(100%)로 구성되어 있다. 1,586㎡는 약 479.8평에 해당한다.
표를 보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필지 수로도 100%, 면적으로도 100%가 대지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는 1필지 1,586㎡였으며 그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4.왜 하필 ‘대지’였을까? 집터 한 자리가 말해주는 것
시리즈에서 서울 외곽의 동네를 다룰 때, 국유지는 대개 논이나 밭, 혹은 산자락의 임야였습니다. 나라 땅이라고 하면 보통 넓은 들이나 산을 떠올리게 되죠.
그런데 남산동1가의 유일한 국유지는 대지였습니다.
여기에는 도심 동네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1912년의 남산동1가는 이미 농사짓는 땅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집과 건물이 빼곡한 성안 마을이었습니다. 논밭이 들어설 틈이 없으니, 나라 땅이 있다면 그것도 자연스럽게 ‘사람이 쓰는 땅’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국유 대지는 대체로 어떤 땅이었을까
토지조사사업 당시 국유지로 분류된 대지는 여러 경로로 생겨났습니다. 조선 왕실이나 관청이 쓰던 부지가 국유로 넘어간 경우도 있었고, 소유가 불분명한 땅이 국유로 편입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산동1가의 이 1필지가 정확히 어떤 건물이 있던 자리였는지는 이번 자료만으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대지라는 지목은 그곳에 사람의 생활 흔적이 켜켜이 쌓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신호라는 점입니다.
담장의 기초, 아궁이와 구들, 버려진 기와와 그릇 조각. 도심의 옛 집터에서는 이런 것들이 땅속 몇 십 센티미터에서 몇 미터 아래에 층을 이루며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이 물길을, 임야가 무덤과 산지 유적을 암시한다면, 대지는 ‘사람이 머문 시간’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5.1,586㎡, 약 480평은 어느 정도 크기일까?
1,586㎡라고 하면 감이 잘 오지 않으실 겁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480평입니다.
조금 더 생활 감각으로 바꿔 볼까요.
농구 코트 한 면이 대략 420㎡ 정도니까, 농구 코트 서너 면을 붙여 놓은 넓이입니다. 요즘 도심의 중형 빌딩 한 채가 들어서는 부지와 비슷하거나 조금 넓은 수준이죠.
조선 후기 한양의 평범한 살림집 한 채가 수십 평 규모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480평은 결코 작은 집터가 아닙니다.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혹은 넉넉한 마당을 품은 규모 있는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동 일대의 지금 땅값을 떠올리면 더 실감이 나실 겁니다. 이 정도 면적이 한 필지로 묶여 나라 소유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건, 그 자체로 이 땅이 평범한 민가 한 채와는 다른 사연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깁니다.
1,586㎡는 약 480평, 농구 코트 서너 면에 해당하는 도심 집터 한 자리입니다.
6.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
이제 이 시리즈의 진짜 목적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땅을 크게 파야 하는 공사가 있으면, 문화유산이 묻혀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1.31. 개정)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가 그 절차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 절차는 대체로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① 문화재 지표조사
땅을 파기 전에 문헌, 옛 지도, 토지대장, 현장 지표면을 종합적으로 살펴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판단하는 단계입니다. 오늘 살펴본 1912년 국유지 기록은 바로 이 단계에서 쓰이는 기초 자료입니다.
② 표본조사
조사 대상 범위 중 일부를 표본으로 골라 제한적으로 확인하는 조사입니다. 지표조사 결과 유적 가능성이 애매할 때 효율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활용됩니다.
③ 시굴조사
트렌치라 불리는 좁고 긴 구덩이를 일정 간격으로 파 보며, 실제로 유구나 유물이 있는지, 있다면 어느 깊이에 어떤 범위로 분포하는지를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④ 발굴조사
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의 조사원들이 한 층 한 층 흙을 걷어내며 과거를 복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대지는 네 단계 내내 유의해서 봐야 하는 지목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오래 산 땅은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위에 근대 건물 기초가, 그 위에 현대 건물이 겹겹이 쌓입니다. 도심 대지를 조사할 때 시굴조사 트렌치의 깊이와 위치를 신중하게 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산동1가 국유지가 대지 1필지였다는 한 줄은, 지표조사 담당자에게 “이 구역은 생활유적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는 조용한 메모가 됩니다.

7.도심 발굴조사, 종이 한 장이 바꾼 성공 사례
“옛날 토지 기록이 정말 현장에서 쓸모가 있나요?”
이 질문에 가장 좋은 답은 서울 도심에서 실제로 이어져 온 발굴조사들입니다.
종로와 청진동 일대의 재개발 과정에서는 조선시대 시전 행랑과 건물지가 층층이 확인되며 한양 도시 생활사 연구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공평동 일대 재개발 부지에서는 조선시대 골목과 집터가 넓게 드러나, 건물을 지으면서도 유구를 보존·전시하는 방식으로 개발과 보존이 함께 가는 사례를 남겼습니다.
이런 조사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삽 이전에 옛 지적 자료와 문헌을 꼼꼼히 검토해, 어느 구역이 과거 대지였고 어디에 건물이 있었는지를 먼저 추려냈다는 점입니다.
그 덕분에 시굴조사 트렌치를 헛되이 파는 일을 줄이고, 유적이 있을 법한 지점에 조사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공사 일정이 무작정 멈추는 대신,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조사가 진행된 겁니다.
개발하는 쪽도, 문화유산을 지키는 쪽도 손해 보지 않는 결과. 그 출발점은 늘 이런 종이 한 장이었습니다.
남산동1가의 대지 1필지 기록도 언젠가 누군가의 지표조사 보고서 첫 페이지에 인용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이 한 줄은 백 년을 건너 현장의 판단을 돕는 도구가 됩니다.

8.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검증 노트
제공된 원자료는 “1912년 서울시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 1필지 1,586㎡”, 그리고 “국유지 중 대지 1필지 1,586㎡”의 두 항목입니다.
대지 필지 수(1필지)와 면적(1,586㎡)이 국유지 전체 합계와 정확히 일치하므로, 합계 불일치나 반올림 오차는 없습니다.
평 환산값(1,586 ÷ 3.3058 ≈ 479.8평)은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값이며, 원자료 수치는 ㎡ 기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논·밭·임야 등 다른 지목은 원자료에 등장하지 않으며, 임의로 추정해 채우지 않았습니다. 해당 필지의 과거 건물 용도는 이번 자료로 확인되지 않아 본문에서도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남산동1가는 국유지 전체가 단 1필지, 그리고 그 1필지가 대지로만 구성된 ‘단일 필지·단일 지목’ 동네입니다.
외곽 동네의 국유지가 논·밭·임야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성안 도심 동네는 국유지마저 집터였다는 점에서 서울 도심과 외곽의 토지 성격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기록해 둡니다.
9.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A. 총 1필지였습니다.
Q.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A. 총 1,586㎡로, 약 480평입니다.
Q.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A. 대지는 1필지 1,586㎡였으며, 국유지 전체와 같습니다.
Q. 남산동1가 국유지에 논이나 밭, 임야는 있었나요?A. 원자료 기준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국유지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Q.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A. 대지는 생활유적이 층층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목이어서, 지표조사 단계에서 시굴조사·표본조사 범위를 정하는 근거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10.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는 총 1필지 1,586㎡였으며, 그 전부가 대지로 이루어진 남산 아래 도심 집터의 기록입니다.

여기까지 함께 걸어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명동에서 커피를 사고,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비탈길을 오르는 그 평범한 순간에도, 발밑 어딘가에는 1912년의 집터 한 자리가 조용히 누워 있습니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고, 누군가는 마당에서 아이를 불렀을 겁니다. 시대가 바뀌고 주인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는 동안에도, 땅은 그 모든 시간을 차곡차곡 품어 왔습니다.
1필지, 1,586㎡. 숫자는 작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잊힐 뻔한 한 줄을 다시 꺼내 읽고, 그 아래 살았던 사람들을 한 번 더 떠올리는 일. 오늘 이 글이 그 작은 시작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우리 동네 땅의 1912년, 궁금하신가요?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계속 정리하고 있습니다.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중구 남산동1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1가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남산동역사#남산동1가#중구역사#명동역사#남산골#1912년토지조사#토지조사사업#국유지#문화재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문화재발굴#매장유산#문화유산발굴조사#서울문화유산#도심발굴#seoulheritage
남산동 1가의 테마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1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 1필지 1,586㎡ 정리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 현황: 대지 1필지, 1,586㎡(약 480평)
남산동 역사, 명동 비탈길 아래 나라 땅 한 자리는 왜 집터였을까?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읽는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 기록
1912년 남산동1가 국유지가 전부 대지였던 이유와 발굴조사의 의미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었다남산이 내려다보던 비탈 아래나라의 이름으로 적힌 땅은누군가의 집터 한 자리였다
천오백팔십육 제곱미터아궁이의 온기와 마당의 부름이백 년의 흙 아래 겹겹이 누워다시 읽힐 날을 기다린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