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신공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큰더기 마을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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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큰더기 마을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8필지밭 5필지분묘지 1필지대지 2필지
본래 하나였던 공덕리에서 사람들이 새로 마을을 이루자,이 자리는 '새로운 공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신공덕동의 국유지는 총 8필지, 11,533㎡였습니다. 밭이 5필지 5,153㎡로 가장 많았고, 분묘지가 1필지 5,586㎡로 면적이 가장 넓었으며, 대지도 2필지 793㎡ 확인됩니다.
신공덕동(新孔德洞)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새로운 공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리즈가 앞서 다룬 공덕동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로,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했던 신창내계와 공덕리계의 흥례동, 신동이라는 자연부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공덕동의 유래가 우리말 '큰더기(높은 언덕)'에서 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공덕동 역시 그 산자락의 연장선에 자리한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의 행정구역 변천사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1911년 경성부 관할이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신공덕리가 되었고, 1936년 경성부 신공덕정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런데 1943년, 이 마을은 잠시 서대문구에 속했다가, 바로 이듬해인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고, 1946년 지금의 신공덕동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짧은 서대문구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근대 행정구역 개편 속에서 여러 차례 소속을 옮겨 다녔음을 잘 보여줍니다.
1912년의 이 마을 국유지 장부에서, 밭이 5필지로 국유지 전체의 62.5%를 차지하며 가장 많은 지목으로 확인됩니다. 8장의, 큰더기 마을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이 자리의 기록을 지금부터 넘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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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국유지 밭 5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분묘지와 대지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데이터 검증 노트
지목별 현황 표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신공덕동의 국유지는 총 8필지, 11,533㎡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3,489평입니다.
이 마을은 지금은 마포구에 속해 있지만,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잠시 서대문구 관할이었던 시기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마포구의 공덕동, 마포동을 국유지 편으로 다루었습니다. 신공덕동은 공덕동에서 갈라져 나온 이웃 마을로, 지금은 공덕오거리를 중심으로 신공덕 삼성래미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주거지역으로 크게 변모했습니다.
2. 국유지 밭 5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에는 밭이 5필지, 5,153㎡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62.5%로 가장 많은 지목입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1,030.6㎡, 약 312평입니다. 공덕동과 이어지는 이 언덕 자락에, 국가 소유의 작은 밭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국유지 분묘지와 대지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에는 분묘지가 1필지 5,586㎡, 대지가 2필지 793㎡ 있었습니다.
분묘지는 단 1필지였지만 5,586㎡, 약 1,690평이라는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국유지 전체 면적의 48.4%에 달합니다. 이는 이 마을 인근에 국가가 관리하던 큰 규모의 묘역이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대지 2필지, 평균 396.5㎡는 소규모 집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4.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 검증: 대지 2 + 분묘지 1 + 밭 5 = 8필지로, 전체 합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검증: 793 + 5,586 + 5,153 = 11,532㎡로, 전체 면적 11,533㎡와 1㎡의 극히 근소한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평(坪) 단위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상적인 반올림 오차로 판단됩니다.
5. 지목별 현황 표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밭 | 5필지 | 5,153㎡ | 62.5% | 44.7% |
분묘지 | 1필지 | 5,586㎡ | 12.5% | 48.4% |
대지 | 2필지 | 793㎡ | 25.0% | 6.9% |
전체 | 8필지 | 11,533㎡ | 100% | 100% |
표 설명: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으로, 밭이 필지 수, 분묘지가 면적에서 각각 최대 비중을 차지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
신공덕동은 공덕동에서 갈라져 나온 실제 행정구역 사례이자, 1943~1944년 잠시 서대문구에 속했던 흥미로운 행정 변천사를 지닌 사례로 기록됩니다.
6.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신공덕동의 기록은 조사 전략에 각별한 신호를 보냅니다. 첫째, 공덕리계의 흥례동, 신동이라는 자연부락의 정확한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이 지역 근대 이전 촌락사 연구에 흥미로운 자료가 됩니다. 둘째, 국유지 분묘지 1필지가 정확히 어떤 문중 또는 국가 관련 묘역이었는지를 규명하는 일도 이 지역 매장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셋째, 1943~1944년 서대문구 소속이었던 짧은 기간의 행정 기록을 대조하는 일도 근대 서울 행정구역 변천사 연구에 의미가 있습니다.
큰더기 마을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이 자리의 오랜 기억은,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빼곡한 주거지 속에서도 신공덕동이라는 이름 안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발견된 백제 왕성
1997년, 서울 풍납동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초기의 토기와 유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후 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었고, 한국 고대사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8필지, 11,533㎡(약 3,489평)였습니다.
Q. 신공덕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새로운 공덕'이라는 뜻으로, 공덕동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입니다. 공덕리계의 흥례동, 신동이라는 자연부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Q. 신공덕동은 서대문구였던 적이 있나요?
A. 네. 1943년 잠시 서대문구 관할이었다가,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고, 1946년 지금의 신공덕동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Q. 지금의 신공덕동은 어떤 곳인가요?
A. 공덕오거리를 중심으로 신공덕 삼성래미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마포구의 주거지역입니다.
9.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는 총 8필지 11,533㎡로, 밭이 필지 수의 대부분을, 분묘지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큰더기 마을 공덕동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그 기억과 짧은 서대문구 시절의 행정 변천사를 함께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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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신공덕동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신공덕동 국유지(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소재. 1943~1944년 서대문구 관할 시기 있었음)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대지·분묘지·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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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본래 하나였던 공덕리에서 사람들이 새로 마을을 이루자,
이 자리는 '새로운 공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섯 뙈기의 밭과 한 곳의 너른 묘역, 두 채의 집터가
이 작은 국유지 안에 조용히 자리했다.
경성부에서 고양군으로,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이 마을은 여러 번 소속을 옮겨 다녔다.
큰더기 마을의 곁가지였던 이 자리는, 결국 자신만의 이름을 얻어냈다.
이제 그 언덕 자락에는 아파트 단지가 새로운 삶을 채우고 있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신공덕동 국유지의 여덟 필지에 다시 그 갈라져 나온 마을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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