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빗살무늬토기 마을 위에 반반씩 나뉜 논과 밭, 15필지의 기록 암사동 역사 ·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동구 편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빗살무늬토기 마을 위에 반반씩 나뉜 논과 밭, 15필지의 기록
암사동 역사 ·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5국유지 필지 수
45,560㎡국유지 총면적
49.5 : 50.5논과 밭의 면적 비율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는 국유지 15필지, 총 45,560㎡가 있었습니다.
이 중 논은 7필지 22,558㎡, 밭은 8필지 23,001㎡였습니다.
즉, 암사동 국유지는 논과 밭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으며, 두 지목의 면적이 거의 정확히 반반(49.5% 대 50.5%)으로 나뉘어 밭이 논보다 443㎡ 더 넓었습니다.
당신이 주말에 산책하는 그 한강변,6천 년 전에도 누군가의 집 앞마당이었습니다.
한 번쯤 들어 봤을 겁니다.
초등학교 사회책, 중학교 역사책 맨 앞장에 나오는 이름.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서울 암사동.
그런데 그 교과서 속 마을이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유적이 세상에 드러나기 겨우 13년 전.
그때 암사동 땅 위에는 나라 소유의 논과 밭이 15필지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몰랐습니다.
자기가 모내기하고 김매던 흙 몇 자 아래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움집이 잠들어 있다는 걸요.
오늘은 그 “몰랐던 시간”의 기록을 펼쳐 보려 합니다.
숫자 몇 개로 시작하지만, 끝에 가면 조금 뭉클해질지도 모릅니다.
목차
11912년 암사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암사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3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4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5논과 밭, 왜 이렇게 정확히 반반일까요?
6논밭 비교 표로 한눈에 보기
7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땅이 입을 열다
8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9암사동 땅이 보여 준 발굴조사 성공 사례
10자주 묻는 질문
11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11912년 암사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먼저 숫자부터 또렷하게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던 국유지는 모두 15필지입니다.
면적을 합치면 45,560㎡예요.
평으로 바꾸면 약 13,782평입니다.
감이 안 온다면 축구장을 떠올려 보세요.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가 약 7,140㎡이니, 암사동 국유지는 축구장 6개를 조금 넘는 넓이였습니다.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은 약 3,037㎡.
요즘 아파트 단지 놀이터 몇 개를 합친 크기의 논밭 조각들이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그때 암사동은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12년의 암사동은 서울 땅이 아니었어요.
행정구역상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로 정리되었고, 서울로 들어온 건 1963년의 일입니다.
처음엔 성동구, 그다음엔 강남구를 거쳐 1979년에야 지금의 강동구 암사동이 되었죠.
그러니 이 글의 숫자는 “서울이 되기 전 암사동”의 얼굴을 기록한 숫자입니다.
지목은 딱 두 가지뿐
암사동 국유지 15필지에는 대지도, 임야도, 분묘지도 없었습니다.
오직 논과 밭, 두 가지 지목만 있었어요.
다른 동네 국유지에서 흔히 보이는 집터나 산자락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농경지였다는 뜻입니다.
한강이 실어 온 기름진 흙 위에서 오직 곡식만 키우던 땅.
그게 1912년 암사동 국유지의 정체였습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암사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대) 국유지는 총 15필지 45,560㎡였으며, 논과 밭 두 지목으로만 구성된 농경지였습니다.
2암사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바위 절, 그리고 아홉 개의 절터
암사(岩寺)라는 이름을 풀면 ‘바위 절’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일대 한강변 바위 언덕에 옛 절들이 자리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 무렵 절터 아홉 곳이 있어 ‘구암사’라 불렸고, 사람들은 그냥 ‘바위절’이라 불렀다는 설이 대표적이에요.
조선 초의 문장가 서거정도 이 강가 벼랑 위 절을 두고 시를 남겼다고 전합니다.
강물이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풍경, 그 위에 걸린 듯한 절.
상상만 해도 한 폭의 산수화죠.
배가 쉬어 가던 부자 마을
조선 후기의 암사리는 꽤 활기찬 마을이었습니다.
지금 선사유적지가 있는 강변은 한강 뱃길을 오가던 배들이 잠시 쉬거나 하룻밤 묵어 가던 곳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마을은 구천면 안에서 가장 큰 마을로 꼽혔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도 많았지만, 직접 배를 부리거나 뱃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돈이 빨리 돌았고, 이웃 마을보다 살림이 넉넉했다고 전해져요.
강이 길이었고, 강이 밥이었던 마을.
이 흐름을 기억해 두세요.
뒤에서 논과 밭의 숫자를 읽을 때 다시 꺼내 쓸 겁니다.

3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 7필지, 22,558㎡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7필지, 22,558㎡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49.5%를 차지합니다.
평으로는 약 6,824평이에요.
필지 수로 보면 15필지 중 7필지, 46.7%입니다.
논 한 필지가 조금 더 컸다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3,223㎡입니다.
밭 한 필지 평균보다 약 348㎡ 더 넓어요.
필지 수는 밭보다 하나 적은데, 한 덩어리는 더 컸던 거죠.
왜일까요?
논은 물을 가둬야 하는 땅입니다.
그래서 평평하고 물 대기 좋은 낮은 곳에, 반듯하게 크게 구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암사동이라면 답은 한강입니다.
강이 넘칠 때마다 쌓인 고운 흙, 물이 쉽게 닿는 강변 저지대.
국유 논 7필지는 아마 그런 강가 들판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강변 모래언덕이, 훗날 신석기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 자리이기도 합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논은 7필지 22,558㎡로, 전체 면적의 49.5%였고 필지당 평균 약 3,223㎡였습니다.
4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 8필지, 23,001㎡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 가운데 밭은 8필지, 23,001㎡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50.5%입니다.
평으로는 약 6,958평이에요.
필지 수로는 15필지 중 8필지, 53.3%로 논보다 한 필지 많습니다.
근소하지만 분명한 1위
면적으로도, 필지 수로도 밭이 아주 조금 앞섭니다.
밭이 논보다 넓은 면적은 딱 443㎡.
원룸 스무 채쯤 되는 넓이 차이입니다.
전체 45,560㎡에 비하면 1%도 안 되는 차이예요.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2,875㎡로 논보다 조금 작습니다.
밭은 물을 대지 않아도 되니 조금 높은 둔덕이나 마을 가까운 비탈에도 들어설 수 있죠.
암사동은 강변 저지대 뒤로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 지형입니다.
강 쪽으로는 논이, 언덕 쪽으로는 밭이.
물의 높이를 따라 논밭이 층층이 나뉘던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밭은 8필지 23,001㎡로, 전체 면적의 50.5%였으며 논보다 443㎡ 더 넓었습니다.

5논과 밭, 왜 이렇게 정확히 반반일까요?
시리즈에서도 보기 드문 균형
이번 암사동 데이터를 정리하다 잠깐 손이 멈췄습니다.
49.5 대 50.5.
논과 밭이 거의 자로 잰 듯 반씩 나뉘어 있었거든요.
필지 수도 7 대 8로 하나 차이입니다.
서울 여러 동의 1912년 국유지를 살펴보면, 대개는 논이든 밭이든 한쪽으로 확 기울어 있습니다.
물 많은 저지대 동네는 논이, 구릉이 많은 동네는 밭이 압도하죠.
암사동처럼 저울이 거의 수평을 이루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강과 언덕 사이에 낀 땅
이 균형은 지형으로 읽힙니다.
암사동은 한강 범람원과 낮은 구릉이 맞닿은 경계에 있는 동네입니다.
물이 닿는 강변은 논이 되고, 물이 닿지 않는 언덕은 밭이 됩니다.
두 지형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으니, 논밭도 비슷하게 나뉜 겁니다.
재밌는 건 신석기 사람들도 똑같은 이유로 이곳을 골랐다는 점이에요.
강에서 가까워 물고기를 잡기 좋고, 그러면서도 살짝 높아 물이 잘 빠지는 땅.
수천 년이 흘러도,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의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별 필지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옛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한 필지씩 맞춰 봐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계는 방향을 알려 주고, 확인은 기록 대조와 현장이 합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암사동 국유지는 논 49.5%, 밭 50.5%로 거의 정확한 반반 구조였으며, 이는 한강 범람원과 구릉이 맞닿은 지형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6논밭 비교 표로 한눈에 보기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숫자를 한 장에 모았습니다.
필지 수, 면적, 비율, 평균 면적을 나란히 놓으면 암사동 땅의 성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평, 약) | 면적 비율 | 필지 비율 | 필지당 평균(㎡) |
논 | 7 | 22,558 | 6,824 | 49.5% | 46.7% | 3,223 |
밭 | 8 | 23,001 | 6,958 | 50.5% | 53.3% | 2,875 |
합계 | 15 | 45,560 | 13,782 | 100% | 100% | 3,037 |
표 설명: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대) 국유지 15필지 45,560㎡의 지목별 현황. 면적 비율은 총면적 45,560㎡ 기준,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이며 소수점 이하는 반올림했다. 논과 밭 면적의 합은 45,559㎡로 총면적과 1㎡ 차이가 있다(검증 노트 참고).
면적으로 본 논과 밭의 저울
논 49.5%
밭 50.5%
논 7필지 · 22,558㎡점선 = 정확히 절반밭 8필지 · 23,001㎡
필지당 평균 면적
논
3,223㎡
밭
2,875㎡
그래프 설명: 면적 비율은 밭이 아주 근소하게 앞서지만, 한 필지의 크기는 논이 약 12% 더 크다. 논은 조금 크게, 밭은 조금 잘게 나뉘어 있었다.
표에서 읽히는 세 가지
첫째, 암사동 국유지는 100% 농경지였습니다.
대지, 임야, 분묘지 같은 다른 지목은 단 한 필지도 없었어요.
둘째, 논과 밭은 거의 완벽한 반반이었습니다.
면적 차이는 443㎡, 비율로 1%포인트 남짓입니다.
셋째, 면적은 밭이 앞서지만 한 덩어리의 크기는 논이 더 컸습니다.
강변의 넓고 평평한 논, 언덕의 잘게 나뉜 밭이라는 그림과 잘 들어맞는 숫자예요.
7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땅이 입을 열다
13년 뒤, 한강이 흙을 걷어 냈다
1912년 토지조사가 끝나고 13년이 지난 1925년 여름.
한강 유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집니다.
우리가 ‘을축년 대홍수’라고 부르는 그 물난리예요.
강물이 암사리 강변을 휩쓸고 지나가자, 모래언덕이 깎여 나가며 땅속에 묻혀 있던 토기 조각들이 무더기로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암사동 유적은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밉니다.
생각해 보면 소름 돋는 장면입니다.
1912년, 조사원들은 이 땅을 논 몇 필지, 밭 몇 필지로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 어디에도 “이 아래 6천 년 전 마을 있음”이라는 줄은 없었어요.
땅의 겉모습만 적혀 있었을 뿐, 땅의 기억은 아직 잠들어 있었습니다.
교과서 속 유적이 되기까지
그 뒤 본격적인 조사는 한참 뒤에야 이어집니다.
1960년대 중반 대학 조사단이 처음 발굴에 나섰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대규모 발굴을 진행했어요.
그 결과 이곳이 신석기시대 큰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둥근 움집 자리, 뾰족한 바닥의 빗살무늬토기, 곡식을 갈던 갈돌과 갈판, 그물에 달던 돌추까지.
1979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여러 차례 발굴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 집자리는 40기 안팎에 이릅니다.
게다가 신석기 문화층 위에서는 초기 백제 무렵의 집자리도 겹쳐 나왔어요.
한 자리에 수천 년의 생활이 켜켜이 쌓여 있었던 겁니다.
한 줄 정리1912년 논밭으로만 기록된 암사동 땅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신석기시대 유적이 드러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사 마을 유적이 되었습니다.

8이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삽을 뜨기 전에, 먼저 읽는다
서울에서 새 건물이나 도로, 관로 공사를 하려면 땅 밑부터 확인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매장유산 조사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나아갑니다.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피는 단계예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바로 이 지표조사에서 쓰이는 핵심 기초자료입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의심 가는 지점 몇 곳을 작게 파서 유구나 유물이 나오는지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트렌치라 부르는 긴 도랑을 넣어 유적의 범위와 깊이, 성격을 가늠하죠.
마지막이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넓게 열어 전면 조사하고 기록하는 본 조사입니다.
암사동 데이터가 주는 조사 신호
암사동의 1912년 국유지 통계는 조사자에게 꽤 구체적인 힌트를 줍니다.
강변 저지대의 국유 논 7필지는 한강이 쌓은 퇴적층 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암사동 유적 자체가 강변 모래층 아래에서 나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논 아래는 깊은 층까지 살펴야 할 구역이 됩니다.
언덕 쪽 국유 밭 8필지는 물이 잘 빠지는 높은 땅입니다.
사람이 오래 머물기 좋은 조건이라 생활 유구나 저장 구덩이를 확인할 단서가 될 수 있어요.
옛 지목을 오늘의 지번 위에 겹쳐 두면, 어디를 먼저 보고 어디를 더 깊이 봐야 할지가 보입니다.
공사 일정도, 비용도, 그리고 땅속 유산도 함께 지키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죠.
한 줄 정리1912년 암사동 국유지의 논·밭 분포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강변 퇴적층과 구릉지의 유적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초자료로 쓰입니다.

9암사동 땅이 보여 준 발굴조사 성공 사례
시설 정비 전 시굴조사, 그리고 첫 발견
암사동에는 “먼저 조사한 덕분에” 얻은 결과가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2015년, 유적 공원의 시설을 정비하기에 앞서 시굴조사가 진행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석기시대와 삼국시대 문화층이 확인됩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정밀 발굴조사가 이어졌어요.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불자리를 가운데 둔 둥근 움집 안에서, 암사동 유적 역사상 처음으로 옥으로 만든 장신구가 나온 겁니다.
흑요석 같은 먼 곳의 돌감도 함께 확인됐어요.
수십 년 동안 조사해 온 유적에서도 아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순간이었습니다.
조사가 공사를 막지 않고, 공사를 살린다
이 사례의 핵심은 순서에 있습니다.
시설을 먼저 짓고 나서 유구가 튀어나왔다면 어땠을까요.
공사는 멈추고, 설계는 다시 짜야 하고, 비용과 시간은 몇 배로 불어났을 겁니다.
하지만 시굴조사로 문화층을 먼저 확인했기에 발굴 범위를 정확히 잡을 수 있었고, 유물은 안전하게 수습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형 조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1912년 토지 기록 한 장은 그 첫 단추를 더 정확하게 끼우게 해 줍니다.
어느 필지가 강변 논이었고, 어느 필지가 언덕 밭이었는지.
그 차이만 알아도 조사 계획의 해상도가 확 올라갑니다.
10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5필지, 면적은 45,560㎡였습니다.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대였습니다.
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7필지 22,558㎡로, 국유지 면적의 49.5%였습니다.
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8필지 23,001㎡로, 국유지 면적의 50.5%였습니다.
암사동 국유지에서 논과 밭의 면적 차이는 얼마인가요?
A. 밭이 논보다 443㎡ 더 넓었습니다. 비율로는 약 49.5% 대 50.5%로 거의 반반이었습니다.
1912년 암사동 국유지에 대지나 임야도 있었나요?
A. 없었습니다. 암사동 국유지 15필지는 논과 밭 두 지목으로만 이루어진 농경지였습니다.
암사동 유적은 언제 처음 알려졌나요?
A.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변 흙이 깎여 나가며 토기 조각이 드러나 처음 알려졌고, 197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A. 옛 지목(논, 밭)을 현재 지번과 대조해 강변 퇴적층과 구릉지의 유적 가능성을 가려내는 지표조사 기초자료로 쓰이며, 이후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계획을 세우는 근거가 됩니다.
검증 노트
필지 수를 더하면 논 7필지 + 밭 8필지 = 15필지로, 제시된 총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을 더하면 22,558㎡ + 23,001㎡ = 45,559㎡로, 제시된 총면적 45,560㎡와 1㎡ 차이가 납니다. 이는 평(坪) 단위 원자료를 ㎡로 환산하며 생기는 반올림 차이로 판단되며, 본문은 원자료의 총면적 45,560㎡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1912년 당시 암사동 일대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습니다. 본문의 ‘서울 강동구 암사동’은 현재 행정구역 기준 표기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암사동 국유지는 논 49.5%, 밭 50.5%로 두 지목의 면적 비율 차이가 약 1%포인트에 불과한, 시리즈에서 보기 드문 ‘반반 균형형’ 구조를 보였습니다.
또한 대지·임야·분묘지 없이 논과 밭 두 지목만으로 구성된 순수 농경지형 국유지이며, 국가 사적 서울 암사동 유적이 자리한 동이라는 점에서 강동구 편의 핵심 기록으로 남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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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한 줄 결론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는 총 15필지 45,560㎡였으며, 논 7필지(22,558㎡)와 밭 8필지(23,001㎡)가 거의 정확히 반반으로 나뉜 순수 농경지였습니다.
같은 땅, 세 개의 시간
암사동 강변에는 세 개의 시간이 겹쳐 있습니다.
6천 년 전, 불을 피우고 도토리를 굽던 신석기 가족의 시간.
1912년, 논둑에 물을 대고 언덕 밭에서 콩을 거두던 농부의 시간.
그리고 지금, 이어폰을 꽂고 한강을 따라 달리는 우리의 시간.
1912년의 조사원들은 이 땅을 15필지로 적었습니다.
그들은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그들이 남긴 숫자 덕분에, 우리는 이제 그 땅을 조금 더 잘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록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한 세대가 모르고 적은 것을, 다음 세대가 알고 다시 읽는 방식으로요.
우리가 1912년의 논밭을 다시 꺼내는 이유도 같습니다.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삽을 뜨기 전에 한 번 더 조심스럽게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에 암사동 한강변을 걷게 된다면, 잠깐 발걸음을 늦춰 주세요.
당신이 밟고 선 그 흙은, 6천 년 동안 쉬지 않고 누군가의 집이었습니다.
우리 부지의 1912년은 어땠을까요?
개발 예정지의 옛 지목과 매장유산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까지의 기초자료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해 보세요.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912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일대)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가운데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강동구 암사동 테마
1912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과 밭 면적 정리
1912년 암사동 국유지 현황: 15필지 45,560㎡, 논 22,558㎡·밭 23,001㎡
암사동 역사, 빗살무늬토기 마을 위에 논밭이 반반? 1912년 국유지 15필지의 기록
1912년 암사동 국유지 중 논과 밭은 각각 얼마나 있었나요?
암사동 유적 13년 전, 1912년 토지조사로 본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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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해마다 흙을 싣고 와
논 일곱 필지에 조용히 부려 놓았다.
언덕의 밭 여덟 필지는
그 흙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콩을 키웠다.
반은 물의 땅, 반은 바람의 땅.
농부는 몰랐다,
쟁기 끝 몇 자 아래
뾰족한 토기가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우리가 숫자를 먼저 읽는 것은
그 온기를 깨우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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