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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은평구 신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새절이 남긴 이름, 그리고 집터가 빼곡했던 땅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3일 전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1일 전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편

1912년 서울 은평구 신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새절이 남긴 이름, 그리고 집터가 빼곡했던 땅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지금 이 골목 이름에는,이미 사라진 절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입니다. 서울 은평구 신사동이라는 이름 석 자 안에는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오래된 절 하나가 통째로 숨어 있습니다. 한자로 풀면 새로울 신, 절 사, 새로운 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912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땅을 필지 하나하나 조사하던 그 시절, 이 마을에는 국가 소유의 땅이 열다섯 필지, 면적으로는 12,062제곱미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그저 옛 통계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기록 하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유산 조사 현장에서 중요한 단서로 쓰이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실제로 문화재 발굴조사나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는 이런 옛 토지대장을 가장 먼저 펼쳐 봅니다. 땅의 성격과 지목, 그리고 소유 형태를 알아야 그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백 년 전 신사동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보려 합니다. 필지 수 하나, 면적 하나에도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과 지금 우리가 이 땅을 이해하는 방식이 함께 이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왜 이런 기초조사 자료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그리고 새절이라는 이름이 남긴 이 땅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실 거예요.

15필지

전체 국유지

12,062㎡

전체 면적

13필지

대지 · 86.7%

2필지

밭 · 13.3%


목차

01핵심 요약, 이 숫자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이유

021912년의 신사동, 새절이 있던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03국유지 15필지, 숫자로 먼저 만나보기

04대지 13필지 9,616㎡,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터전의 기록

05밭 2필지 2,446㎡, 집터 사이에 남아 있던 생활의 흔적

06대지 비율 86.7%가 말해주는 것

07새절의 흔적과 국유지, 두 기록이 만나는 지점

08이 숫자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

09기초자료 하나가 만든 변화, 실제 조사 성공 사례

10자주 묻는 질문

11한 줄로 정리하는 신사동 국유지 이야기


01

핵심 요약, 이 숫자에 먼저 주목해야 하는 이유

1912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는 국유지가 열다섯 필지 있었고, 그 넓이를 모두 합하면 12,062제곱미터에 달했습니다. 이 가운데 대지가 열세 필지, 9,616제곱미터로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밭은 두 필지, 2,446제곱미터로 나머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필지 수로 따지면 대지가 전체의 86.7퍼센트, 면적으로도 약 79.7퍼센트를 차지하는 셈입니다.

숫자만 나열하면 담백하게 느껴지지만, 대지가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줍니다. 대지는 사람이 실제로 집을 짓고 살아가는 땅입니다. 열다섯 필지 가운데 열세 필지가 집터였다는 건, 이 마을이 넓은 논밭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의 형태에 훨씬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새절, 즉 새로운 절에서 왔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리면 이 땅의 성격이 조금씩 더 또렷하게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02

1912년의 신사동, 새절이 있던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신사동을 떠올리면 아파트 단지와 큰길, 그리고 새절역을 오가는 사람들이 먼저 그려질 겁니다. 하지만 백 년 조금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신사동이라는 이름은 신사동 200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새절이라는 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터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겸재 정선이 그린 도성대지도에도 이미 신사동계라는 지명이 등장할 만큼 그 역사는 뿌리 깊습니다.

1912년 당시 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였습니다. 지금의 은평구라는 이름도 훗날 이 은평면에서 따온 것입니다. 1912년은 조선총독부가 근대적인 토지 소유 체계를 정리하기 위해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작한 해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토지대장과 지적 자료는 단순한 행정 기록을 넘어, 지금 우리가 그 시절 땅의 쓰임새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가 되었습니다. 신사동 역시 이 조사망 안에 들어 있었고, 그 결과 국가 소유로 분류된 열다섯 필지의 존재가 지금까지 문서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겁니다. 이후 이 마을은 1950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979년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국유지라고 해서 모두 관청 건물이나 특별한 시설이 있던 땅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대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던 지극히 평범한 집터였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뒤에서 살펴볼 숫자들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겁니다.


03

국유지 15필지, 숫자로 먼저 만나보기

말로 풀어놓은 이야기를 한번 표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숫자로 보면 신사동 국유지의 전체 그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전체 국유지

15필지

12,062㎡

대지

13필지

9,616㎡

2필지

2,446㎡

대지 · 면적 비중79.7%

밭 · 면적 비중20.3%

대지 9,616㎡밭 2,446㎡

이 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단연 대지의 비중입니다. 전체 필지의 여든여섯 퍼센트가 넘는 열세 곳이 대지로 분류되어 있었고, 면적으로 따져도 전체의 약 팔십 퍼센트를 대지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밭은 두 필지에 불과했지만 2,446제곱미터라는 면적은 결코 작지 않아, 한 필지당 평균 면적으로 보면 오히려 대지보다 넓었습니다.

검증 노트

대지와 밭의 필지 수를 더하면 13더하기 2는 15로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하고, 면적 역시 9,616더하기 2,446은 12,062로 전체 면적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반올림이나 단위 환산에서 흔히 생기는 오차조차 없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비교적 드문 사례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신사동 국유지는 대지 중심의 촌락형 마을이었고, 그 사이사이에 비교적 넓은 밭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04

대지 13필지 9,616㎡, 마을 사람들이 살았던 터전의 기록

대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 사람이 살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신사동에 열세 필지, 9,616제곱미터에 이르는 대지가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 안에 상당한 규모의 집터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앞서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여러 동네의 국유지 기록에서는 논과 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사동은 정반대입니다. 열다섯 필지 가운데 열세 필지, 필지 수로 여든여섯 퍼센트가 넘는 땅이 집터였다는 건 이 시리즈 안에서도 눈에 띄게 이례적인 비율입니다.



집터가 이렇게 촘촘히 모여 있었다는 건, 신사동이 넓은 농경지 한복판에 드문드문 집이 놓인 형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아가던 제법 짜임새 있는 마을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새절이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절이 있던 자리 주변에는 절을 오가는 사람들과 그 절에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작은 마을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사동의 유난히 높은 대지 비율도 어쩌면 그런 오랜 정착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문화유산 조사에서 옛 대지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오래 머문 자리는 곧 생활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05

밭 2필지 2,446㎡, 집터 사이에 남아 있던 생활의 흔적

신사동 국유지 가운데 나머지 몫을 차지한 건 밭이었습니다. 두 필지, 2,446제곱미터라는 숫자만 보면 대지에 비해 작아 보이지만,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으로 계산하면 오히려 대지보다 넓은 편입니다. 이는 이 밭이 집집마다 딸린 자그마한 텃밭이 아니라, 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비교적 규모 있는 경작지였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


이렇게 대지 사이사이에 밭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신사동이라는 마을의 생활 구조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집터가 모여 있는 마을 중심부 바로 곁에, 먹거리를 자급할 수 있는 밭이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공간 구조는 지금의 행정구역만 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입니다. 오직 이런 옛 지적 자료를 하나하나 들여다볼 때만 비로소 그 시절 마을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셈입니다.

06

대지 비율 86.7%가 말해주는 것

여기서 잠시 숫자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12년 무렵 국유지 기록을 살펴보면 논과 밭처럼 농경지 중심으로 구성된 마을이 훨씬 흔합니다. 그런데 신사동은 국유지 열다섯 필지 가운데 열세 필지, 그러니까 여든여섯 퍼센트가 넘는 땅이 대지였습니다. 면적으로 따져도 거의 팔십 퍼센트에 이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대지 필지 비율 86.7퍼센트는 이 시리즈에서 지금까지 다룬 여러 동 단위 기록 가운데서도 뚜렷하게 도드라지는 수치입니다. 논밭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동과 달리, 신사동은 국유지 자체가 사실상 촌락형 집터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사례로 남습니다.

이 정도로 대지 비율이 높다는 건 이 지역이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람이 정착해 살아온 취락지에 가까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앞서 살펴본 새절이라는 절터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절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종교 시설에 그치지 않고, 그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고 살림을 꾸리는 작은 생활권을 함께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사동의 국유지 기록에 유난히 대지가 많이 남아 있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눈여겨볼 만합니다.


07

새절의 흔적과 국유지, 두 기록이 만나는 지점

신사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단서입니다. 새로울 신, 절 사라는 한자가 말해주듯, 이 마을에는 분명 절이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정확한 위치도, 남은 유구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오늘 살펴보고 있는 1912년 토지대장과 같은 근대 초기의 지적 기록입니다.

절이 있던 자리는 대체로 오랜 시간에 걸쳐 대지로, 즉 사람이 거주하는 땅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이 폐사되거나 옮겨간 뒤에도 그 터는 평탄하고 물자리가 좋아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기에 알맞은 땅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신사동에서 유독 대지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현상은, 새절이라는 절의 존재와 그 이후 형성된 마을의 관계를 다시 한번 짚어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물론 이 자료 하나만으로 절터의 정확한 위치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오늘 정리한 이 국유지 기록이 절터의 실마리를 찾는 데 있어 가장 먼저 펼쳐 볼 기초 자료가 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08

이 숫자가 문화유산 조사에서 중요한 진짜 이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왜 이런 백 년 전 토지 기록이 지금까지도 계속 소환되고 있을까요.

문화재 발굴조사나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어떤 지역을 조사하려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지표조사란 실제로 땅을 파기 전, 그 지역의 지형과 옛 기록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가늠하는 사전 조사를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 옛 토지대장, 그러니까 오늘 살펴본 것과 같은 1912년 국유지 자료는 아주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됩니다.

땅의 지목이 대지였는지 밭이었는지에 따라 그 아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흔적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오랫동안 대지로 이용된 땅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했다는 뜻이라 주거지 유적이나 생활 유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게 되고, 밭으로 이용된 땅은 상대적으로 지표면 아래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시굴조사, 즉 좁은 범위를 시험 삼아 파보는 조사와 표본조사, 일정 구간을 표본으로 삼아 확인하는 조사의 범위와 방법이 정해집니다. 그리고 이 사전 단계를 거친 뒤에야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모든 절차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신사동 국유지 15필지, 12,062제곱미터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끝나는 정보가 아닙니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든 개발이나 조사가 이루어질 때, 가장 먼저 펼쳐 봐야 할 기초 자료가 되는 셈입니다.


09

기초자료 하나가 만든 변화, 실제 조사 성공 사례

이런 기초조사 자료가 실제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는 서울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심 재개발이나 도로 확장 공사를 앞두고 진행되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조사팀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옛 지적도와 토지대장입니다.



한 지역에서는 오래된 지적 자료를 바탕으로 특정 필지가 과거 오랫동안 대지로, 즉 집터로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를 토대로 시굴조사 범위를 좁혀 생활 유구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밭이나 논처럼 오랫동안 경작지로만 이용되어 온 지역은 지표 교란이 적었다는 판단 아래 표본조사의 우선순위가 조정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기초자료 하나가 조사의 방향과 순서, 나아가 조사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까지 바꿔놓는 경우가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신사동의 이 국유지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난히 높은 대지 비율, 그리고 새절이라는 이름이 품은 이야기까지 더해지면, 이 지역은 앞으로 조사가 이루어질 때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늘 이 글에서 정리한 필지 수와 지목, 면적 하나하나가 실제 조사의 실마리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겁니다.


10

자주 묻는 질문

Q.1912년 서울 은평구 신사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열다섯 필지였습니다.

Q.1912년 신사동 국유지의 전체 면적은 얼마였나요.

전체 면적은 12,062제곱미터였습니다.

Q.신사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열세 필지, 9,616제곱미터로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Q.신사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두 필지, 2,446제곱미터였습니다.

Q.신사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신사동 200번지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새절이라는 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한자로는 새로운 절을 뜻합니다.


11

한 줄로 정리하는 신사동 국유지 이야기

1912년 서울 은평구 신사동 국유지는 총 열다섯 필지 12,062제곱미터였으며, 대지 열세 필지가 전체의 여든여섯 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유난히 집터가 많았던, 새절이라는 이름을 품은 촌락형 마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는 신사동의 골목과 새절역 출구 사이 어딘가에는, 백 년 전 누군가가 새절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살던 시간이 여전히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무미건조할 수 있는 필지 수와 면적 하나하나가, 사실은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하루하루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 기록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이름 하나에 숨어버린 오래된 절의 흔적을 다시 꺼내어,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사동의 이 기록도 앞으로 오랫동안 소중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1912년 서울 25개 구, 모든 동의 국유지 기록을 계속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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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도 안내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1912년 당시 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였으며, 1950년 서울특별시 편입을 거쳐 1979년 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은평구 신사동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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