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 나루마을이 하나로 합쳐진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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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남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강남구 신사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 나루마을이 하나로 합쳐진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28필지밭 16필지논 6필지대지 6필지
한강 나루터에 자리했던 두 작은 마을은,훗날 각자의 이름 한 글자씩을 내어주며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강남구 신사동의 국유지는 총 28필지, 154,889㎡였습니다. 밭이 16필지 91,623㎡로 가장 많았고, 논과 대지가 각 6필지씩 확인됩니다.
신사동(新沙洞)이라는 이름은 한강변의 두 자연부락,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이름을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새말, 동산말, 사평이라는 마을들을 하나로 묶으며, 각각의 첫 글자 '신(新)'과 '사(沙)'를 따서 신사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새말은 한남대교 남쪽,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모래벌판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이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래벌만 남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리즈가 앞서 다룬 송파구 가락동에서도 살펴본 그 대홍수가, 이 한강 상류의 신사동 일대에도 똑같이 깊은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해 있던 이 마을은, 강남 개발과 함께 크게 변모했습니다.
1912년의 이 마을 국유지 장부에서, 밭이 16필지로 국유지 전체의 57.1%를 차지하며 가장 넓은 지목으로 확인됩니다. 두 나루마을이 하나로 합쳐지기 이전, 그 강변 저지대의 흔적이 이 국유지 안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28장의, 두 마을의 이름이 겹쳐진 그 자리의 기록을 지금부터 넘겨봅니다.

목차
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국유지 밭 16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논과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데이터 검증 노트
지목별 현황 표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강남구 신사동의 국유지는 총 28필지, 154,889㎡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46,854평입니다.
압구정동, 논현동, 서초구 잠원동과 맞닿아 있고, 강 건너로는 용산구 한남동, 성동구 옥수동과도 경계를 이루는 이 마을은, 조선시대 새말과 사평리라는 두 나루터 마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강남구의 신사동, 수서동, 세곡동, 삼성동, 논현동, 개포동을 다루었습니다. 이번 신사동 국유지 편은 그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지금의 신사동은 가로수길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상업·문화 거리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78년 인사동에서 옮겨온 화랑들을 시작으로 강남 고급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2. 국유지 밭 16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에는 밭이 16필지, 91,623㎡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57.1%로 가장 많은 지목입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5,726.4㎡, 약 1,732평이라는 넓은 규모입니다. 한강변 저지대, 넓은 밭들이 국유지로 상당 부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국유지 논과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신사동 국유지에는 논이 6필지 49,015㎡, 대지가 6필지 14,251㎡ 있었습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은 8,169.2㎡, 약 2,472평이라는 이 시리즈에서도 매우 넓은 규모입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은 2,375.2㎡, 약 719평으로 역시 넉넉한 편입니다. 나루터 인근 저지대의 지리적 조건이 이런 넓은 논농사를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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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논 6필지 49,015㎡ + 대지 6필지 14,251㎡ + 밭 16필지 91,623㎡ = 28필지, 154,889㎡로, 전체 국유지 필지 수와 면적 모두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차 없는 완벽한 데이터셋입니다.
5. 지목별 현황 표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밭 | 16필지 | 91,623㎡ | 57.1% | 59.2% |
논 | 6필지 | 49,015㎡ | 21.4% | 31.6% |
대지 | 6필지 | 14,251㎡ | 21.4% | 9.2% |
전체 | 28필지 | 154,889㎡ | 100% | 100% |
표 설명: 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으로, 밭이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
신사동은 두 자연부락의 이름을 합성한 실제 지명 사례이자, 이 시리즈가 앞서 다룬 가락동과 마찬가지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의 상처를 함께 지닌 사례로 기록됩니다.
신사동, 수서동, 세곡동, 삼성동, 논현동, 개포동에 이은 강남구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6.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신사동의 기록은 조사 전략에 각별한 신호를 보냅니다. 첫째, 새말과 사평리라는 두 자연부락의 정확한 경계와 그 원형 나루터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이 지역 근대 이전 촌락사 및 수운 문화사 연구에 흥미로운 자료가 됩니다. 둘째,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새말의 정확한 피해 범위를 규명하는 일도 근대 재해사 연구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셋째, 국유지로 편입된 이 넓은 밭과 논이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국가 소유가 되었는지도 근대 국유지 정책사 연구에 의미가 있습니다.
한강물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뒤, 모래벌판만 남았던 그 마을의 기억은, 지금은 가로수길의 화려한 활기 속에서도 신사동이라는 이름 안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발견된 백제 왕성
1997년, 서울 풍납동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초기의 토기와 유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후 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었고, 한국 고대사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28필지, 154,889㎡(약 46,854평)였습니다.
Q. 신사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한강변 자연부락인 새말(新村)의 '신(新)' 자와 사평리(沙平里)의 '사(沙)' 자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Q. 1925년 을축년 대홍수와 신사동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이 대홍수로 새말이라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래벌만 남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리즈가 앞서 다룬 송파구 가락동 역시 같은 대홍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Q. 지금의 신사동은 어떤 곳인가요?
A. 가로수길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상업·문화 거리이며, 1978년 인사동 화랑들이 옮겨오며 강남 고급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9.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는 총 28필지 154,889㎡로, 밭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새말과 사평리라는 두 나루터 마을이 하나로 합쳐진 이름과 1925년 대홍수의 아픈 기억을 함께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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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논·대지·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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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한강 나루터에 자리했던 두 작은 마을은,
훗날 각자의 이름 한 글자씩을 내어주며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열여섯 뙈기의 밭과 여섯 배미의 논, 여섯 채의 집터가
그 나루마을의 국유지 안에 조용히 자리했다.
1925년 그 큰물이 지나간 뒤, 새말은 모래벌판으로 남았다.
두 마을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신사리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그 나루터 자리에는 가로수길의 활기가 밤낮으로 흐른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신사동 국유지의 28필지에 다시 그 두 나루마을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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