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말죽거리 역마을에 남은 논밭 139필지, 57만㎡의 기록 역삼동 역사 ·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일 전
9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남구 편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말죽거리 역마을에 남은 논밭 139필지, 57만㎡의 기록

역삼동 역사 ·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39국유지 필지 수

575,103㎡국유지 총면적

84.3%논과 밭이 차지한 면적 비율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는 국유지 139필지, 총 575,103㎡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논 31필지 245,101㎡, 밭 80필지 239,888㎡, 대지 24필지 45,415㎡, 임야 3필지 38,380㎡, 분묘지 1필지 6,317㎡였습니다.

즉, 역삼동 국유지는 논과 밭이 면적의 84.3%를 차지한 농경지 중심의 땅이었으며, 필지 수로는 밭이 가장 많고 면적으로는 논이 가장 넓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걷는 테헤란로 아래,114년 전엔 벼가 자랐습니다.

믿기 어렵죠.

역삼역 출구를 나서면 보이는 건 유리 빌딩과 배달 오토바이, 그리고 점심시간 줄 선 직장인들입니다.

그런데 1912년의 역삼동 지도를 펼치면 풍경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국가 소유의 땅만 139필지.

그 가운데 논이 축구장 34개 넓이, 밭도 거의 같은 넓이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땅은 조선시대 말이 쉬어 가던 역마을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강남 한복판에서 “왜 이렇게 많은 땅이 나라 땅이었을까?”라는 질문에서요.

끝까지 읽으면, 내일 출근길 역삼역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목차

11912년 역삼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역삼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3역삼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4역삼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5역삼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6임야와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7지목별 비교 표로 한눈에 보기

8역마을과 국유지, 무슨 관계일까요?

9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10역삼동 땅이 먼저 알려준 성공 사례

11자주 묻는 질문

12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11912년 역삼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숫자부터 정확하게 봅시다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던 국유지는 139필지입니다.

면적을 모두 더하면 575,103㎡입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73,968평이에요.

감이 잘 안 온다면 이렇게 떠올려 보세요.

국제 규격 축구장 하나가 약 7,140㎡입니다.

역삼동 국유지는 그런 축구장 약 80개를 이어 붙인 넓이였습니다.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도 약 4,137㎡로, 결코 작지 않습니다.

당시 역삼동은 서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꼭 짚고 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1912년의 역삼동 일대는 지금처럼 서울특별시가 아니었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한 농촌 마을이었어요.

한강 남쪽의 이 땅이 서울로 들어온 건 1963년의 일입니다.

그 뒤 성동구와 강남구를 거치며 지금의 역삼동이 되었죠.

그러니까 이 글의 숫자는 “강남 이전의 강남”을 기록한 숫자입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역삼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일대) 국유지는 총 139필지, 575,103㎡로 축구장 약 80개 넓이였습니다.


2역삼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세 마을이 하나로 묶인 이름

역삼동의 ‘역’은 기차역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공문서와 관리를 실어 나르던 역참의 ‘역’입니다.

이 일대에는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역, 양재역이 있었습니다.

역에 딸린 마을은 역말, 또는 역촌이라고 불렀어요.

말에게 죽을 쑤어 먹이던 곳이라 해서 ‘말죽거리’라는 이름도 전해집니다.

역삼동이라는 이름은 이 역마을과 윗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라는 세 마을을 합친 데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역마을 세 곳, 그래서 역삼(驛三)입니다.

이름 속에 이미 단서가 있다

재미있는 건 여기서부터입니다.

역참은 나라가 운영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역을 유지하려면 말을 먹이고, 역졸을 먹여 살릴 땅이 필요했죠.

그 땅을 ‘역토’라고 불렀습니다.

동네 이름 하나에, 1912년 국유지가 유난히 많았던 이유의 실마리가 숨어 있는 셈입니다.

이 이야기는 8장에서 다시 풀어 볼게요.



3역삼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면적 1위는 논

1912년 역삼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31필지, 245,101㎡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42.6%를 차지합니다.

다섯 지목 중 가장 넓은 면적이에요.

평으로는 약 74,143평입니다.

논 한 필지가 유난히 컸다

필지 수만 보면 논은 31필지로, 밭 80필지의 절반도 안 됩니다.

그런데 면적은 오히려 밭보다 5,213㎡ 더 넓습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7,907㎡.

밭 한 필지 평균의 2.6배가 넘습니다.

이건 무엇을 뜻할까요?

논은 물을 대야 하는 땅입니다.

물길을 따라 넓고 평평한 저지대에 크게 구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삼동의 국유 논도 개울과 낮은 들판을 따라 큼직하게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의 대로와 빌딩 부지 아래, 한때 물이 찰랑이던 논둑이 있었던 셈이죠.

한 줄 정리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논은 31필지 245,101㎡로, 면적 기준 1위(42.6%)였습니다.


4역삼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필지 수 1위는 밭

1912년 역삼동 국유지 가운데 밭은 80필지, 239,888㎡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전체 139필지 중 57.6%.

국유지 열 필지 중 여섯 필지가 밭이었다는 뜻입니다.

면적으로는 41.7%로, 논과 거의 맞먹습니다.

잘게 나뉜 밭이 말해 주는 것

밭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2,999㎡입니다.

논보다 훨씬 잘게 쪼개져 있었죠.

밭은 물을 대지 않아도 되니 구릉지나 마을 주변, 비탈에도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 되기 쉽습니다.

역삼동은 지금도 남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지는 동네입니다.

언덕과 들판이 섞인 땅에 작은 밭들이 촘촘히 박혀 있던 풍경이 그려지지 않나요?

논과 밭을 합치면 111필지, 484,989㎡입니다.

역삼동 국유지 면적의 84.3%가 농사짓는 땅이었습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밭은 80필지 239,888㎡로, 필지 수 기준 1위(57.6%)였습니다.



5역삼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4필지의 집터

1912년 역삼동 국유지 가운데 대지는 24필지, 45,415㎡였습니다.

필지 수로는 17.3%, 면적으로는 7.9%입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약 1,892㎡로 다섯 지목 중 가장 작습니다.

대지는 집이나 건물이 서 있는 땅입니다.

나라 땅 위의 집들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농촌 마을에 왜 나라 소유의 집터가 24필지나 있었을까요?

역참이 있던 마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역에는 말을 매는 마구간, 역졸이 머무는 집, 관리가 쉬어 가는 건물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시설과 그 주변 집터가 국유 대지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물론 이건 지목 통계만으로 단정할 수 없는 추정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질문이 현장 조사를 시작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옛 대지는 사람이 오래 머문 흔적이 땅속에 남기 쉬운 곳이니까요.

한 줄 정리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대지는 24필지 45,415㎡로, 필지당 평균 약 1,892㎡의 작은 집터들이었습니다.


6임야와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 적지만 가장 큰 덩어리

1912년 역삼동 국유지 가운데 임야는 3필지, 38,380㎡였습니다.

필지 수는 겨우 2.2%.

하지만 한 필지 평균 면적은 약 12,793㎡로 다섯 지목 중 가장 큽니다.

숲과 산자락은 쪼개지 않고 큰 덩어리로 남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역삼동 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과 산자락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 한 필지의 분묘지

1912년 역삼동 국유지 가운데 분묘지는 1필지, 6,317㎡였습니다.

전체 필지의 0.7%, 면적의 1.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한 필지가 가장 오래 눈에 밟혔습니다.

분묘지는 무덤이 있는 땅입니다.

약 1,911평, 결코 작지 않은 넓이가 나라 소유의 묘역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뜻이에요.

누구의 무덤이었을까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까요.

지목 한 줄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묘지는 매장유산 조사에서 가장 먼저 표시해 두는 구역 중 하나입니다.

강남 한복판 어딘가에 그 땅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입니다.

한 줄 정리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임야는 3필지 38,380㎡, 분묘지는 1필지 6,317㎡였습니다.


7지목별 비교 표로 한눈에 보기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숫자를 한 장의 표로 모았습니다.

필지 수, 면적, 비율, 평균 면적을 나란히 보면 역삼동 땅의 성격이 선명해집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필지 비율

필지당 평균(㎡)

논

31

245,101

42.6%

22.3%

7,907

밭

80

239,888

41.7%

57.6%

2,999

대지

24

45,415

7.9%

17.3%

1,892

임야

3

38,380

6.7%

2.2%

12,793

분묘지

1

6,317

1.1%

0.7%

6,317

합계

139

575,103

100%

100%

4,137

표 설명: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일대) 국유지 139필지 575,103㎡의 지목별 현황. 비율은 총면적 575,103㎡, 총 139필지 기준이며 소수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했다.

지목별 면적 비율

논

42.6%

밭

41.7%

대지

7.9%

임야

6.7%

분묘지

1.1%

지목별 필지 수 비율

밭

57.6%

논

22.3%

대지

17.3%

임야

2.2%

분묘지

0.7%

그래프 설명: 면적은 논이, 필지 수는 밭이 1위다. 논은 크게, 밭은 잘게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이 두 그래프의 순서 차이로 드러난다.

표에서 읽히는 세 가지

첫째, 역삼동 국유지는 압도적으로 농경지였습니다.

논과 밭을 합치면 면적의 84.3%, 필지의 79.9%입니다.

둘째, 논은 크고 밭은 잘았습니다.

면적 순위와 필지 순위가 뒤바뀌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셋째, 사람이 살던 대지가 24필지나 국유였습니다.

농촌 마을치고는 눈에 띄는 숫자이고, 역마을의 성격과 연결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8역마을과 국유지, 무슨 관계일까요?

역토에서 국유지로

조선의 역참은 스스로 굴러가는 작은 경제였습니다.

역에 딸린 논밭에서 나온 곡식으로 말을 먹이고 사람을 먹였죠.

그런데 1890년대 이후 역참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근대식 우편과 통신이 들어오면서 말을 타고 달리던 역마는 쓸모를 잃었어요.

주인을 잃은 역의 땅은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 초기에 걸쳐 국유지로 정리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역토와 둔토를 묶어 ‘역둔토’라 부르며 조사하고 관리했던 것도 이 시기입니다.

그래서 역삼동엔 나라 땅이 많았을까

이 흐름을 알고 나면 1912년 역삼동의 숫자가 다르게 읽힙니다.

역마을 한가운데 139필지의 국유지.

그중 대부분이 논과 밭.

역에 딸려 있던 땅이 국유지로 넘어온 결과일 가능성을 충분히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필지가 실제 역토였는지는 토지대장과 옛 지적도를 한 필지씩 맞춰 봐야 확인됩니다.

통계는 방향을 알려 주고, 확인은 기록 대조와 현장이 합니다.

이게 기초조사의 정직한 순서입니다.

한 줄 정리역삼동은 양재역 역마을이었고, 역에 딸린 땅이 국유지로 정리되는 역사적 흐름이 1912년 국유지 139필지의 배경으로 추정됩니다.



9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중요한 이유

땅을 파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것

강남에서 새 건물이 올라가기 전, 땅 밑을 먼저 확인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매장유산 조사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첫 단계는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과 옛 지도, 현장 답사로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살피는 단계예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바로 이 지표조사의 핵심 자료가 됩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일부 지점을 작게 파 보며 유구나 유물이 나오는지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깊이, 성격을 가늠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이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하는 본 조사죠.

역삼동 데이터가 알려 주는 조사 포인트

역삼동의 1912년 국유지 통계는 조사자에게 구체적인 신호를 줍니다.

국유 대지 24필지는 역참 관련 건물지나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는 구역입니다.

분묘지 1필지는 매장 유구 확인이 필요한 구역으로 우선 표시할 곳입니다.

넓은 논 31필지는 옛 물길과 수리 시설, 논 경작층을 확인할 단서가 됩니다.

임야 3필지는 구릉 위 선사시대 생활 유적 가능성을 검토할 대상입니다.

이렇게 옛 지목을 오늘의 지번 위에 겹쳐 두면, 어디를 먼저 보고 어디를 더 조심해야 할지가 보입니다.

공사 일정도, 비용도, 유산도 함께 지키는 방법이에요.

한 줄 정리1912년 역삼동 국유지 지목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대지·분묘지·논·임야별 유적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초자료로 쓰입니다.



10역삼동 땅이 먼저 알려준 성공 사례

동네 이름이 교과서 용어가 되다

여기서 소름 돋는 이야기 하나.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역삼동’이라는 이름을 강남보다 먼저 교과서에서 만납니다.

1960년대 역삼동 구릉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가 조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온 토기와 집자리의 특징은 이후 한반도 중부 청동기 문화를 설명하는 기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지금도 ‘역삼동 유형’이라는 말을 씁니다.

빌딩 숲이 되기 전의 역삼동 언덕이, 약 3천 년 전 사람들의 마을이었다는 증거였죠.

먼저 읽고 먼저 판 곳이 남긴 것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단순합니다.

개발 전에 땅을 먼저 읽고 조사한 덕분에 그 기록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그 뒤 강남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만약 조사 없이 공사가 먼저였다면, ‘역삼동 유형’이라는 단어는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 곳곳의 사례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전 조사로 유적의 범위를 미리 파악한 사업장은 설계를 조정해 공사를 이어 가고, 유적은 기록하거나 보존합니다.

반대로 조사를 건너뛰었다가 공사 중에 유구가 드러나면 공정이 멈추고 비용은 훨씬 커집니다.

1912년 토지 기록 한 장이 지표조사를 똑똑하게 만들고, 그 지표조사가 시간과 돈과 역사를 함께 지켜 주는 겁니다.


11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39필지, 면적은 575,103㎡였습니다.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일대였습니다.

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논은 31필지 245,101㎡로, 국유지 면적의 42.6%를 차지해 면적 기준 1위였습니다.

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80필지 239,888㎡로, 필지 수 기준 1위(57.6%)였습니다.

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24필지 45,415㎡였습니다. 필지당 평균 약 1,892㎡로 가장 작게 나뉜 지목이었습니다.

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임야와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임야는 3필지 38,380㎡, 분묘지는 1필지 6,317㎡였습니다.

역삼동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겼나요?

A. 조선시대 양재역 부근 역마을과 윗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 마을을 합쳐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전합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A. 옛 지목(대지, 분묘지, 논, 임야)을 현재 지번과 대조해 유적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가려내는 지표조사 기초자료로 쓰이며, 이후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계획을 세우는 근거가 됩니다.

검증 노트

지목별 필지 수를 더하면 31 + 80 + 24 + 3 + 1 = 139필지로, 제시된 총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을 더하면 575,101㎡로, 제시된 총면적 575,103㎡와 2㎡ 차이가 납니다. 이는 평(坪) 단위 원자료를 ㎡로 환산하며 생기는 반올림 차이로 판단되며, 본문은 원자료의 총면적 575,103㎡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1912년 당시 역삼동 일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습니다. 본문의 ‘서울 강남구 역삼동’은 현재 행정구역 기준 표기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역삼동 국유지는 필지 수에서 밭이 과반(57.6%)을 차지하면서도, 면적에서는 논이 1위를 차지하는 ‘순위 역전’ 구조를 보였습니다.

국유 대지 24필지와 국유 분묘지 1필지(6,317㎡)는 역마을이라는 지역 성격과 함께 지표조사 단계에서 우선 검토할 항목으로 기록해 둡니다.



12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한 줄 결론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유지는 총 139필지 575,103㎡였으며, 논 31필지(245,101㎡)와 밭 80필지(239,888㎡)가 면적의 84.3%를 차지한 역마을의 농경지였습니다.

발밑의 시간

역삼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변한 동네 중 하나입니다.

매일 수십만 명이 그 위를 지나갑니다.

누군가는 첫 출근을 하고, 누군가는 마지막 퇴근을 합니다.

누군가는 이 동네에서 꿈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지친 하루를 견딥니다.

그런데 그 발밑에는 말에게 죽을 쑤어 주던 역마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을 대던 논둑이 있었고, 비탈에 콩을 심던 손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불을 피우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있었죠.

139필지라는 숫자는 차갑게 보이지만,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하루였습니다.

우리가 1912년의 기록을 꺼내 읽는 이유는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음 삽을 뜨기 전에, 그 사람들의 흔적을 한 번 더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내일 역삼역 계단을 오를 때, 잠깐만 발밑을 떠올려 주세요.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고향이었습니다.

우리 부지의 1912년은 어땠을까요?

개발 예정지의 옛 지목과 매장유산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까지의 기초자료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확인해 보세요.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1912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일대)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비율, 필지당 평균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 가운데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테마

  1. 1912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논과 밭 면적 정리

  2. 1912년 역삼동 국유지 현황: 139필지 575,103㎡, 논 245,101㎡·밭 239,888㎡

  3. 역삼동 역사, 테헤란로 아래에 논이 있었다? 1912년 국유지 139필지의 기록

  4. 1912년 역삼동 국유지 중 대지와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5. 말죽거리 역마을 역삼동, 1912년 토지조사로 본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역삼동역사#역삼동#강남구역사#1912년토지조사#역삼동국유지#말죽거리#양재역#역삼동유형#문화재지표조사#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문화재발굴#매장유산#문화재발굴기관#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

유리창이 해를 받아 반짝이는 자리,


예전엔 물 댄 논이 하늘을 담았다.


말은 죽 한 그릇에 숨을 고르고


역졸은 흙길 끝을 오래 바라보았다.


밭 여든 필지, 논 서른한 필지,


이름 모를 무덤 하나.


숫자는 조용하지만


땅은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읽는 것은


그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다.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