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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발굴조사


서울 동대문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53필지 635만㎡의 충격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동대문구1912년 토지조사창덕궁 27필지척식회사 452필지분묘지 158필지 척식회사 452필지 vs 창덕궁 27필지 —1912년 동대문구, 수탈과 왕실이 맞붙은 땅 서울 동대문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53필지 635만㎡의 충격 ▲ 1912년 동대문구에는 158필지 305,429㎡의 분묘지가 있었다.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분묘 필지 수다. 구릉마다 선조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452필지를 손에 쥐고, 창덕궁이 27필지를 지키고 있었다. 수탈 기관과 왕실이 같은 동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동대문구. 지금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와 청량리 역세권, 경희대·한국외대가 자리한 서울 동북쪽 도시 지역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기록에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대립 구도가 새겨져 있다. 동양척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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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95필지 1,142만㎡의 기록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구로구1912년 토지조사연못 22필지배씨·문씨 집성촌경인선 철도용지 연못이 22개 흩어진 땅,배씨와 문씨가 지킨 1912년 구로구의 숨겨진 얼굴 서울 구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95필지 1,142만㎡의 기록 ▲ 1912년 구로구에는 22필지 49,044㎡의 연못이 흩어져 있었다.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연못 필지 수다. 논과 연못이 공존하는 특별한 수경 농촌 지대였다 구로구에 연못이 22개 있었다. 이 시리즈 10편을 통틀어 가장 많은 연못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구로구.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와 G밸리, 경부고속도로 시작점으로 유명한 서울 서남부 산업 도시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기록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22필지 49,044㎡의 연못. 이 시리즈에서 연못(지소) 데이터를 비교하면 구로구가 압도적 1위다. 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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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5,428필지 1,642만㎡의 비밀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서초구1912년 토지조사프랑스인 37필지홍씨 집성촌한강 최대 논농사 프랑스인이 37필지를 소유하고,논이 1만 6천 평을 덮은 땅 —1912년 서초구의 충격적 기록 서울 서초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5,428필지 1,642만㎡의 비밀 ▲ 1912년 서초구는 논 2,146필지 7,550,367㎡, 밭 2,470필지 6,528,316㎡의 광대한 농경 지대였다.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논밭 면적이다 프랑스인이 37필지. 종로구(10필지), 용산구(5필지), 성북구(4필지)를 모두 합쳐도 서초구 혼자를 못 당한다. 서초구. 지금은 대법원, 예술의전당, 반포·잠원·서래마을이 자리한 서울 남서부의 고급 주거·문화 지대다. 그러나 113년 전 이 땅의 기록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5,428필지, 16,429,068㎡. 이 시리즈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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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개포동 국유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28필지 69,620㎡의 기록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강남구 개포동국유지 논·밭·산1912년 토지조사한강 충적 농경지 강남 아파트 숲 아래,1912년 국가가 소유한 논·밭·산 28필지의 진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국유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28필지 69,620㎡의 기록 ▲ 1912년 개포동 국유지의 절반 이상(77.3%)이 논이었다. 지금의 개포 래미안·포레스트 아파트 단지 아래, 국가가 직접 소유한 53,788㎡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강남 8학군의 심장, 개포동. 그 땅의 77%는 1912년 국가 소유 논이었다. 개포동. 지금은 강남 최고가 아파트 단지들이 밀집한 대한민국 부동산의 상징적 공간이다. 개포 래미안 포레스트, 개포 자이, 디에이치 아너힐스. 평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이 땅의 113년 전 주인은 누구였을까. 답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국가였다. 28필지 69,620㎡의 국유지 중 14필지 53,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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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23필지의 충격적 기록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성북구1912년 토지조사창덕궁 소유지손씨 집성촌프랑스 선교 창덕궁이 성북구 땅을 직접 소유했다 —1912년 성북구, 왕실과 민중과 이방인의 땅 서울 성북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23필지의 충격적 기록 ▲ 창덕궁은 성북구 95필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다. 왕실의 손길이 궁궐 담장 너머 성북 땅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1912년 성북구 땅의 일부는 '창덕궁' 명의였다. 왕조가 무너진 지 2년이 지난 뒤에도. 이 시리즈 일곱 편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한 줄이 여기 있다. 1912년 성북구에 창덕궁 소유의 토지가 95필지.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끝나고, 고종과 순종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창덕궁 명의의 토지가 성북구 한 복판에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것도 95필지나. 그리고 손씨(孫氏)가 4위 성씨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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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978필지의 비밀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양천구1912년 토지조사한강 논농사수도용지원씨 집성촌 논이 절반, 잡종지가 절반 —1912년 양천구는 한강이 만든 땅이었다 서울 양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978필지의 비밀 ▲ 1912년 양천구 전체 면적의 29.7%가 논이었다. 844필지 3,271,852㎡ — 한강이 만들어준 비옥한 충적 평야가 양천구를 서울 최대의 논농사 지대로 만들었다 지금 목동 아파트 단지 아래, 한강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논이 있었다. 양천구. 지금은 목동 신도시와 한강공원, 올림픽대로로 유명한 현대적 주거 지역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1,978필지에 펼쳐진 11,020,849㎡의 땅 중, 절반 가까이가 논과 밭이었다. 844필지의 광활한 논, 809필지의 밭이 한강 변 충적 평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전체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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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강일동 국유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7필지 35,358㎡의 기록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강동구 강일동국유지 밭1912년 토지조사한강 농경지 한강 변 국유지 밭 35,358㎡ —1912년 강동구 강일동, 국가가 직접 경작한 땅의 비밀 서울 강동구 강일동 국유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7필지 35,358㎡의 기록 ▲ 1912년 강일동 국유지 7필지는 전부 밭이었다. 한강과 맞닿은 비옥한 충적 평지에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 밭이 35,358㎡ 펼쳐져 있었다 국가가 직접 밭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한강 변 가장 비옥한 땅에. 1912년 강동구 강일동.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한강공원으로 채워진 이 땅에 7필지, 35,358㎡의 밭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밭의 주인이 개인이 아닌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지로 분류된 이 7필지는 한강 변 충적 평지의 가장 비옥한 농경지였다. 개인도, 마을도, 집성촌도 아닌 '국가'가 직접 소유한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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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6,077필지의 충격적 진실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용산구1912년 토지조사철도용지근대 군사도시문화유산 기차가 달리고 군대가 주둔하던 그 땅,1912년 용산구는 어떤 모습이었나 서울 용산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6,077필지의 충격적 진실 ▲ 1912년 용산구에는 1,724,715㎡에 달하는 철도용지가 있었다. 전체 면적의 15%가 기차와 군사 시설을 위한 땅이었다 이 땅의 15%는 기차를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점령군을 위한 것이었다. 용산. 지금은 대통령실과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용산 공원이 들어선 서울의 핵심 공간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이야기는 훨씬 더 충격적이다. 1912년 용산구에는 무려 1,724,715㎡의 철도용지가 있었다. 전체 면적 11,528,600㎡의 15%가 오직 철도를 위한 땅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은 883필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거기에 미국인 13필지, 프랑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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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7,740필지의 비밀🏯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종로구1912년 토지조사조선의 심장부문화유산 경복궁 옆 그 땅, 조선 500년의 심장부는1912년에 누구 손 안에 있었나 서울 종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7,740필지의 비밀 ▲ 1912년 종로구는 조선왕조 500년의 도심 한복판, 경복궁과 창덕궁을 품은 역사의 땅이었다 조선 500년, 그 모든 역사가 지금 당신 발밑 흙 속에 잠들어 있다. 종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경복궁? 광화문 광장? 인사동 골목? 하지만 1912년의 종로구는 지금과는 다른 층위를 가진 땅이었다. 무려 17,740필지, 1,069만 제곱미터의 광대한 공간에 왕궁과 시장, 논밭과 외국인 공관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조선 왕조의 손길과 일제의 야욕, 그리고 독일·러시아·영국·프랑스인의 발자국까지 새겨져 있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지금 당신이 걷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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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랑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반으로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서울 중랑구1912년 토지조사문화유산시굴조사 지금 당신이 사는 그 땅, 100년 전에는 누구 것이었을까?1912년 서울 중랑구의 잊혀진 지도를 펼치다 서울 중랑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반으로 ▲ 1912년 중랑구 일대는 드넓은 논밭과 몇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서울 외곽 농경지대였다 당신이 매일 걷는 그 골목, 그 아파트 단지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땅은 말이 없다. 하지만 기록은 말을 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113년 전, 1912년. 일제는 한반도 전역의 토지를 낱낱이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 방대한 자료 속에서 지금의 서울 중랑구 일대, 3,932필지에 달하는 1,039만여 제곱미터의 땅이 한 줄 한 줄 정리되어 있다. 논은 얼마였고, 집은 몇 채였으며, 무덤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는지. 이 글을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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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오늘 · 5월 31일] 5월 31일, 나라의 첫 국회가 열리고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다 한국사·세계사 주요 사건 총정리 (음력·간지 표기 포함)](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6e59_8c181949e2ab4ea2b7dcd85d470cb392~mv2.png/v1/fill/w_333,h_250,fp_0.50_0.50,q_35,blur_30,enc_avif,quality_auto/836e59_8c181949e2ab4ea2b7dcd85d470cb392~mv2.webp)
![[역사속 오늘 · 5월 31일] 5월 31일, 나라의 첫 국회가 열리고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다 한국사·세계사 주요 사건 총정리 (음력·간지 표기 포함)](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6e59_8c181949e2ab4ea2b7dcd85d470cb392~mv2.png/v1/fill/w_454,h_341,fp_0.50_0.50,q_95,enc_avif,quality_auto/836e59_8c181949e2ab4ea2b7dcd85d470cb392~mv2.webp)
[역사속 오늘 · 5월 31일] 5월 31일, 나라의 첫 국회가 열리고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다 한국사·세계사 주요 사건 총정리 (음력·간지 표기 포함)
역사속 오늘 · 5월 31일 5월 31일, 나라의 첫 국회가 열리고 세계가 한국을 주목했다 한국사·세계사 주요 사건 총정리 (음력·간지 표기 포함)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1회 제헌 국회가 열렸다.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신익희·김동원. 한국 민주주의의 첫 날이었다." 해방 후 3년, 분단과 혼란의 시대를 지나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선거로 뽑힌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에 모였다. 54년 뒤인 2002년 같은 날, 한일 월드컵이 개막됐다.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또 다른 역사적 날이었다. 1812년엔 홍경래 난이 끝났고, 1885년엔 청일 천진조약이 체결됐으며, 1886년엔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다. 1819년엔 시인 휘트먼이 태어났다. 5월 31일이 품은 역사를 함께 들여다보자. 📋 목차 5월 31일 한국사 연표 (고려·조선) 5월 31일 근현대사 연표 (개항기~현대) 5월 31일 세계사 연표 주요 사건 심층 해설 스토리텔링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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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금천구 1,516필지 4,640,738㎡ — 논·밭이 전체의 87%를 덮은 농경 지대,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낮은 일본인 소유 비율의 비밀.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논+밭 86.6% 농경 왕국일본인 겨우 3필지 1912년 금천구,일본인은 3필지였다— 조선인의 땅이 지켜진 이유 1912년 서울 금천구 1,516필지 4,640,738㎡ — 논·밭이 전체의 87%를 덮은 농경 지대,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낮은 일본인 소유 비율의 비밀. 같은 1912년, 서울 중구 일본인 소유 3,264필지. 서울 금천구 일본인 소유 단 3필지. 이 극적인 차이, 왜 생겼을까요?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 서울 도심인 중구에서는 이미 일본인이 3,264필지를 소유하며 토지 지형을 급격히 재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같은 서울 안의 금천구에서는 일본인 소유 필지가 고작 3필지에 불과했습니다. 이 극적인 대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1912년 금천구는 1,516필지 4,640,738㎡ 중 86.6%가 논과 밭이었습니다. 조선인 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 마을 공유지 6필지. 광활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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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중구11,623필지의 땅은누구의 것이었나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식민지 토지 수탈 기록11,623필지 전수 분석 1912년 서울 중구11,623필지의 땅은누구의 것이었나 일본인 3,264필지, 조선인 성씨 총합, 분묘 28필지 412,094㎡, 철도용지, 수도용지… 대한제국이 사라진 직후, 서울 도심의 땅은 어떻게 재편되고 있었는가. 1912년, 서울 한복판의 땅을 일본인이 3,264필지 갖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김씨 1,579필지, 이씨 1,248필지… 이 숫자들이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토지 기록이 아닙니다. 서울 중구. 지금의 명동, 을지로, 남대문, 충무로가 모두 이 안에 있습니다. 조선의 심장부이자 대한제국의 도심이었던 이 지역이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서울 중구의 토지는 총 11,623필지, 6,824,623㎡. 지금의 중구 전체 면적(9.97㎢)에 육박하는 이 방대한 기록 안에는 땅의 용도뿐 아니라 토지 소유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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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북구 번동 국유지 10필지 8,578㎡ — 전체의 70.3%가 대지. 북한산 자락에서 국가가 직접 관리한 건물들의 이야기.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대지 70% 압도 구성 10필지 중 5필지가 대지,번동 땅속에는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1912년 강북구 번동 국유지 10필지 8,578㎡ — 전체의 70.3%가 대지. 북한산 자락에서 국가가 직접 관리한 건물들의 이야기. 10필지 중 절반이 대지였습니다. 그것도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대지가요. 북한산 기슭 번동에는 도대체 어떤 건물이 있었을까요? 서울 강북구 번동.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수유역과 미아역 사이, 조용한 주택가가 자리를 지키는 이 동네는 110년 전 꽤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번동 국유지는 10필지, 8,578㎡. 면적으로는 이 시리즈에서 손에 꼽을 만큼 소규모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국유지의 내부 구성이 매우 이례적입니다. 10필지 중 무려 5필지, 면적으로는 6,026㎡로 전체의 70.3%가 대지(垈地)입니다. 논 1필지, 밭 3필지, 임야 1필지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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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서구 가양동 국유지 27필지 227,215㎡ — 밭·잡종지·대지·사사지·분묘·임야·논, 일곱 개의 지목이 한 동네에 공존한 이유.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분묘 · 사사지 포함7종 지목 복합 국유지 27필지 속에 숨은 분묘와 사사지,가양동이 한강 옆에서지켜온 것들 1912년 강서구 가양동 국유지 27필지 227,215㎡ — 밭·잡종지·대지·사사지·분묘·임야·논, 일곱 개의 지목이 한 동네에 공존한 이유. 무덤이 있었습니다. 절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활한 밭과 잡종지가 있었습니다. 1912년 가양동은 이 모든 것이 한 동네에 공존했습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 지금은 가양역과 한강공원, 서울식물원이 들어선 이 동네는 110년 전 전혀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가양동 국유지는 27필지, 총 227,215㎡. 이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구성입니다. 무려 7가지 지목이 한 동네 안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밭, 잡종지, 대지, 사사지(寺社地), 분묘(墳墓), 임야, 논. 이 일곱 개의 지목은 단순한 토지 분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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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관악구 봉천동 국유지 2필지 10,750㎡ — 논 하나, 임야 하나.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땅의 이야기.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관악산 기슭 국유지 관악산 기슭의 단 2필지,그 작은 땅이품은 거대한 역사 1912년 관악구 봉천동 국유지 2필지 10,750㎡ — 논 하나, 임야 하나.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땅의 이야기. 단 2필지, 10,750㎡.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국유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땅이 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요? 관악구 봉천동. 지금은 서울대입구역을 중심으로 카페와 음식점, 고시원이 촘촘하게 들어선 젊은 동네입니다. 그러나 110년 전, 이 동네 어딘가에는 국가 소유의 땅 두 필지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논 1필지 3,517㎡, 임야 1필지 7,233㎡. 총 2필지 10,750㎡.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국유지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규모가 작습니다. 독산동 444,332㎡에 비하면 41분의 1, 군자동 1,189,235㎡에 비하면 110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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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광진구 구의동 국유지 3필지 37,887㎡ — 전부 임야. 논도 밭도 대지도 없이, 오직 숲만 있었던 이 땅의 비밀.
문화재 지표조사임야 발굴조사한강변 국유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숲,구의동 임야 100%가숨기고 있는 것 1912년 광진구 구의동 국유지 3필지 37,887㎡ — 전부 임야. 논도 밭도 대지도 없이, 오직 숲만 있었던 이 땅의 비밀. 논도, 밭도, 건물도 없었습니다. 오직 숲만 있었습니다. 그 숲이 110년째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서울 광진구 구의동. 지금은 구의역 주변 고층 아파트와 커피숍, 그리고 한강시민공원이 펼쳐진 이 동네는 110년 전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구의동 국유지는 3필지, 37,887㎡. 그리고 이 세 필지는 전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임야(林野)였습니다. 비율로 100%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를 통틀어 단일 지목이 100%를 차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왜 이 땅에는 농경지도, 건물도, 어떤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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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구로구 가리봉동 국유지 109,580㎡ — 논도 밭도 아닌, 그 알 수 없는 땅이 숨기고 있는 역사의 진실.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잡종지 82.3% 가리봉동 13필지,전체의 82%가 잡종지라는충격적인 사실 1912년 구로구 가리봉동 국유지 109,580㎡ — 논도 밭도 아닌, 그 알 수 없는 땅이 숨기고 있는 역사의 진실. "잡종지"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이 정체불명의 땅 90,149㎡가 가리봉동의 역사를 바꿀 열쇠입니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지금은 디지털 단지와 물류 창고, 그리고 다양한 이주민 커뮤니티가 공존하는 역동적인 동네입니다. 그런데 110년 전, 이 땅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가리봉동 국유지는 13필지, 총 109,580㎡. 그런데 이 중 무려 82.3%, 90,149㎡가 '잡종지(雜種地)'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고, 대지도 아닌 이 '잡종지'라는 지목은 대체 무엇일까요? 왜 가리봉동 국유지의 대부분이 이 정체불명의 분류로 기록되어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이 땅이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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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금천구 독산동, 논·밭·대지·철도용지가 한 동네에 공존한 이 땅의 역사. 지금 그 비밀을 꺼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철도용지 기초조사 81필지, 44만 평방미터서울 독산동 국유지에철도가 지나간 이유 1912년 금천구 독산동, 논·밭·대지·철도용지가 한 동네에 공존한 이 땅의 역사. 지금 그 비밀을 꺼냅니다. 서울 남쪽,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44만 평방미터의 침묵이 이제 말하기 시작합니다. 금천구 독산동. 대부분의 서울 시민에게 이 동네는 그저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고, 독산역 근처에 공장과 물류센터가 들어선 평범한 서울 남부의 한 동네일 겁니다. 그런데 110년 전 이 동네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는 독산동 국유지가 무려 81필지, 444,332㎡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구장 62개를 이어 붙인 넓이, 여의도 면적의 절반을 훌쩍 넘는 규모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구성이 더욱 놀랍습니다. 논, 밭, 대지에 더해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주목받는 지목 중 하나, 바로 철도용지(鐵道用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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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들판이 품은 110년의 비밀1912년 서울 공릉동 국유지를 파헤치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숲과 들판이 품은 110년의 비밀1912년 서울 공릉동 국유지를 파헤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12필지 99,197㎡의 국유지. 그 광활한 땅 아래,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을까요? 99,197㎡, 약 3만 평의 땅이 110년 동안 침묵을 지켜왔습니다. 지금, 그 입을 열어드립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아니면 가볍게 오르기 좋은 불암산 산자락 정도를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110년 전, 이 동네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토지 대장에는 공릉동 안에 무려 12필지, 합산 면적 99,197㎡에 달하는 국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구장 약 14개에 해당하는 이 넓은 땅은, 당시 임야와 밭, 그리고 대지로 나뉘어 국가 소유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 아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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