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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7,740필지의 비밀🏯

  • 1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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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옆 그 땅, 조선 500년의 심장부는1912년에 누구 손 안에 있었나

서울 종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7,740필지의 비밀


▲ 1912년 종로구는 조선왕조 500년의 도심 한복판, 경복궁과 창덕궁을 품은 역사의 땅이었다

조선 500년, 그 모든 역사가 지금 당신 발밑 흙 속에 잠들어 있다.

종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경복궁? 광화문 광장? 인사동 골목? 하지만 1912년의 종로구는 지금과는 다른 층위를 가진 땅이었다. 무려 17,740필지, 1,069만 제곱미터의 광대한 공간에 왕궁과 시장, 논밭과 외국인 공관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땅에는 조선 왕조의 손길과 일제의 야욕, 그리고 독일·러시아·영국·프랑스인의 발자국까지 새겨져 있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지금 당신이 걷는 종로의 보도블록 아래 얼마나 깊고 복잡한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목차

1.조선의 심장, 1912년 종로구의 규모를 먼저 파악하자

2.대지가 압도한 도시 — 집터 15,486필지의 의미

3.밭과 논 —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던 농경의 흔적

4.사사지·임야·잡종지·공원 — 숨겨진 공간들의 기록

5.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27개 성씨가 나눠 가진 땅

6.일본인·중국인·서양인 — 외국인이 차지한 종로구의 땅

7.국유지와 법인 — 제도가 장악한 공간

8.왜 종로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다른가

9.마무리 — 역사의 층위 위에서


1. 조선의 심장, 1912년 종로구의 규모를 먼저 파악하자

종로구는 그냥 도시의 한 구가 아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 한양의 중심이었고, 경복궁·창덕궁·경운궁이 자리한 왕권의 땅이었으며, 종묘와 사직이 시간을 지켜온 제례의 공간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불과 2년이 지난 1912년, 일제는 이 유서 깊은 땅을 낱낱이 측량하고 분류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17,740

총 필지 수

중랑구의 4.5배

1,069만

총 면적 (㎡)

여의도 약 3.7배

10종

토지 유형

공원용지 포함

7개국

외국인 소유 국적

서양 4개국 포함

17,740필지. 앞서 살펴본 중랑구(3,932필지)의 4.5배가 넘는 규모다. 면적은 비슷하지만 필지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종로구의 토지가 매우 촘촘하게 쪼개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 필지당 평균 면적을 계산하면 약 603㎡. 이것이 1912년 종로구 한 가구 혹은 한 토지 단위의 평균 크기였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1912년 데이터를 기반으로 종로구 일대 문화재 잠재 분포도를 구축하고 있다. 조선왕조 궁궐·관청·민가가 밀집했던 종로구는 서울 25개 구 중 문화재 발굴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 1912년 종로 시전 거리. 15,486필지의 대지 위에 수만 명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2. 대지가 압도한 도시 — 집터 15,486필지의 의미

중랑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중랑구는 논밭 농경지가 전체의 84%를 차지하던 농촌 지대였지만, 종로구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땅이었다. 무려 15,486필지, 6,187,608㎡가 대지(집터)였다. 전체 필지 수의 87.3%, 면적의 57.9%가 사람이 살고 건물이 들어선 땅이었다.

대지 필지 수

15,486필지

전체의 87.3%

대지 면적

6,187,608㎡

전체의 57.9%

15,486개의 집터. 이 숫자는 단순한 토지 통계가 아니다. 왕족의 저택, 양반 사대부의 기와집, 중인의 초가, 시전 상인의 점포, 그리고 이름 없는 서민의 쪽방까지 — 조선 왕조 사회의 모든 계층이 이 땅 위에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도 이 대지 필지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필지당 평균 대지 면적은 약 400㎡(약 121평). 이 수치 뒤에는 엄청난 격차가 숨어 있다. 왕궁 한 채가 수만 제곱미터를 차지하는 동안, 서민 수십 가구는 작은 필지 하나를 나눠 썼을 것이다. 이 불균형이 바로 1912년 종로구의 민낯이기도 하다.

"종로구 대지 15,486필지는 조선의 신분제가 공간으로 번역된 결과였다. 경복궁의 수만 평과 서민 쪽방 한 칸이 같은 '대지' 항목 아래 기록되어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 대지 밀집도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시대 건물 기초, 온돌 구조, 우물, 배수로, 담장 등 생활 유구가 지하에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극도로 높다. 실제로 종로구 일대 건설 공사 현장에서는 해마다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압도적인 대지 밀도에 있다.

3. 밭과 논 —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던 농경의 흔적

도시의 심장부였던 종로구에도 농경지가 있었다. 다만 그 비율은 중랑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다. 밭은 2,140필지 3,857,726㎡로 면적 기준 전체의 36.1%를 차지했고, 논은 23필지 104,212㎡에 불과했다.

대지

15,486필지

2,140필지

임야

77필지

잡종지

30필지

사사지

15필지

23필지


▲ 경복궁 지붕이 보이는 언덕 아래, 조선의 도심에도 텃밭이 있었다. 2,140필지의 밭이 종로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밭 2,140필지는 필지 수 기준으로는 전체의 12%에 불과하지만, 면적으로 보면 3,857,726㎡로 대지 다음으로 넓은 토지 유형이다. 지금의 삼청동, 부암동, 평창동 방향의 완만한 구릉지와 북악산 자락 아래 경사지에 밭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기슭을 따라 층층이 형성된 계단식 밭의 모습은 당시 종로구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논은 겨우 23필지. 이 작은 숫자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경복궁 후원 쪽 저지대나 세검정 방면의 물길 주변에 극히 일부 논이 존재했을 것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진 공간들은 이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습지성 유기물 보존 구역으로 분류되어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

4. 사사지·임야·잡종지·공원 — 숨겨진 공간들의 기록

종로구의 토지 유형 중 가장 흥미로운 항목 몇 가지가 있다. 사사지(寺社地), 공원용지, 그리고 잡종지가 그것이다. 이 항목들은 당시 종로구의 특수한 도시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15필지

사사지

269,353㎡ (사찰·신사)

77필지

임야

225,227㎡

30필지

잡종지

33,563㎡

1필지

공원용지

11,018㎡

사사지 15필지가 269,353㎡에 달한다는 사실부터 주목해야 한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무려 17,957㎡, 약 5,432평이다. 사사지란 절(寺)과 신사(社)가 위치한 종교 부지를 의미한다. 경복궁 인근의 조선시대 관사(官社), 창덕궁 후원의 사찰, 그리고 일제가 세운 신사(神社) 부지가 이 항목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광활한 사사지는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최우선 검토 대상이다. 사찰 터에는 불상·기와·비석 등 종교 유물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공원용지 1필지 11,018㎡는 서울 전체를 통틀어도 매우 희귀한 기록이다. 이는 탑골공원(파고다공원)으로 추정된다. 1897년 개장한 탑골공원은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이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1919년 3·1운동의 출발지이기도 한 이곳이 1912년 이미 공원용지로 별도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다.

🏛️탑골공원 1필지 11,018㎡는 국내 토지조사부 기록 중 '공원용지'로 분류된 극히 드문 사례다. 이 기록은 근대 서울의 도시 공간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도시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임야 77필지 225,227㎡는 인왕산과 북악산의 하단부 산림 지대로 보인다. 잡종지 30필지 33,563㎡는 당시 경성 도심의 도로 부속지, 상하수도 시설 부지, 관청 창고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5.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27개 성씨가 나눠 가진 땅

중랑구에서 7개 성씨만 기록된 것과 달리, 종로구에서는 무려 27개 성씨가 주요 토지 소유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종로구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도시적 공간이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1김씨3,447필지

2이씨3,032필지

3박씨1,214필지

4최씨806필지

5정씨566필지

6조씨455필지

7윤씨369필지

8홍씨398필지

9장씨355필지

10한씨332필지

11신씨326필지

12안씨324필지

13류씨314필지

14강씨276필지

15오씨253필지

16전씨240필지

17임씨235필지

18서씨198필지

19민씨156필지

20황씨154필지

21고씨138필지

22권씨132필지

23백씨131필지

24지씨117필지

25량씨111필지

26현씨104필지

27손씨100필지

김씨 3,447필지, 이씨 3,032필지. 두 성씨만 합해도 6,479필지로 전체 개인 소유 토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종로구에서 눈에 띄는 성씨는 민씨(156필지)와 홍씨(398필지)다. 조선 말기 권세를 누린 여흥 민씨 가문과 풍산 홍씨 가문의 흔적이 이 숫자 뒤에 있을 것이다. 민씨는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의 가문이고, 홍씨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를 배출한 명문가다.


▲ 27개 성씨가 공존하던 종로구. 이 골목 어딘가에 당신 가문의 선조가 살았을지도 모른다

류씨(314필지)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류씨 문중은 주로 한양 도성 내 고급 주거지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지씨(117필지), 량씨(111필지), 현씨(104필지)처럼 희귀한 성씨들도 100필지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종로구가 특정 가문만의 독점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혼재 공간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6. 일본인·중국인·서양인 — 외국인이 차지한 종로구의 땅

중랑구에서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겨우 1필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심장부 종로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려 7개국 외국인의 토지 소유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

일본인

641 필지

🇨🇳

중국인

73 필지

🇩🇪

독일인

7 필지

🇫🇷

프랑스인

10 필지

🇬🇧

영국인

3 필지

🇷🇺

러시아인

3 필지

일본인 641필지는 경술국치 2년 만에 이미 종로 한복판을 얼마나 빠르게 잠식했는지를 보여준다. 중랑구의 1필지와 비교하면 641배다. 이 641필지는 지금의 종로 1~6가, 인사동, 청진동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심장부를 점령한 일본인들의 발빠른 이주와 토지 매입이 숫자로 증명되는 순간이다.

중국인 73필지는 19세기 말부터 조선에 진출한 청나라 상인들, 이른바 '청상(淸商)'의 흔적이다. 지금의 인사동~청계천 일대에 형성되었던 중화 상권이 이 기록의 배경이다. 독일인 7필지는 대한제국 시기 독일 영사관과 독일계 회사 부지로 추정되며, 프랑스인 10필지는 명동성당 인근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유 토지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1912년 종로구에는 일본·중국·독일·프랑스·영국·러시아인의 토지 소유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의 심장부는 이미 국제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영국인 3필지와 러시아인 3필지는 각각 정동 일대의 영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관련 부지로 보인다. 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러시아공사관이 바로 이 3필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외국인 소유 토지들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근대 유물 발굴의 핵심 지점이 된다. 개화기 서양식 건물 기초, 당시 수입 도자기, 유리병 등 근대 유물이 집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종로구 외국인 토지의 역사적 의미: 일본 641필지 vs 서양 4개국 합계 23필지. 이 비율은 1912년 시점에 이미 일제의 토지 장악이 다른 열강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수치로 증명한다. 서양 열강의 영향력이 상징적 수준에 머문 반면, 일본은 종로구 전체 필지의 3.6%를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

7. 국유지와 법인 — 제도가 장악한 공간

개인과 외국인 소유 외에, 종로구 토지의 또 다른 축은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였다.

국유지 301필지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지. 구 왕실 소유 토지, 관청 부지, 궁궐 부속지 등이 포함. 경복궁·창덕궁·덕수궁 등 주요 궁궐은 이 301필지 안에 분산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인 소유 35필지

각종 상업 회사, 금융기관, 종교단체 등이 소유한 토지. 1912년 이미 경성에서 활동하던 조선식산은행, 각종 상회, 선교회 부지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유지 301필지는 종로구의 역사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적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궁궐과 관아들이 대부분 1910년 이후 총독부 관리로 넘어가면서, 일제는 이 공간들을 '국유지'라는 이름으로 재분류했다. 500년 왕조의 공간이 하루아침에 식민지 국가 재산이 된 것이다. 이 국유지들은 현재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종묘 등으로 국가 사적 및 세계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성공 사례: 2023년 경복궁 서쪽 담장 인접 부지 발굴조사에서 1912년 국유지 및 대지 기록과 실제 발굴 위치를 대조 분석한 결과, 조선 후기 의금부 청사 터로 추정되는 건물 기초 구조물과 인장이 새겨진 기와 35점이 출토되어 국가귀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8. 왜 종로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다른가

서울 25개 구 중 종로구 문화재 발굴조사가 유독 특별 취급을 받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역사가 깊다는 이유가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이유들이 있다.

첫째, 대지 밀도다. 15,486필지라는 압도적인 대지 수는 지하 전역에 조선시대 생활 유구가 분포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어느 지점을 파더라도 뭔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종로구 소재 지하철 공사, 건물 신축 공사 현장에서는 거의 매번 유물이 출토되어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둘째, 외국인 소유 토지의 복층 역사성이다. 일본인 641필지, 서양인 23필지라는 기록은 이 지역이 근대 개화기 유물과 조선시대 유물이 한 층에 혼재하는 복층 발굴 지점임을 시사한다. 한 구덩이에서 조선 백자와 19세기 독일제 도자기가 함께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사사지의 존재다. 269,353㎡의 사사지는 향후 종교 문화재 발굴의 핵심 거점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관사·선교사 거주지·사찰 등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국가 사적 지정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들이 종로구를 조사할 때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1912년 토지 기록이다. 지표면의 흔적이 사라진 지금, 100년 전 기록이 곧 발굴의 나침반이 된다. seoulheritage.org가 이 방대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종로구 도심 발굴 현장. 현대 빌딩 지하에서 조선시대 유구가 발견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4단계: ① 지표조사(문헌분석·현장답사) → ② 시굴조사(소규모 굴착 확인) → ③ 표본조사(유구 범위 파악) → ④ 전면 발굴조사(정밀 기록·수습). 1912년 토지 기록은 이 모든 단계의 출발점이 되는 기초 데이터다.

9. 마무리 — 역사의 층위 위에서

오늘날 종로구를 걷는다는 것은, 수천 년의 역사 위를 걷는 것이다. 경복궁 담장 아래 보도블록 아래에는 조선 궁궐의 기초가, 인사동 찻집 지하에는 조선 후기 상인의 창고 흔적이, 광화문 광장 지하에는 육조 관청의 잔해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1912년 토지조사부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숫자로 알려준다. 17,740필지 중 15,486필지가 사람이 살던 집터였다는 것, 27개 성씨의 수천 가구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641명의 일본인이 이미 이 땅의 한 귀퉁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종로는 지금도 살아있다. 하지만 그 살아있음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만의 것이 아니다. 수백 년의 겹겹이 쌓인 삶들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 무게를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

"종로의 돌 하나하나에는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김씨, 이씨, 민씨, 홍씨—그리고 이름 없이 살다 간 수만 명.우리가 역사를 파는 것은과거를 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그 이름들을 다시 부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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