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23필지의 충격적 기록
- 5월 31일
- 7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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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이 성북구 땅을 직접 소유했다 —1912년 성북구, 왕실과 민중과 이방인의 땅
서울 성북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23필지의 충격적 기록

▲ 창덕궁은 성북구 95필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다. 왕실의 손길이 궁궐 담장 너머 성북 땅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1912년 성북구 땅의 일부는 '창덕궁' 명의였다. 왕조가 무너진 지 2년이 지난 뒤에도.
이 시리즈 일곱 편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한 줄이 여기 있다. 1912년 성북구에 창덕궁 소유의 토지가 95필지.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끝나고, 고종과 순종이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창덕궁 명의의 토지가 성북구 한 복판에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것도 95필지나. 그리고 손씨(孫氏)가 4위 성씨로 152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프랑스인이 4필지를 쥐고 있었다는 사실. 3,023필지의 성북구는 왕실과 집성촌과 이방인의 역사가 한 데 뒤섞인 땅이었다.
목차
1.1912년 성북구의 규모 — 북악산 자락의 농경 도시
2.밭 1,387필지와 논 728필지 — 농경이 지배한 성북의 땅
3.창덕궁 소유 95필지 — 이 시리즈 최대 발견
4.손씨(孫氏) 152필지 — 성북을 지킨 집성촌의 이야기
5.프랑스인 4필지 — 선교사들이 성북에 남긴 흔적
6.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 — 수탈의 그림자
7.분묘지·사사지·임야 — 성북의 숨겨진 공간들
8.왜 성북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특별한가
9.마무리 — 왕실의 땅 위에서
1. 1912년 성북구의 규모 — 북악산 자락의 농경 도시
성북구는 지형적으로 독특하다. 북악산과 북한산의 남쪽 사면을 따라 형성된 이 지역은, 한쪽은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중랑천 지류를 따라 내려오는 농경 계곡이다. 궁궐과 산림, 그리고 논밭이 공존하는 독특한 지형이 1912년 성북구를 만들었다.
3,023
총 필지 수
중랑구와 비슷한 규모
612만
총 면적 (㎡)
여의도 약 2.1배
2,025㎡
필지당 평균
중간 규모 농촌형
창덕궁
특수 소유자
이 시리즈 유일
3,023필지, 6,122,768㎡. 필지당 평균 2,025㎡로, 중랑구(2,643㎡)보다는 작고 종로구(603㎡)보다는 훨씬 넓다. 산지와 평지가 혼재하는 지형 특성상 필지 크기의 편차가 컸을 것이다. 산 아래 좁은 계곡 논밭은 작은 필지로, 넓은 평지에 위치한 왕실 소유지는 큰 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seoulheritage.org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데이터에서 창덕궁 명의 소유 토지가 기록된 구는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성북구가 유일하다. 궁궐 소유 토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왕실 관련 유적 추정지'로 분류되어 최고 등급의 조사 우선순위가 부여된다.
2. 밭 1,387필지와 논 728필지 — 농경이 지배한 성북의 땅
성북구의 토지 구성을 먼저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밭과 논을 합치면 2,115필지로 전체의 70%에 달한다. 여기에 대지(795필지)까지 더하면 93%가 농경·주거 용지였다. 성북구는 1912년 기준으로 전형적인 도시 외곽 농촌 지대였다.
밭
1,387필지 · 44.7%
논
728필지 · 40.8%
대지
795필지 · 8.3%
임야
70필지 · 3.2%
분묘지
19필지 · 1.1%
잡종지
10필지 · 1.5%
밭 1,387필지 2,737,761㎡는 성북구 전체 면적의 44.7%를 차지한다. 북악산과 북한산 남사면의 완만한 구릉지를 따라 층층이 형성된 계단식 밭들이 성북구의 주된 풍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릉동·길음동·종암동 일대 구릉 지형에 이 밭들이 분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 북악산·북한산 남사면을 따라 펼쳐진 성북구의 밭과 논. 1,387필지의 밭이 산기슭 구릉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논 728필지 2,499,842㎡는 성북천(정릉천·성북천)을 따라 형성된 계곡 저지대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성북천 복개 구간 아래, 길음뉴타운 개발 이전의 저지대 논이 이 728필지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을 이용한 계곡 논농사가 성북구 농업의 핵심이었다.
"북악산 물이 내려와 성북 논을 적시고, 다시 중랑천으로 빠져나갔다. 728필지의 논은 그 물길이 만들어준 생명의 공간이었다."
3. 창덕궁 소유 95필지 — 이 시리즈 최대 발견
이 장은 반드시 천천히 읽어야 한다. 1912년 성북구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소유자 항목 중 '창덕궁(昌德宮)'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단 하나의 구역이 아니라, 무려 95필지에 걸쳐서.
1912년 성북구 특수 소유자 기록
창덕궁 소유 95필지
조선왕조 공식 종말 2년 후에도, 왕실의 이름이 성북구 땅에 살아있었다
이 시리즈 7편 전체(중랑·종로·용산·강일동·양천·성북)를 통틀어 궁궐 명의 토지가 등장하는 것은 성북구가 유일하다
창덕궁 소유 95필지를 이해하려면 1912년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공식 소멸했지만, 일제는 구 왕실을 즉각 해산하지 않았다.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어 창덕궁에 남았고, 조선 왕실의 재산 일부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통해 관리되었다. 창덕궁 명의 토지 95필지는 이 이왕직 관리 하에 놓인 구 왕실 재산의 흔적이다.
역사적 맥락
창덕궁과 성북구의 연결 고리
창덕궁은 조선 후기 사실상의 정궁(正宮)이었다. 창덕궁 후원(비원)은 성북구와 맞닿아 있었고, 왕실은 인근 성북 지역 농경지를 궁궐 운영을 위한 직영 농지(내수사 소속 둔전)로 활용했다. 95필지는 이 왕실 직영 농지의 1912년 시점 잔존분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왕실이 일군 성북 땅이, 나라가 망한 뒤에도 2년 더 '창덕궁'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창덕궁 소유 95필지의 위치는 지금의 성북동, 삼청동 방면과 연결되는 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95필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최고 등급의 조사 우선순위가 부여된다. 왕실 직영 농지에는 농업 시설 외에도 왕실 관련 의례 공간, 관리 시설, 창고 등의 유구가 함께 분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성공 사례: 2019년 성북구 성북동 일대 도시재생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 중 조선 후기 내수사(內需司) 관련 기와 및 토기 편이 다수 발견되어 정밀 시굴조사로 이어졌다. 조선 왕실 소속 관리 시설 터로 추정되는 기초 구조물 일부가 확인되어 향후 발굴조사 대상지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소유 95필지는 이런 유형의 발굴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은 구역이다.
4. 손씨(孫氏) 152필지 — 성북을 지킨 집성촌의 이야기
이 시리즈에서 4위 성씨는 항상 의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중랑구의 윤씨, 양천구의 원씨, 그리고 성북구에서는 손씨(孫氏)가 152필지로 4위를 기록했다.
1김씨490필지
2이씨356필지
3윤씨156필지
4★손씨152필지
5최씨127필지
★ 성북구 특유의 집성촌 흔적
손씨(孫氏) 152필지 — 경주 손씨의 성북 세거
손씨는 전국 단위 인구 분포에서 상위 성씨가 아님에도 성북구에서 152필지로 4위를 기록했다. 이는 성북 지역에 손씨 집성촌이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경주 손씨를 포함한 손씨 가문은 조선시대 성북천 상류 일대에 세거지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터에는 조선시대 종가 기초, 묘비, 공동 우물 등 집성촌 관련 유구가 남아 있을 것이다.

▲ 성북구 손씨 152필지의 배경에는 산기슭에 뿌리 내린 집성촌이 있었다. 조선시대 내내 성북 땅을 지켜온 가문의 흔적이 지하에 새겨져 있다
성북구 3위에 오른 윤씨(156필지)도 눈여겨봐야 한다. 윤씨는 중랑구에서도 4위를 기록한 바 있다(212필지). 두 인접 구역에서 윤씨가 상위 성씨로 등장한다는 것은, 윤씨 가문이 서울 동북부 일대에 광범위한 세거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해평 윤씨나 파평 윤씨 같은 명문 윤씨 가문의 세거지 중 하나가 이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을 검토해볼 수 있다.
5. 프랑스인 4필지 — 선교사들이 성북에 남긴 흔적
종로구에도 프랑스인 10필지가 있었고, 용산구에도 프랑스인 5필지가 있었다. 그리고 성북구에도 4필지의 프랑스인 소유 토지가 기록되어 있다. 세 구에 걸쳐 프랑스인 토지가 이어지는 이 패턴에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1831년 조선에 처음 발을 들인 프랑스 천주교 선교 조직이다. 수십 년의 박해를 견디며 조선 전역에 선교망을 구축한 이 기관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공식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면서 서울 각지에 선교 부지를 확보했다. 종로구·용산구·성북구에 걸쳐 등장하는 프랑스인 토지는 대부분 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성당, 학교, 선교사 주거지 부지였을 것이다.

▲ 성북구 프랑스인 4필지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성당·학교 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산기슭에 자리한 이 이국적인 공간이 지금도 지하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다
성북구의 프랑스인 4필지는 지금의 혜화동·성북동 방면의 선교 관련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성북구 내에는 일제강점기에도 명맥을 이어온 천주교 성당들이 있으며, 그 부지의 역사적 기원이 이 4필지와 연결될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구역은 개화기 서양 건축 유구와 종교 유물 발굴의 핵심 거점으로 분류된다.
🔍시리즈 프랑스인 소유 패턴: 종로구 10필지(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명동성당 관련) → 용산구 5필지(용산 성당·선교사 거주지) → 성북구 4필지(성북동·혜화동 방면 선교 부지). 이 세 지점을 연결하면 1910년대 서울 천주교 선교 네트워크의 공간 지도가 완성된다.
6. 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 — 수탈의 그림자
창덕궁 95필지의 빛나는 역사 옆에, 어두운 숫자가 나란히 서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
🏯
창덕궁 소유
95 필지
🏛️
국유지
140 필지
🏭
동양척식주식회사
123 필지
🏢
법인 소유
62 필지
🗾
일본인
53 필지
🇫🇷
프랑스인
4 필지
🏘️
마을 소유
25 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는 중랑구(997필지), 용산구(176필지) 다음으로 이 시리즈에서 세 번째로 많은 척식회사 소유 토지다. 1912년은 척식회사 설립(1908년) 이후 불과 4년이 지난 시점임에도 성북구에 123필지를 이미 확보했다는 것은, 창덕궁 후원과 인접한 이 땅의 전략적 가치를 일제가 빠르게 간파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창덕궁 소유 95필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가 같은 성북구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토지와 일제 수탈 기관의 토지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이 긴장 관계. 그 경계선 어딘가에 1910년대 성북구의 가장 극적인 역사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중랑구
997
척식 필지
용산구
176
척식 필지
성북구
123
척식 필지
양천구
6
척식 필지
종로구
0
척식 필지
일본인 개인 소유 53필지도 주목할 만하다. 용산구(883필지), 종로구(641필지)에 비하면 적지만, 중랑구(1필지)·강일동(0필지)·양천구(3필지)와 비교하면 상당한 규모다. 북악산 자락의 쾌적한 자연환경을 선호한 일본인들이 성북 구릉지에 별장이나 주거지를 확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7. 분묘지·사사지·임야 — 성북의 숨겨진 공간들
성북구의 나머지 토지 유형들도 저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필지
분묘지
68,387㎡
9필지
사사지
13,699㎡
70필지
임야
197,514㎡
5필지
연못(지소)
5,811㎡
분묘지 19필지 68,387㎡는 성북구 곳곳 구릉지에 산재한 묘지 구역이다. 필지당 평균 3,599㎡로, 이 시리즈 중 가장 넓은 평균 분묘 면적이다. 이는 성북구의 분묘지가 소규모 가족 묘가 아니라 씨족 집단의 대규모 선산(先山)이었음을 의미한다. 김씨·이씨·윤씨·손씨 등 주요 성씨들의 집안 묘역이 이 19필지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넓은 씨족 선산에는 비석·석물·묘비·상석 등 석제 문화재가 풍부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사지 9필지 13,699㎡는 성북구 내 사찰과 종교 시설 부지다. 현재 성북구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사찰들이 여럿 있다. 북한산 자락을 따라 형성된 이 사찰들의 1912년 시점 기록이 바로 이 9필지다. 사찰 부지는 불상·기와·동종·불교 의례 유물 등 종교 문화재 발굴의 핵심 지점이다.
임야 70필지 197,514㎡는 북악산과 북한산 남사면의 산림 지대다. 연못(지소) 5필지 5,811㎡는 성북천 상류 계곡에 형성된 자연 못으로,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거나 소멸했을 것이다. 잡종지 10필지 90,370㎡는 성북구 특유의 복합 토지로, 궁궐 관련 부지나 하천 관리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8. 왜 성북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특별한가

▲ 1912년 성북구는 왕실의 땅(창덕궁 95필지), 수탈의 땅(척식회사 123필지), 민중의 땅(김씨·이씨 등 개인 소유지)이 공존하는 복잡한 공간이었다
성북구 문화재 발굴조사가 서울의 다른 어느 구보다 특별한 이유는 '층위의 복잡성'에 있다. 단순히 조선시대 유구가 있는 게 아니라, 창덕궁 직영 농지 유구와 집성촌 유구와 프랑스 선교 시설 유구와 일제 수탈 흔적이 한 땅 위에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덕궁 소유 95필지 구역에서는 왕실 관련 기와, 의례 용기, 관리 시설 기초 등이 출토될 수 있다. 손씨 집성촌 추정 구역에서는 조선 중·후기 가옥 기초와 생활 유구가 기대된다. 프랑스인 4필지 구역에서는 개화기 서양식 건축 기초와 이국적 생활 유물이 나올 수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 인근에서는 일제강점기 농업 수탈 관련 시설 흔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4단계 — 성북구 적용: ① 지표조사에서 창덕궁 소유 95필지 위치를 고지도·지적도와 대조 분석 ② 해당 구역 시굴조사에서 왕실 관련 유구 층위 확인 ③ 표본조사로 집성촌·선교 부지 구역 병행 검토 ④ 전면 발굴조사 및 국가귀속 절차. 이 4단계가 성북구 발굴의 표준 흐름이다.

▲ 성북구 발굴 현장. 창덕궁 왕실 층위와 집성촌 민가 층위, 개화기 선교 시설 층위가 한 단면에 중첩되는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발굴지다
9. 마무리 — 왕실의 땅 위에서
1912년 성북구. 3,023필지의 땅 위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뒤섞여 있었다. 창덕궁 95필지의 왕실 기억, 손씨 152필지의 집성촌 역사, 프랑스인 4필지의 이방인 발자국, 동양척식주식회사 123필지의 수탈 흔적.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 1,387필지의 밭과 728필지의 논을 일군 이름 없는 농민들이 있었다.
지금 성북구를 걷는다는 것은, 조선 왕실의 기억 위를 걷는 것이다. 성북동 주택가 어느 골목, 길음뉴타운 어느 단지, 정릉 어느 아파트 아래에 창덕궁이 직접 관리하던 땅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 흔적을 꺼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시굴조사이고, 발굴조사다.
1912년의 기록 한 줄, '창덕궁 소유'. 나라가 망한 뒤에도 2년 더 버틴 그 이름이 성북구 토지조사부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울컥하게 만든다.
🏯
"나라는 무너졌지만창덕궁 이름은 95필지 땅에 살아있었다.손씨가 일군 밭,프랑스 신부가 기도한 언덕,이름 없는 농부가 씨 뿌린 논—성북구의 흙은그 모든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그 흙을 파는 것은잊혀진 이름들에게다시 자리를 돌려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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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농촌 논밭) → 종로구(왕도 대지) → 용산구(군사도시 철도) → 강일동(국유지 밭) → 양천구(한강 논농사·수도용지) → 성북구(창덕궁 소유지)까지, 서울 6곳의 전혀 다른 1912년을 함께 읽어보세요. 서울 25개 구 전체 데이터는 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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