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6,077필지의 충격적 진실
- 6일 전
- 8분 분량
문화재 발굴조사지표조사시굴조사서울 용산구1912년 토지조사철도용지근대 군사도시문화유산
기차가 달리고 군대가 주둔하던 그 땅,1912년 용산구는 어떤 모습이었나
서울 용산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6,077필지의 충격적 진실

▲ 1912년 용산구에는 1,724,715㎡에 달하는 철도용지가 있었다. 전체 면적의 15%가 기차와 군사 시설을 위한 땅이었다
이 땅의 15%는 기차를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는 점령군을 위한 것이었다.
용산. 지금은 대통령실과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용산 공원이 들어선 서울의 핵심 공간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이야기는 훨씬 더 충격적이다. 1912년 용산구에는 무려 1,724,715㎡의 철도용지가 있었다. 전체 면적 11,528,600㎡의 15%가 오직 철도를 위한 땅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은 883필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거기에 미국인 13필지, 프랑스인 5필지, 중국인 5필지까지.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용산은 이미 1912년에 국제 각축장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지금 당신이 걷는 이태원 거리, 한강진역 플랫폼, 국립중앙박물관 정원 아래 이 모든 역사가 켜켜이 묻혀 있다.
목차
1.1912년 용산구, 그 규모와 특수성을 먼저 읽자
2.철도용지 1,724,715㎡ — 제국의 핏줄이 뚫린 자리
3.대지 4,046필지 — 도시와 군사기지가 공존하다
4.밭·논·분묘지 — 군사도시 속 민중의 삶
5.잡종지·임야·사사지·연못 — 용산의 숨겨진 지형
6.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7개 성씨의 땅
7.일본인·미국인·유럽인 — 외국인이 점령한 용산
8.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국유지 — 수탈 구조의 민낯
9.왜 용산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특별한가
10.마무리 — 상처받은 땅이 기억하는 것들
1. 1912년 용산구, 그 규모와 특수성을 먼저 읽자
용산구는 서울의 다른 어느 구와도 다른 성격을 가진 땅이다. 한강이 북쪽 경계를 이루고, 남산이 동북쪽에 자리하며, 지형 자체가 방어와 물자 수송에 유리한 구조다. 조선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였던 이 땅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그 성격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6,077
총 필지 수
중랑구의 1.5배
1,152만
총 면적 (㎡)
여의도 약 4배
11종
토지 유형
철도용지 포함
5개국
외국인 소유 국적
미국·일본 등
6,077필지에 면적은 11,528,600㎡. 종로구(10,692,507㎡)보다 오히려 넓다. 그러나 필지 수는 종로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용산구의 필지들은 평균적으로 매우 크다는 것.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1,897㎡로 종로구(603㎡)의 3배가 넘는다. 작은 가정집보다 광대한 군사 시설, 철도 부지, 대형 관청 건물이 용산구 토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seoulheritage.org는 1912년 용산구 토지 데이터를 문화재 발굴조사 기초 자료로 분석 중이다. 특히 철도용지와 군사 시설 부지의 지하 구조물, 근대 산업 유물에 대한 시굴조사 가이드라인 수립에 이 데이터가 핵심적으로 활용된다.
2. 철도용지 1,724,715㎡ — 제국의 핏줄이 뚫린 자리
이것이 용산구를 다른 모든 서울의 구와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숫자다. 단 7필지가 1,724,715㎡를 차지하고 있었다. 필지당 평균 246,388㎡, 약 74,500평이다. 이 압도적인 크기의 땅덩어리가 용산구 전체 면적의 무려 15%를 차지하며 이 도시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다.
1912년 용산구 철도용지
1,724,715 ㎡
전체 면적의 15.0% · 단 7필지
필지당 평균 246,388㎡ — 여의도 면적의 85%에 해당하는 땅 하나
1899년 경인선을 시작으로,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용산은 한반도 철도망의 중심 허브로 급부상했다. 일제는 용산에 광대한 철도 조차장(操車場), 기관차 수리 공장, 화물 창고, 철도병원, 철도 직원 숙사를 집중 배치했다. 지금의 용산 전자상가와 국립중앙박물관 일대가 바로 이 광대한 철도 부지 위에 세워진 것이다.

▲ 용산 일대는 일제의 조선 주둔군 사령부가 자리한 군사 거점이었다. 그 광대한 부지가 1912년 토지조사부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철도용지 7필지 중 일부는 당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경부선·경의선 분기점 일대이고, 나머지는 용산 철도 조차장(지금의 용산 전자상가~효창동 방향)으로 추정된다. 이 7필지의 지하에는 일제강점기 근대 산업 유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주춧돌, 레일 기초, 배수 시설, 당시 수입 기계 부품 등 근대 문화재의 보고(寶庫)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용산 철도 부지는 현재 서울시 도시재생사업 및 용산공원 조성 과정에서 대규모 문화재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가 진행 중인 핵심 대상 지역이다. 근대 산업 유적으로서의 가치 평가가 문화재 발굴 기관들의 주요 과제가 되고 있다.
3. 대지 4,046필지 — 도시와 군사기지가 공존하다
철도용지와 함께 용산구를 규정하는 또 다른 숫자는 대지 4,046필지, 4,515,990㎡다. 전체 필지의 66.6%, 면적의 39.2%가 사람이 살고 건물이 들어선 땅이었다. 종로구(87.3%)보다는 훨씬 낮지만, 중랑구(12.7%)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도시화된 공간이었다.
대지 필지 수
4,046필지
전체의 66.6%
대지 면적
4,515,990㎡
전체의 39.2%
4,046개의 집터. 하지만 이 대지들의 성격은 종로구의 조선 왕조 민가와는 완전히 달랐다. 용산구의 대지는 크게 세 가지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마을의 민가, 둘째는 일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 이주 정착촌, 셋째는 철도 건설과 군사 시설 운영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관리인들의 주거지였다. 한 구역 안에 이 세 가지 층위가 뒤섞인 것이 1912년 용산구 대지의 진짜 모습이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 4,046필지는 매우 복잡한 발굴 지도를 예고한다. 조선 후기 민가 유구 아래에 일제강점기 군사 시설 기초가 덮인 이중 구조,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층위별 정밀 시굴조사가 용산구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다.
4. 밭·논·분묘지 — 군사도시 속 민중의 삶
군사 시설과 철도가 지배하는 용산구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밭을 일구고, 논에서 벼를 키우고, 죽어서 묻혔다. 그 흔적이 숫자로 남아 있다.
대지
4,046필지
밭
1,595필지
철도용지
7필지
분묘지
126필지
잡종지
87필지
임야
51필지
논
108필지
밭 1,595필지 3,768,711㎡는 용산구 전체 면적의 32.7%에 해당한다. 지금의 이태원동, 보광동, 청파동, 원효로 일대의 완만한 구릉지에 밭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군사 시설과 철도가 지배하는 공간 사이사이로 여전히 조선 농민들의 손길이 닿은 밭고랑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의 분열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한강을 끼고 있는 용산구에는 논 108필지와 연못 6필지가 있었다. 강변 저지대를 따라 형성된 습지 농경지의 흔적이다
논 108필지 279,921㎡는 한강 주변 저지대와 용산천 주변 습지에 형성된 벼농사 지대였을 것이다. 중랑구(1,251필지)나 다른 농촌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108필지의 논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용산구의 이중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분묘지 126필지 221,091㎡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숫자 중 하나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1,754㎡로, 중랑구(1,780㎡)와 거의 비슷하다. 126개의 묘지 구역이 용산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는 것은, 군사 시설이 들어서기 전 이 땅에 대규모 민간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집성촌 묘지, 사대부 가문 산소, 이름 없는 평민들의 무덤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이 분묘 지역들은 문화재 시굴조사에서 최우선 검토 대상이 된다.
🚨중요 발굴 지점: 126필지 분묘지 중 상당수는 일제 군사 시설 조성 과정에서 강제 이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장 과정에서 부장품 일부가 남겨졌을 수 있어, 분묘 추정 위치의 정밀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강조한다.
5. 잡종지·임야·사사지·연못 — 용산의 숨겨진 지형
용산구의 토지 유형 중 잡종지 87필지 603,437㎡는 특별한 관심을 받아야 한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약 6,936㎡로, 종로구 잡종지(1,119㎡)의 6배가 넘는다. 이 광대한 잡종지는 무엇이었을까.
87필지
잡종지
603,437㎡
51필지
임야
357,565㎡
18필지
사사지
16,178㎡
6필지
연못(지소)
19,487㎡
잡종지 603,437㎡는 당시 일본군 주둔지 부속 시설, 군사 훈련장, 창고, 하수처리장 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공간들은 현재 용산 미군기지(캠프 킴·용산 기지) 반환 부지와 상당 부분 겹칠 것으로 추정된다. 용산 기지 반환 이후 진행 중인 용산공원 조성 과정에서 이 잡종지 구역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임야 51필지 357,565㎡는 지금의 남산 북쪽 사면과 용산구 동쪽 완만한 구릉지에 해당할 것이다. 사사지 18필지 16,178㎡는 용산구 내 사찰과 신사 부지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사찰과 일제가 새로 세운 신사가 공존했던 공간으로, 종교 문화재 발굴의 잠재 지점이 된다.
연못(지소) 6필지 19,487㎡는 한강 지류와 용산천 주변에 형성된 자연 연못이었을 것이다. 이 연못 지역들은 유기물 보존 조건이 우수하여 목제 유물이나 생활 유물이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어 발굴조사 기관들이 특히 주목한다.
도로 33필지 21,500㎡도 기록에 남아 있다. 필지당 651㎡의 도로 부지는 당시 용산 내부를 잇는 군용 도로와 주요 간선 도로의 흔적이다. 지금도 이태원로, 한강대로 등 용산구의 주요 도로들이 1912년 도로 기록과 상당히 겹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 126필지 분묘지. 군사 시설이 들어서기 전 용산구 곳곳 구릉지에는 수많은 선조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7개 성씨의 땅
종로구(27개 성씨)와 비교하면 용산구의 성씨 다양성은 훨씬 제한적이다. 주요 기록에 이름을 올린 성씨는 7개에 불과하다. 군사 시설과 철도 부지가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개인 소유 토지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1김씨1,058필지
2이씨707필지
3박씨378필지
4최씨217필지
5정씨165필지
6유씨114필지
7조씨105필지
김씨 1,058필지, 이씨 707필지로 두 성씨가 압도적인 1·2위를 지킨다. 용산구에서 눈에 띄는 것은 6위 유씨(114필지)의 존재다. 유씨는 전국적으로 희귀한 성씨는 아니지만, 용산구에서 100필지 이상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유씨 관련 세거지(世居地)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용산 일대는 조선시대 유명한 무인 가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단 7개 성씨만 기록된 용산구의 개인 토지. 그 너머에는 철도와 군대의 이름으로 이미 빼앗겨버린 수천 가족의 삶이 있었다."
7개 성씨의 개인 소유 토지를 모두 합하면 약 2,744필지. 용산구 전체 6,077필지의 45%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 55% 이상의 토지는 철도용지, 일본인 소유지, 국유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지, 외국인 소유지로 이미 잠식되어 있었다. 이것이 1912년 용산구의 잔혹한 현실이었다.
7. 일본인·미국인·유럽인 — 외국인이 점령한 용산
용산구의 외국인 토지 소유 구조는 종로구와는 또 다른 충격을 준다. 종로구가 서양 4개국 + 일본 + 중국의 다국적 구조였다면, 용산구는 일본의 압도적 지배 하에 미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는 구조였다.
🇯🇵
일본인
883 필지
🇺🇸
미국인
13 필지
🇨🇳
중국인
5 필지
🇫🇷
프랑스인
5 필지
일본인 883필지. 용산구 전체 필지의 14.5%가 일본인 개인 소유였다. 이것은 중랑구(1필지), 종로구(641필지)와 비교해도 단연 압도적이다. 용산에 일본군 사령부가 위치했고, 일본인 이주자들이 집단으로 정착한 '일본인 촌락'이 이태원 일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 많은 부지가 1912년 이미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 용산 이태원 일대는 1912년 이미 일본인 883필지, 미국인 13필지가 공존하는 다국적 공간이 되어 있었다
미국인 13필지는 종로구(0필지)에는 없던 새로운 존재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서울에 자리 잡은 미국 선교사와 외교관들의 토지로 보인다. 용산구 내 미국인 소유 토지는 당시 선교 병원, 학교 부지, 선교사 거주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 된 의료 시설이나 YMCA 관련 부지가 이 13필지 안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인 5필지는 가톨릭 선교 관련 부지로, 용산 성당(現 원효로 천주교회 일대)이나 파리 외방전교회 소유 토지였을 것이다. 중국인 5필지는 청나라 상인들의 흔적이다. 이 외국인 소유 토지들은 개화기 근대 유물 발굴의 핵심 거점으로서, 문화재 지표조사 시 반드시 별도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구역이다.
🔍흥미로운 비교 — 종로구 vs 용산구 일본인 소유: 종로구 641필지, 용산구 883필지. 용산구의 일본인 장악이 더 강했다. 이는 군사 주둔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이주 패턴이 왕도(王都) 종로보다 군사 거점 용산에서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다.
8.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국유지 — 수탈 구조의 민낯
개인 소유와 외국인 소유 외에, 용산구 토지를 잠식한 또 다른 주체들이 있었다.
국유지 320필지
조선총독부 명의 국유지. 조선 왕실 소유 토지와 관청 부지가 일제에 의해 국유화된 것. 용산 일대 왕실 소유 별장, 창고, 군기시 관련 토지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76필지
중랑구(997필지)에 비해 적지만 여전히 상당한 규모. 용산 일대 농경지와 주거지를 잠식한 척식 토지들. 한강 주변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집중 배치되었을 것이다.
마을 소유 37필지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던 마을 공유지. 공동 우물, 마을 제당(祭堂), 공동 경작지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법인 소유 147필지
각종 회사, 금융기관, 선교 단체, 병원 등 법인 명의 토지. 용산 철도 관련 기업, 조선식산은행 등이 주요 소유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유지 3필지
극소수에 불과한 공유지. 조선 공동체 자산이 얼마나 빠르게 해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숫자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76필지를 단순히 '적다'고 볼 수 없다. 용산구의 비옥한 한강 변 농경지와 전략적 위치의 토지들이 이 176필지 안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유지 320필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176필지, 일본인 개인 소유 883필지를 합하면 무려 1,379필지가 일제와 연결된 소유 구조 안에 있었다. 전체 6,077필지의 22.7%에 해당한다.
9. 왜 용산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특별한가
서울에서 용산구만큼 문화재 발굴조사가 복잡하고 민감한 구역은 없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조선시대 민간 유구, 일제 군사 시설 유적, 미군기지 근대 산업 유산이 한 땅 위에 수직으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첫째, 철도용지의 근대 산업 문화재 가능성이다. 1,724,715㎡의 철도 부지 지하에는 용산 철도 조차장 기초 구조물, 일제강점기 기관차 격납고 흔적, 철도 관련 각종 생활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은 근대 문화재로서 전혀 다른 각도의 발굴 방법론을 요구한다.
둘째, 미군기지 반환 부지의 복합 층위 문제다. 현재 진행 중인 용산공원 조성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단계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유구 위에 일제 군사 시설 기초가, 그 위에 미군기지 현대 구조물이 겹쳐진 3중 층위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성공 사례: 2022년 용산구 효창동 일대 재개발 부지 시굴조사에서 1912년 분묘지 기록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지점에서 조선 말기 도자기 편 및 목제 관(棺) 잔편이 출토되어 발굴조사로 전환, 국가귀속문화재 23점이 수습되었다. 1912년 토지 기록이 127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있는 발굴 지침서가 된 것이다.

▲ 용산구 발굴 현장의 지층은 조선시대·근대·현대의 세 역사가 한 단면에 담긴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문화재 발굴지다
셋째, 분묘지 126필지의 문화재 가치다. 이미 언급했듯, 군사 시설 조성 과정에서 강제 이장된 묘들의 흔적이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조선 말기 무인 가문 묘소의 경우 검·갑옷·도자기 등 고가 부장품이 포함될 수 있어 문화재 발굴 기관들의 주요 조사 대상이 된다.
10. 마무리 — 상처받은 땅이 기억하는 것들
1912년 용산구는 아름다운 땅이 아니었다. 기차가 달리고 군대가 주둔하고 외국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의 밭은 철도 부지에 잠식되었고, 선조들의 묘는 군사 훈련장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용산구의 땅은 더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상처받은 땅이 더 진한 역사를 품는다. 철도 부지 아래에는 최초의 근대 노동자들이 흘린 땀이 있고, 분묘 자리에는 이름 없이 살다 간 용산 사람들의 숨결이 있으며, 7개 성씨의 2,744필지에는 빼앗기지 않으려 버텼던 조선 민중의 끈질긴 삶이 있다.
지금 용산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100년 넘게 군사 시설로 막혀 있던 이 땅이 마침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 바로 체계적인 문화재 발굴조사다. 김씨 1,058필지, 이씨 707필지, 박씨 378필지 — 그 이름들이 기억하는 이 땅의 진짜 이야기를 우리는 반드시 파내야 한다.
🌏
"기차가 달리고 군대가 주둔해도,땅은 잊지 않는다.126개의 묘와 1,595개의 밭,그리고 수천 가족의 이름—용산은 지금도 그 이름들을흙 속 깊이 품고 있다.우리가 삽을 드는 것은,그 이름들에게 답하기 위해서다."
📣 지금 바로 확인해볼 수 있는 것들
용산공원 조성과 함께 진행되는 문화재 조사 현황은 문화재청(khs.go.kr)과 서울시 문화유산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12년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 전 구역 토지 데이터는 seoulheritage.org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이 글이 흥미로웠다면 우리 동네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과 함께 나눠보세요.
본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SEO 키워드: 문화재 발굴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용산구 문화재 · 서울 문화유산 · 1912년 토지조사 · 발굴조사 기관 · 철도용지 · 용산공원 문화재 · 근대 산업 유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