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978필지의 비밀
- 5월 31일
- 7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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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이 절반, 잡종지가 절반 —1912년 양천구는 한강이 만든 땅이었다
서울 양천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1,978필지의 비밀

▲ 1912년 양천구 전체 면적의 29.7%가 논이었다. 844필지 3,271,852㎡ — 한강이 만들어준 비옥한 충적 평야가 양천구를 서울 최대의 논농사 지대로 만들었다
지금 목동 아파트 단지 아래, 한강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논이 있었다.
양천구. 지금은 목동 신도시와 한강공원, 올림픽대로로 유명한 현대적 주거 지역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1,978필지에 펼쳐진 11,020,849㎡의 땅 중, 절반 가까이가 논과 밭이었다. 844필지의 광활한 논, 809필지의 밭이 한강 변 충적 평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숫자가 여기에 있다. 잡종지 182필지 5,319,316㎡. 전체 면적의 48.3%가 정체불명의 '잡종지'였다. 그리고 4위 성씨가 '원씨(原氏)'라는 사실. 이 두 가지 미스터리를 풀면, 1912년 양천구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목차
1.1912년 양천구의 규모 — 한강이 만든 평야 도시
2.논 844필지의 압도 — 서울에서 가장 많은 논이 있던 곳
3.잡종지 5,319,316㎡의 미스터리 — 전체의 48%는 무엇이었나
4.수도용지 8필지 — 근대 상수도 시설의 첫 흔적
5.원씨(元氏) 197필지 — 양천의 뿌리를 찾아서
6.소유 구조 — 일본인 3필지와 척식회사 6필지의 의미
7.왜 양천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독특한가
8.마무리 — 한강이 기억하는 논의 역사
1. 1912년 양천구의 규모 — 한강이 만든 평야 도시
양천구를 이해하려면 먼저 지형을 이해해야 한다. 한강이 서쪽으로 흘러가며 수천 년 동안 퇴적시킨 충적 평야 위에 놓인 이 땅은, 서울의 다른 어느 구보다도 '물과 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공간이다. 1,978필지라는 필지 수는 서울 25개 구 중 상당히 적은 편에 속하지만, 면적 11,020,849㎡는 여의도의 약 3.8배에 달한다.
1,978
총 필지 수
중랑구의 절반 수준
1,102만
총 면적 (㎡)
여의도 약 3.8배
5,571㎡
필지당 평균
서울 구 중 최대급
8종
토지 유형
수도용지 포함
필지당 평균 면적 5,571㎡는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구들 중 가장 넓다. 종로구(603㎡), 중랑구(2,643㎡), 용산구(1,897㎡)와 비교하면 압도적이다. 작은 필지 수에 넓은 면적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양천구의 토지가 소규모 가족 단위로 쪼개지지 않고 대규모 단위로 관리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 잡종지의 비밀이 있다.
💡seoulheritage.org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양천구는 한강 변 충적층 특성상 논 유구와 수리 시설 유적의 보존 가능성이 높다. 특히 844필지에 달하는 논의 지하에는 조선시대와 그 이전 시기의 논둑, 용수로, 물막이 시설 유구가 층위별로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논 844필지의 압도 — 서울에서 가장 많은 논이 있던 곳
844필지 3,271,852㎡의 논. 이 숫자의 규모를 제대로 실감하려면 다른 구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중랑구 논
1,251필지
4,725,941㎡
종로구 논
23필지
104,212㎡
양천구 논
844필지
3,271,852㎡
필지 수로는 중랑구(1,251필지)가 더 많지만, 양천구 논은 필지당 평균 면적이 3,877㎡로 중랑구(3,778㎡)보다 오히려 더 넓다. 즉, 양천구의 논 한 뙈기 한 뙈기가 중랑구보다 더 넓었다는 뜻이다. 한강 변 충적 평지의 탁 트인 지형이 대규모 논경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 한강이 수천 년간 퇴적시킨 충적 평야가 양천구를 서울 최대의 논 지대로 만들었다. 3,271,852㎡의 논은 지금의 목동 일대 전체를 덮을 만한 크기였다
논 844필지는 지금의 목동·신정동·신월동 일대 저지대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특히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 주변의 비옥한 충적 평지는 조선시대 내내 서울 서쪽의 핵심 쌀 생산지였다. 이 논들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었다. 논을 관개하기 위한 수로, 물막이, 보(洑), 저수 시설 등 복잡한 농업 수리 인프라가 함께 발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 인프라의 흔적이 지하에 유구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밭 809필지 2,193,236㎡도 상당한 규모다. 논과 밭을 합치면 1,653필지로 전체의 83.6%를 차지한다. 이 수치는 양천구가 1912년 기준으로 서울의 어느 구보다도 농업 의존도가 높은 순수 농촌 지대였음을 증명한다.
"844필지의 논은 단순한 경작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내내 서울 서쪽을 먹여 살린 생명줄이었다. 목동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때마다, 그 아래 흙 속에 수백 년의 논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3. 잡종지 5,319,316㎡의 미스터리 — 전체의 48%는 무엇이었나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양천구 전체 면적 11,020,849㎡의 48.3%가 잡종지라니. 182필지 5,319,316㎡. 그것도 필지당 평균 29,227㎡, 약 8,846평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1912년 양천구 잡종지 현황
5,319,316㎡
전체 면적의 48.3% · 182필지
필지당 평균 29,227㎡ — 축구장 4개 크기의 '분류 불명' 토지가 양천구의 절반을 차지했다
잡종지(雜種地)는 토지조사사업에서 경작지·대지·임야 등 어느 유형으로도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 토지에 붙이는 범주다. 문제는 양천구의 잡종지가 너무나 광대하다는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구들과 비교하면 그 이상함이 더욱 선명해진다.
잡종지
182필지 · 48.3%
논
844필지 · 29.7%
밭
809필지 · 19.9%
대지
127필지 · 1.5%
임야
4필지 · 0.3%
양천구 잡종지 5,319,316㎡의 정체를 추정하는 가장 유력한 가설은 한강 수면과 강변 모래사장이다. 양천구 서쪽 경계는 한강과 직접 맞닿아 있었고, 당시 한강은 지금보다 훨씬 넓고 불규칙하게 흘렀다. 홍수 시 침수되는 저지대, 모래사장과 갈대밭, 계절에 따라 수위가 변하는 강변 습지 등 특정 시기에만 경작이 가능한 '불안정한 땅'들이 잡종지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안양천 합류 구간의 하천 부지다.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 주변으로 형성된 광대한 하천 부속지와 홍수터(floodplain)가 토지조사에서 경작지로도, 하천으로도 분류되지 못하고 잡종지로 기록되었을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 잡종지로 분류된 한강 변 습지와 하천 부지는 역설적으로 탁월한 유물 보존 환경이다. 수분과 점토가 산소를 차단해 목제·식물·동물 뼈 등 유기질 유물이 잘 보존되는 조건이다. 양천구 잡종지 구역은 수중·습지 발굴 기법을 적용한 특수 문화재 조사가 필요한 지역이다.
4. 수도용지 8필지 — 근대 상수도 시설의 첫 흔적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수도용지가 등장하는 것은 양천구가 처음이다. 8필지 19,147㎡의 수도용지. 이 작은 숫자가 담고 있는 역사적 무게가 상당하다.
🚰 수도용지 8필지 19,147㎡의 역사적 의미
1908년 대한제국은 서울 최초의 근대식 상수도 시설인 뚝도 수원지를 준공했다. 이후 서울 서부 지역 급수를 위한 가압 시설과 배수관 매설 공사가 한강 변을 따라 진행되었다. 양천구 수도용지 8필지는 이 근대 상수도 인프라의 가장 서쪽 거점 시설 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이 1908년 완공한 뚝도 수원지 상수도 시스템은 서울 동쪽에서 시작해 한강 남북을 따라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양천구는 그 서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8필지 19,147㎡의 수도용지는 당시 양수(揚水) 펌프장, 여과지, 배수 시설 등 근대 상수도 인프라의 흔적이다.

▲ 1912년 양천구에는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수도용지가 기록되어 있다. 근대 상수도 시설의 서쪽 거점이 바로 양천구 한강 변이었다
수도용지 8필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진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건설된 근대 상수도 시설물은 그 자체로 근대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펌프장, 주철 배관 매설 구간, 여과지 기초 구조물 등이 지하에 남아 있을 경우 산업 유산으로서 별도 관리·보존 절차가 적용된다.
🏆성공 사례: 2020년 마포구 당인리 일대 근대 상수도 시설 부지 조사에서 1910년대 초 일제강점기 철제 양수 펌프 부품 및 벽돌 펌프실 기초가 온전히 발굴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양천구 수도용지 8필지도 유사한 잠재력을 지닌다.
5. 원씨(元氏) 197필지 — 양천의 뿌리를 찾아서
이 시리즈 여섯 편을 통틀어 가장 의미심장한 성씨 기록이 여기에 있다. 양천구의 4위 성씨, 원씨(元氏) 197필지.
1이씨419필지
2김씨340필지
3최씨147필지
4★원씨197필지
★ 이 시리즈 최대 발견
원씨(元氏) 197필지 — 양천(陽川)의 본관 성씨
원씨의 본관 중 '양천 원씨(陽川 元氏)'가 있다.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원씨 집성촌이 1912년에도 197필지라는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양천 원씨 가문이 수백 년간 이 땅에 세거(世居)해왔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양천구라는 지명 자체가 이 가문의 역사와 깊게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원씨 197필지는 3위 최씨(147필지)보다도 50필지 더 많다. 그런데 이씨(419필지), 김씨(340필지)에 이어 단번에 3위를 건너뛰고 전체 4위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원씨 가문이 이 지역에 특정 집성촌을 형성해 대규모 토지를 집중 보유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양천 원씨는 고려시대부터 양천 지역에 세거한 것으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1912년의 197필지는 그 수백 년 역사의 마지막 공식 기록인 셈이다. 이 원씨 토지 집중 구역을 지도에 표시하면, 조선시대 양천 원씨 집성촌의 위치를 역추정할 수 있다. 그 위치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최우선 조사 지점이 된다. 집성촌 터에는 종가(宗家) 건물 기초, 묘비, 제기(祭器), 문중 문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원씨 197필지의 배경에는 양천에 수백 년 뿌리 내린 집성촌이 있었다. 양천 원씨 가문의 삶이 이 땅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6. 소유 구조 — 일본인 3필지와 척식회사 6필지의 의미
용산구(일본인 883필지), 종로구(일본인 641필지)와 비교할 때, 양천구의 일본인 소유 토지는 겨우 3필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도 6필지에 불과하다. 이 숫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짚어보자.
🏛️
국유지
74 필지
🏢
법인 소유
10 필지
🏭
동양척식주식회사
6 필지
🗾
일본인
3 필지
🏘️
마을 소유
1 필지
일본인 소유 토지가 3필지에 불과하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1912년 시점에 양천구는 아직 일본인 이주민이 대규모로 정착하지 않은 농촌 지대였다. 교통 접근성이 낮은 한강 너머 외곽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바꿔 말하면 조선인 농민들의 토지 보유력이 이 시점까지는 상대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 6필지 역시 중랑구(997필지)나 용산구(176필지)와 비교하면 극히 적다. 양천구의 광활한 논밭이 아직 본격적인 수탈 대상이 되기 이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이었을 뿐이다. 1920~30년대로 넘어가면서 한강 변 비옥한 충적 농경지는 빠르게 일제 수탈의 대상으로 편입되어 갔다.
국유지 74필지는 이 시리즈에서 중간 규모에 해당한다. 74필지 중 상당 부분은 수도용지 8필지와 연결된 관용 시설 부지, 그리고 한강 변 하천 관리 시설 부지였을 것이다.
📊시리즈 비교 — 일본인 소유 필지: 중랑구 1필지 → 양천구 3필지 → 강일동 국유지(해당 없음) → 종로구 641필지 → 용산구 883필지. 이 숫자의 증가 곡선이 곧 일제 식민 지배의 공간적 침투 방향과 강도를 보여준다.
7. 왜 양천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독특한가
양천구 문화재 발굴조사가 서울의 다른 구들과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세 가지 차원에서 독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논 유구(遺構)의 발굴이다. 844필지의 논은 단순한 경작지가 아니라,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논농사 시스템 전체의 증거물이다. 논 유구에는 논둑 흔적, 용수로, 물꼬, 보 기초, 경작 층위별 식물 유체가 포함된다. 이를 통해 고려·조선·일제강점기에 걸친 농업 기술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둘째, 잡종지 한강 변 습지의 수중 발굴 가능성이다. 5,319,316㎡에 달하는 잡종지 중 한강 변 구간에서는 수중·습지 발굴 기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습지 보존 층위에서는 목선(木船), 어망추, 도자기, 목제 농기구 등 수변 생활 유물이 출토될 수 있다. 특히 목선 잔해가 발굴될 경우, 조선시대 한강 수운(水運)의 실체를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 1912년 양천구 1,978필지를 기록한 토지조사사업. 그 측량의 결과가 오늘날 문화재 발굴의 출발점이 된다
셋째, 원씨 집성촌 유적의 발굴이다. 197필지로 확인된 원씨 토지 집중 구역에서는 조선시대 집성촌의 전형적인 유구들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종가 기와집 기초, 공동 우물, 제사 시설, 문중 서원 터 등이 그 대상이다. 이러한 유구들은 향후 양천구 향토 역사 복원에 핵심 자료가 될 것이다.

▲ 목동 아파트 단지 아래에 잠든 조선시대 논 유구. 양천구 문화재 발굴은 한강 변 농경 문명의 역사를 통째로 복원하는 작업이다
8. 마무리 — 한강이 기억하는 논의 역사
1912년 양천구. 1,978필지, 1,102만 제곱미터의 땅. 844필지의 논, 809필지의 밭, 182필지의 잡종지. 이씨·김씨·원씨·최씨가 나눠 가진 비옥한 충적 평야. 그리고 8필지 수도용지가 남긴 근대의 첫 흔적.
지금 목동 올림픽공원을 걷거나, 목동 아파트 1단지에서 올림픽대로를 내려다보거나, 신월동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알까.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땅 아래에, 수백 년 원씨 가문이 일군 논이 있고, 이름 모를 농부들이 흘린 땀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것을.
한강은 기억을 잊지 않는다. 매년 범람하고 물러가면서 이 땅에 새 흙을 덮었지만, 그 흙 아래 역사는 지워지지 않았다. 844필지의 논이 증언하는 그 역사를 우리가 삽으로 꺼내는 것, 그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진짜 의미다.
🌾
"한강은 해마다 넘쳤지만,농부들은 해마다 다시 씨를 뿌렸다.844개의 논은 844번의 봄이었고,844번의 가을이었다.그 반복의 흔적이지금 이 흙 속에 남아 있다.우리가 그것을 파내는 것은,그 봄과 가을에 응답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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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 일대 한강 변 문화재 발굴 현황은 국립중앙박물관 고고학부와 서울시 문화유산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25개 구 1912년 토지 전체 데이터는 seoulheritage.org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중랑구·종로구·용산구·강일동·양천구 편 시리즈를 이어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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