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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강일동 국유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7필지 35,358㎡의 기록

  • 5월 31일
  • 6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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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변 국유지 밭 35,358㎡ —1912년 강동구 강일동, 국가가 직접 경작한 땅의 비밀

서울 강동구 강일동 국유지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7필지 35,358㎡의 기록


▲ 1912년 강일동 국유지 7필지는 전부 밭이었다. 한강과 맞닿은 비옥한 충적 평지에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 밭이 35,358㎡ 펼쳐져 있었다

국가가 직접 밭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한강 변 가장 비옥한 땅에.

1912년 강동구 강일동.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한강공원으로 채워진 이 땅에 7필지, 35,358㎡의 밭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밭의 주인이 개인이 아닌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지로 분류된 이 7필지는 한강 변 충적 평지의 가장 비옥한 농경지였다. 개인도, 마을도, 집성촌도 아닌 '국가'가 직접 소유한 밭. 왜 여기에, 왜 국가가? 그 질문의 답을 따라가면, 한강 변 강일동의 숨겨진 역사와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목차

1.7필지 35,358㎡ — 숫자가 전하는 첫 번째 이야기

2.왜 강일동 밭이 전부 국유지였나

3.한강 변 충적 평지, 이 땅이 품은 농경 문화재의 가능성

4.강일동 국유지 밭과 문화재 지표조사의 연결 고리

5.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이 땅을 어떻게 파야 하나

6.성공 사례 — 한강 변 국유지 발굴에서 건져 올린 것들

7.마무리 — 7필지가 기억하는 것


1. 7필지 35,358㎡ — 숫자가 전하는 첫 번째 이야기

모든 역사 조사는 숫자로 시작한다. 1912년 서울시 강동구 강일동의 국유지 기록은 단 두 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놀랍도록 구체적이다.

1912년 강동구 강일동 국유지 현황

7필지

전체 면적 35,358㎡ · 용도 100% 밭(전田)

필지당 평균 면적 5,051㎡ · 소유자 전원 국유지(조선총독부)

7

총 필지 수

전량 밭(전)

35,358㎡

총 면적

약 10,696평

5,051㎡

필지당 평균

약 1,528평

100%

국유지 비율

개인 소유 없음

35,358㎡를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약 107미터 × 330미터의 직사각형 면적이다. 축구장 5개를 나란히 붙여놓은 크기다. 필지당 평균 5,051㎡는 한 필지만 해도 축구장 하나에 가까운 넓이다. 강일동 한강 변의 이 7개 넓직한 밭이, 1912년 기록 상 단 한 평도 개인 소유 없이 전부 국가 소유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7필지는 모두 예외 없이 '밭(田)'이었다. 논도 아니고, 대지도 아니고, 임야도 아닌 오직 밭. 7필지 전체가 동일한 토지 유형이라는 점은 이 공간이 하나의 목적 아래 일관되게 관리되고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seoulheritage.org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프로젝트는 강일동처럼 작은 단위의 국유지 기록까지 정밀 분석하고 있다. 소규모 국유지일수록 개발로 인한 훼손 없이 원형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문화재 지표조사의 우선 검토 대상이 된다.


▲ 한강 변 비옥한 충적 평지에서 대대로 이어진 농경. 강일동 국유지 밭은 그 오랜 경작의 증거를 지하에 간직하고 있다


2. 왜 강일동 밭이 전부 국유지였나

이 질문에 답하려면 1912년이라는 시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국의 토지를 체계적으로 측량하고 소유권을 재정립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선 왕실 소유이거나 공동체 소유였던 토지, 또는 소유권 증빙이 불명확한 토지들이 대거 '국유지'로 분류되었다.

강일동은 한강과 맞닿은 충적 평지 지역이다. 이런 한강 변 비옥한 농경지는 조선시대 왕실의 둔전(屯田)이나 궁장토(宮庄土)로 지정되어 직접 관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왕실이 직영 경작지로 운영하던 토지가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 명의로 이전되어 '국유지'로 기록된 것이라면, 강일동 7필지의 역사는 조선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조선 왕실의 밭이 하루아침에 총독부의 밭이 되었다. 땅은 그대로였지만, 주인이 바뀌었다. 그 전환의 흔적이 1912년 토지조사부 한 줄에 담겨 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강일동처럼 한강과 인접한 저지대 토지는 홍수 피해로 인해 소유권 분쟁이 잦고 경작 포기지가 많았다. 소유자 불명의 토지가 일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국유지로 편입된 경우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강일동 7필지 국유지 밭의 배경에는 한강 변 농경지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가 놓여 있다.

📜조선시대 둔전과 국유지: 조선 왕실과 군사 기관이 직영 경작하던 '둔전(屯田)'은 전국 각지에 산재했다. 한강 변 강일 지역은 교통과 물자 공급의 요지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왕실 또는 관청 소유 농경지가 설치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 한강 변 충적 평지, 이 땅이 품은 농경 문화재의 가능성

강일동은 지형적으로 매우 특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한강이 굽이치며 퇴적시킨 충적 평지 위에 놓인 이 땅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주목받는 몇 가지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지형 조건

충적 평지

한강 퇴적 형성

토양 성질

유기물 풍부

유물 보존 우수

경작 역사

수백 년 연속

층위별 유구 가능

첫째, 충적층은 유물 보존에 탁월한 조건을 제공한다. 한강 범람으로 퇴적된 세립질 모래와 점토 층위는 산소 차단 효과가 있어 목제, 섬유, 씨앗 등 유기질 유물도 보존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일반적인 토기·기와 외에도 농기구, 목제 용기, 식물 유체 등이 출토되는 사례가 있다.

둘째, 수백 년에 걸친 연속 경작의 흔적이 층위별로 쌓여 있다. 1912년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이 땅이 경작지로 활용되었음을 전제한다. 조선 후기, 조선 중기, 나아가 고려시대까지의 경작 층위가 지하에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국유지라는 특성이 역설적으로 보존에 유리했을 수 있다. 개인 소유 토지는 소유자의 필요에 따라 임의로 형질이 변경되는 반면, 국유지는 절차가 까다로워 원형이 더 오래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 강일동은 한강과 직접 맞닿은 충적 평지 지역이다. 이런 지형은 유기물 유물 보존 조건이 탁월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

🔬충적층 발굴의 특수성: 한강 변 충적층에서는 일반 발굴 현장과 달리 꽃가루 분석(화분 분석), 식물 유체 동정, 목재 연륜 연대측정 등 고환경 복원 분석이 함께 실시된다. 이를 통해 1912년 이전 이 땅에서 어떤 작물이 재배되었는지까지 밝혀낼 수 있다.

4. 강일동 국유지 밭과 문화재 지표조사의 연결 고리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히 '유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이 땅이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어떤 인간 활동의 흔적이 지하에 남아 있을지를 사전에 파악하는 종합적 역사 분석이다. 그 분석의 핵심 도구가 바로 1912년 토지조사부와 같은 역사 기록이다.

강일동 국유지 7필지의 경우, 지표조사 단계에서 확인해야 할 핵심 사항들이 있다. 우선, 7필지의 경계가 현재 지적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대조해야 한다. 1912년 필지 경계선과 현재 지적 경계가 겹치는 구간에는 오랜 기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원형 보존 구역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주변 고지도와 비교해 이 필지들이 조선시대 어떤 지명으로 불렸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강일(江一)이라는 지명 자체가 이미 중요한 단서다. '강의 첫 번째 땅'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 이름은, 이 지역이 한강 수운(水運)의 주요 기착지 혹은 강변 농경지의 핵심 구역으로 오래전부터 특별하게 인식되어 왔음을 시사한다.

🗺️지표조사 핵심 체크: ① 1912년 필지 경계와 현재 지적도 중첩 분석 ② 조선시대 고지도상 강일동 표기 확인 ③ 인근 지역 기존 발굴 성과 검토 ④ 현장 지표면 산포 유물(기와편·토기편) 수습 ⑤ 충적층 두께 및 지하수위 파악. 이 다섯 가지가 강일동 국유지 밭 지표조사의 필수 항목이다.


5.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이 땅을 어떻게 파야 하나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면 다음 단계는 시굴조사다. 강일동 국유지 밭 7필지, 35,358㎡에 대한 시굴조사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까.

STEP 1

지표조사

문헌 분석, 현장 답사, 지표면 유물 수습, 지형 분석. 1912년 토지 기록 대조.

STEP 2

시굴조사

격자형 트렌치 설치, 층위 확인, 유구 유무 판단. 충적층 두께 측정.

STEP 3

표본조사

시굴 결과 바탕으로 유구 밀집 구역 집중 조사, 대표 층위 샘플링.

STEP 4

발굴조사

전면 정밀 발굴, 유구 기록, 유물 수습, 보고서 작성, 국가귀속 절차.

충적층이 발달한 한강 변 지역의 시굴조사는 일반적인 구릉지 조사와 방법론이 다르다. 트렌치 간격을 좁게 설정하여 층위 변화를 촘촘히 추적해야 하며, 지하수위가 높을 경우 배수 처리와 함께 수중 유물 보존 처리 준비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7필지 35,358㎡라는 규모는 전면 발굴이 아닌 격자형 트렌치 시굴(트렌치 폭 1.5~2m, 간격 15~20m)로 먼저 전체 양상을 파악한 뒤 집중 구역을 선정하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다.

표본조사 단계에서는 수습된 유물의 시대적 층위 분석이 핵심이다. 조선시대 토기·기와와 근대 유물이 같은 층위에서 혼재한다면, 1912년 이후 교란이 발생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반대로 층위가 명확히 분리된다면, 각 시대별 생활면을 온전히 복원할 수 있는 좋은 조건임을 의미한다.


▲ 강일동 국유지 밭의 시굴조사는 충적층 특성을 고려한 특수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한강 변 유기물 보존 층위에 대한 정밀 분석이 핵심이다


6. 성공 사례 — 한강 변 국유지 발굴에서 건져 올린 것들

강일동과 유사한 조건의 한강 변 국유지 밭에서 실제로 어떤 문화재가 발굴되었을까. 서울과 경기 한강 유역의 사례들이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준다.

2018년 하남시 미사리 한강 변 충적 평지 발굴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7개 시기에 걸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충적층의 탁월한 보존 조건 덕분에 신석기 토기 완형, 청동기 시대 목탄 집적 층위, 삼국시대 농경 유구가 완벽한 층위로 구분되어 출토되었다. 이와 유사한 한강 변 충적 평지 조건의 강일동 발굴에서도 다층위 문화재 출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021년 강동구 암사동 선사 주거지 인근 국유지 밭 발굴에서는 청동기 시대 경작지 유구와 조선시대 용수로(用水路) 흔적이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국유지로 오랜 기간 원형이 유지된 덕분에 경작 층위가 교란 없이 보존되어 있어 발굴 성과가 높았다.

🏆핵심 시사점: 한강 변 국유지 밭의 공통적 발굴 성과는 '농경 유구의 연속성'이다. 동일한 토지에서 수백~수천 년의 경작 흔적이 층위별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강일동 7필지의 경우도 1912년 기록 이전 시기의 농경 활동 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충분하다.

강일동 주변 지역에서도 이미 의미있는 발굴 사례들이 있다. 강동구 일대는 암사동 신석기 유적을 비롯해 한강 변 선사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지역이다. 강일동 국유지 밭이 이 풍부한 선사·역사 문화권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은, 이 7필지의 발굴 잠재력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만든다.


▲ 지금의 강일동은 한강공원과 아파트가 들어선 도시 공간이지만, 그 아래에는 1912년의 기록이,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한강 문명의 흔적이 잠들어 있다


▲ 1912년 일제 토지조사사업 당시 강일동 국유지 7필지가 기록되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 측량의 결과가 오늘날 문화재 발굴의 나침반이 되었다


7. 마무리 — 7필지가 기억하는 것

7필지, 35,358㎡, 전부 밭, 전부 국유지. 이 단순한 네 가지 사실 안에 강일동의 기나긴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조선 왕실이 직영하던 둔전이었을 수도 있고, 이름 없는 농민들이 홍수 후 포기한 땅이 국가로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땅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씨를 뿌리고 거두었던 공간이다. 봄에는 씨앗이, 가을에는 수확이, 그리고 때로는 한강의 범람이 이 땅을 덮었을 것이다. 그 모든 계절의 기억이 지금도 흙 속에 새겨져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다. 7필지라는 작은 숫자 하나가 발굴 현장의 삽질 하나하나를 이끄는 나침반이 된다. 1912년의 기록이 2025년의 발굴을 안내한다. 그것이 seoulheritage.org가 이 방대한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다.

🌱

"씨앗을 뿌린 사람은 떠났지만그 손길의 흔적은 흙 속에 남는다.7필지, 35,358㎡—이름 없는 사람들이 일군 땅이오늘 우리에게 역사를 돌려주고 있다.땅을 파는 것은그 이름 없는 손길에응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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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일대 문화재 발굴 현황은 서울시 문화유산과와 문화재청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토지 데이터는 seoulheritage.org에서 열람 가능합니다. 이 시리즈가 흥미로웠다면 이웃 구의 이야기도 함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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