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랑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반으로
- 5월 31일
- 7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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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이 사는 그 땅, 100년 전에는 누구 것이었을까?1912년 서울 중랑구의 잊혀진 지도를 펼치다
서울 중랑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반으로

▲ 1912년 중랑구 일대는 드넓은 논밭과 몇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서울 외곽 농경지대였다
당신이 매일 걷는 그 골목, 그 아파트 단지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땅은 말이 없다. 하지만 기록은 말을 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113년 전, 1912년. 일제는 한반도 전역의 토지를 낱낱이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 방대한 자료 속에서 지금의 서울 중랑구 일대, 3,932필지에 달하는 1,039만여 제곱미터의 땅이 한 줄 한 줄 정리되어 있다. 논은 얼마였고, 집은 몇 채였으며, 무덤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는지.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중랑구라는 이름이 당신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목차
113년 전 중랑구, 그 넓이와 규모를 먼저 파악하자
논과 밭 — 중랑구를 먹여 살린 드넓은 농경지의 실체
집터와 무덤 — 사람들이 살고 죽은 흔적
산과 연못과 잡종지 — 자연이 남긴 지형의 기록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중랑구의 진짜 주인은 누구였나
국유지·공유지·척식회사 — 식민지 수탈의 흔적을 읽다
왜 이 기록이 문화재 발굴조사에 중요한가
마무리 — 땅이 기억하는 것들
1. 113년 전 중랑구, 그 넓이와 규모를 먼저 파악하자
1912년의 중랑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현재 중랑구는 서울 동북쪽에 위치한 인구 40만의 도시 자치구지만, 당시는 경성부 외곽의 조용한 농촌 지대였다. 일제는 토지 수탈을 체계화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전국 단위로 시행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이 방대한 기록이다.
3,932
총 필지 수
필지(토지 단위)
1,039만
총 면적
㎡ (약 314만 평)
7종
토지 유형
논·밭·대지 등
1912
조사 기준 연도
일제 토지조사사업
3,932필지, 면적으로는 10,394,066㎡. 숫자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쉽게 말하면 여의도 면적의 약 3.5배에 달하는 땅이다. 이 광활한 공간에 사람들이 살고, 농사를 짓고, 죽어서 묻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줄의 기록으로 남아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이처럼 1912년 토지조사부를 기반으로 서울 각 구별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 땅의 역사를 알아야 그 아래 묻힌 문화재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912년 중랑구 전체 면적의 절반에 가까운 땅이 논이었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 아래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2. 논과 밭 — 중랑구를 먹여 살린 드넓은 농경지의 실체
중랑구는 농경지의 땅이었다. 논과 밭을 합치면 전체 필지의 약 84%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인 비율이다. 지금 망우역 주변 빼곡한 주택가, 중화동과 묵동의 아파트 단지, 면목동 상권 아래에 한때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1,251
논 (답)
필지 · 4,725,941㎡
2,041
밭 (전)
필지 · 3,405,836㎡
45.5%
논 면적 비율
전체 대비
32.8%
밭 면적 비율
전체 대비
논은 1,251필지로 면적이 4,725,941㎡에 달했다. 전체 면적의 45.5%가 오롯이 벼농사 지대였던 것이다. 중랑천이 관통하는 지형 특성상 하천 주변 저지대에 논이 집중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중랑구의 중랑천 변 산책로와 공원 아래 어딘가에 수백 년 된 논의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지형 정보는 핵심 단서가 된다.
밭은 더욱 인상적이다. 필지 수로는 무려 2,041필지로 논보다 훨씬 많다. 면적은 3,405,836㎡. 다만 필지당 평균 면적은 논에 비해 작다는 점에서, 중랑구의 밭은 소규모 가족 단위 자급자족 농경이 지배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족이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삶의 방식이 숫자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밭 한 뙈기, 논 한 배미. 그것이 곧 삶이었다. 중랑구의 2,041개 밭은 2,041가족의 생존이었다."
3. 집터와 무덤 — 사람들이 살고 죽은 흔적
땅의 기록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흔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의 흔적도 함께 새겨져 있다. 1912년 중랑구에는 501필지 288,361㎡의 대지(집터)가 있었고, 동시에 32필지 56,965㎡의 분묘지(무덤)도 기록되어 있다.
501
대지 (집터)
필지 · 288,361㎡
32
분묘지 (무덤)
필지 · 56,965㎡
575㎡
평균 집터 크기
필지당 평균
1,780㎡
평균 묘지 면적
필지당 평균
501필지의 대지, 즉 집터. 이것이 곧 당시 중랑구에 살았던 가구의 수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평균 575㎡(약 174평)라는 집터 크기는 지금의 중대형 아파트 한 동이 들어설 만한 넓이다. 마당 있는 초가집, 그 앞의 텃밭, 장독대. 한 가족의 삶 전체가 이 공간 안에 담겨 있었다.

▲ 32필지 56,965㎡의 분묘지.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어딘가에 선조들의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다
분묘지 32필지는 숫자로 보면 많지 않아 보이지만, 면적으로 환산하면 56,965㎡로 꽤 광대한 규모다. 당시 중랑구의 야산과 야트막한 구릉지에는 마을마다 집성촌 묘지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분묘 지역들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히 중요한 지점이 된다. 무덤 주변에는 부장품, 비석, 상석 등 다양한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서울시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들이 이 데이터를 면밀히 검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 실제 사례: 2019년 중랑구 망우동 일대 도시재생사업 부지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후기 도자기 편과 기와 조각이 다수 발견되어 정밀 시굴조사로 이어진 바 있다. 1912년 토지조사부의 대지 위치 정보가 조사 범위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산과 연못과 잡종지 — 자연이 남긴 지형의 기록
농경지와 주거지 외에도 중랑구의 땅은 다채로운 자연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임야(산림), 지소(연못·저수지), 잡종지(복합용도 토지)가 각각 기록에 남아 있다.
84
임야 (산)
필지 · 493,007㎡
8
지소 (연못)
필지 · 38,020㎡
15
잡종지
필지 · 1,385,933㎡
13.3%
잡종지 면적 비율
전체 대비
임야는 84필지에 493,007㎡로, 지금의 용마산·봉화산·망우산 등 중랑구 특유의 산지 지형과 연결된다. 특히 잡종지 15필지가 무려 1,385,933㎡에 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필지당 평균 9만 2천㎡가 넘는 광활한 규모다. 잡종지는 분류가 불분명한 복합 토지로, 당시 도로·하천 부지나 대규모 시설 용지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광대한 잡종지 어딘가에 중랑구의 또 다른 역사가 숨어 있을 것이다.
8필지 38,020㎡의 연못(지소)도 눈에 띈다. 중랑천 주변 저습지에 형성된 자연 연못이었을 이 공간들은,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거나 매립되어 존재조차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지표조사에서 구 연못 지역은 유기물 층위가 풍부하게 보존되는 경향이 있어, 문화재 시굴조사 대상지로서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

▲ 중랑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랑구의 지형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5.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중랑구의 진짜 주인은 누구였나
이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볼 시간이다. 1912년 당시, 이 광활한 중랑구의 땅은 대체 누구 손에 들려 있었을까? 토지조사부에는 각 필지의 소유자 성명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그 기록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김씨
306 필지
이씨
289 필지
최씨
235 필지
윤씨
212 필지
박씨
185 필지
정씨
184 필지
임씨
160 필지
김씨 306필지, 이씨 289필지, 최씨 235필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인 김·이·박씨가 1912년 중랑구에서도 최다 토지 소유자였다는 사실은 어쩐지 묘한 연속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점은 4위가 윤씨(212필지)라는 사실이다. 윤씨는 전국적으로는 많은 성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랑구에서만큼은 박씨와 정씨를 앞질렀다. 이는 이 지역에 특정 윤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임씨도 160필지로 상위 7개 성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성씨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중랑구 어딘가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선조가 1912년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추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유산 조사의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 김씨, 이씨, 윤씨 등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중랑구 선조들의 마을 풍경
6. 국유지·공유지·척식회사 — 식민지 수탈의 흔적을 읽다
개인 소유 외에, 1912년 중랑구의 토지는 다양한 형태의 집단 소유로도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일제 식민 지배의 그늘이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국유지
516 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997 필지
공유지
13 필지
마을 소유
12 필지
법인 소유
8 필지
일본인 소유
1 필지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바로 이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997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식민지 수탈 기구다. 중랑구 전체 3,932필지 중 무려 997필지, 약 25%가 이 기관의 소유였다는 사실은 당시 식민지 지배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이 땅을 장악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국유지는 516필지로 두 번째로 많다. 조선총독부 명의의 국유지 역시 사실상 식민지 지배 기구의 통제 하에 놓인 토지였다. 반면 일본인 개인 소유 토지는 겨우 1필지에 불과하다. 이는 중랑구가 당시까지는 일본인들이 직접 이주해 정착하기보다, 제도적 기관을 통한 간접 수탈 방식이 지배적이었음을 보여준다.
"1912년 중랑구 땅의 약 25%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였다. 숫자 하나가 식민지 역사 전체를 말해준다."
마을 공동 소유 토지는 12필지, 공유지는 13필지에 그쳤다.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던 공유 공간이 이미 그 시절에도 극도로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척식회사 소유 지역들은 현재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의 시굴·발굴 대상지 선정 시 우선적으로 검토된다. 강제 토지 수탈 과정에서 기존 마을 유구가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7. 왜 이 기록이 문화재 발굴조사에 중요한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100년 전 땅 기록이 오늘날의 문화재 발굴조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사실,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건축·개발 공사 전에 해당 지역의 문화재 분포 가능성을 사전에 파악하는 조사다. 그리고 시굴조사는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실제 땅을 파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에서 '1912년 이전에 이 땅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라는 질문은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분묘지였다면 유물이 나올 확률이 높고, 대지였다면 건물 기초나 생활 유물이 발견될 수 있으며, 논이었다면 목제 유물이나 동물뼈 등 유기물 보존 가능성이 크다.
🏺성공 사례: 서울 성동구 금호동 일대에서 2021년 지표조사 시, 1912년 토지조사부 상의 분묘지 위치 데이터를 참조해 집중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 중기(16세기) 분청사기 완형 3점을 포함한 유물 47점이 출토되어 정식 발굴조사로 전환된 사례가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바로 이런 필요성에서 출발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토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각 구역의 문화재 잠재 분포도를 사전에 파악하는 기초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중랑구 편에서 확인했듯, 이 작업은 단순한 역사 기록 정리를 넘어 실제 발굴 현장에서 살아있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실제로 문화재 발굴조사 절차는 크게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문헌 조사와 현장 답사를 통한 기초 지표조사, 두 번째는 소규모 굴착을 통한 시굴조사, 세 번째는 유구 확인 후 실시하는 표본조사, 네 번째가 전면 발굴조사다.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이 바로 1912년 토지조사부와 같은 역사 기록의 철저한 분석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들이 이 데이터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1912년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나침반이 된다
8. 마무리 — 땅이 기억하는 것들
우리는 지금 1912년이라는 시간의 창을 통해 중랑구를 들여다봤다. 3,932필지의 땅, 1,039만 제곱미터의 공간, 그 안에 새겨진 수천 가족의 삶. 논을 일구던 김씨 가문의 손길, 밭고랑을 따라 걷던 윤씨 집안의 발걸음, 그리고 야산 한 켠 봉분 아래 잠든 이름 모를 선조들.
땅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사람이 기억을 잃어도, 기록이 사라져도, 땅은 그 층위 속에 수백 년의 역사를 켜켜이 담아두고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바로 그 침묵하는 땅의 기억을 깨워내는 작업이다. 삽 한 자루, 붓 한 자루로 시간을 거스르는 일. 우리가 잊고 싶었던 식민지의 기억도, 우리가 잃어버린 집성촌의 기억도 모두 그 흙 속에 있다.
당신이 오늘 중랑구의 어느 골목을 걷다가 문득 발 아래 땅을 내려다본다면, 이제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이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오늘도 묵묵히 땅을 파고 기록을 뒤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
"역사는 과거에 있지 않다.그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 발 아래 땅 속에 숨 쉬고 있다.그 숨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문화유산 조사의 시작이다."
🙋 지금 바로 해볼 수 있는 것들
혹시 내가 사는 동네가 1912년에 어떤 땅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seoulheritage.org에서 서울 25개 구 전체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재청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GIS)에서 내 집 주변 문화재 분포 현황도 검색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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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제공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키워드: 문화재 발굴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중랑구 문화재 · 서울 문화유산 · 1912년 토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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