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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관악구 봉천동 국유지 2필지 10,750㎡ — 논 하나, 임야 하나.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땅의 이야기.

  • 2일 전
  • 6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관악산 기슭 국유지

관악산 기슭의 단 2필지,그 작은 땅이품은 거대한 역사

1912년 관악구 봉천동 국유지 2필지 10,750㎡ — 논 하나, 임야 하나.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땅의 이야기.

단 2필지, 10,750㎡.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국유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땅이 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요?

관악구 봉천동. 지금은 서울대입구역을 중심으로 카페와 음식점, 고시원이 촘촘하게 들어선 젊은 동네입니다. 그러나 110년 전, 이 동네 어딘가에는 국가 소유의 땅 두 필지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논 1필지 3,517㎡, 임야 1필지 7,233㎡. 총 2필지 10,750㎡.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국유지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규모가 작습니다. 독산동 444,332㎡에 비하면 41분의 1, 군자동 1,189,235㎡에 비하면 110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가장 흥미롭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작음입니다. 왜 이 동네에는 단 2필지밖에 없었을까요? 논과 임야가 딱 하나씩만 있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2필지가 관악산이라는 거대한 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이 작고 특별한 국유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필지총 국유지 필지 수

10,750㎡총 면적 (약 3,252평)

2종논 + 임야 — 각 1필지씩


목 차

1.봉천동(鳳川洞) — 이름 속에 감춰진 역사의 단서

2.2필지 전체 데이터 — 작지만 완벽한 구성의 비밀

3.임야 7,233㎡ — 관악산이 국가에 내어준 숲

4.논 3,517㎡ — 산기슭 물길이 만든 국유 수전

5.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소규모 국유지 조사 전략

6.관악구 발굴 성공 사례와 봉천동의 가능성


1

봉천동(鳳川洞) — 이름 속에 감춰진 역사의 단서

문화재 기초조사에서 지명(地名) 분석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땅 이름에는 그 지역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봉천동(鳳川洞)을 한자로 풀어보면, 봉황 봉(鳳), 내 천(川), 마을 동(洞)입니다. 봉황이 깃든 냇가 마을. 이 아름다운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봉천(鳳川)이라는 지명은 이 일대를 흐르던 작은 내(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악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내려 도림천(道林川)으로 합류하는 지류가 봉천 일대를 관통했습니다. 봉황이라는 상서로운 새 이름이 붙은 내. 이것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조선 시대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형이나 경관에 봉황, 용, 학처럼 길조(吉兆)를 뜻하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봉천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땅이 조선 시대에 어떤 특별한 위상을 가졌음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봉천동은 관악산(冠岳山) 북사면의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합니다. 관악산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풍수적으로 강한 불의 기운을 가진 산'으로 경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경복궁 남쪽으로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에 해태 석상을 세웠다는 것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조선 왕조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관악산의 기슭, 그 첫 자락에 국유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수 있습니다.

鳳 川 洞

봉천동 — 봉황이 깃든 냇가 마을

관악산에서 발원한 봉천(鳳川)의 이름에서 유래. 조선 시대 경복궁의 화기(火氣)를 막는 상징적 산으로 여겨진 관악산의 북사면에 위치. 지명 자체가 이 땅의 역사적 특별함을 암시합니다.



2

2필지 전체 데이터 — 작지만 완벽한 구성의 비밀

1912년 봉천동 국유지의 구성을 데이터로 살펴봅니다. 2필지 10,750㎡. 논 1필지 3,517㎡가 32.7%, 임야 1필지 7,233㎡가 67.3%입니다. 딱 하나씩, 딱 두 종류. 이 단순한 구성이 오히려 흥미롭습니다.

10,750㎡는 축구장 약 1.5개 크기입니다. 작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좁은 봉천동 일대에 국가가 굳이 논과 임야를 따로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관리할 이유가 없었다면 국유지로 지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 2필지를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땅이 봉천동 지역에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암시합니다. 논으로 세금이나 제사 비용을 충당하고, 임야로는 왕실 관련 산림을 보호하는 역할이 이 2필지 안에 압축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토지 유형

필지 수

면적 (㎡)

비율

임야 (林野)

1필지

7,233㎡

67.3%

논 (畓)

1필지

3,517㎡

32.7%

합계

2필지

10,750㎡

100%

임야 (林野)

7,233㎡

약 2,188평 · 1필지

전체의 67.3%

논 (畓)

3,517㎡

약 1,064평 · 1필지

전체의 32.7%

임야 67.3%논 32.7%

임야

임야 7,233㎡

논 3,517㎡


3

임야 7,233㎡ — 관악산이 국가에 내어준 숲

67.3%, 7,233㎡의 국유 임야. 봉천동 국유지에서 가장 넓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 숲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관악산 북사면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먼저 핵심 단서가 됩니다.

관악산은 조선 시대 내내 도성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가장 가까운 큰 산이었습니다. 이런 산의 국유 임야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능림, 군사림, 봉산의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집니다. 봉천동의 경우에는 특히 봉산(封山)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 왕조는 관악산 일대의 산림을 매우 중요하게 관리했는데, 이는 한양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목재 공급지이자 풍수상 중요한 산세를 형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관악산 봉산 구역은 벌채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국가가 직접 관리했습니다.

봉천동 임야 1필지 7,233㎡가 관악산 봉산의 일부였다면, 이 숲은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손이 최소한으로만 닿은 보존 상태 좋은 역사 공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봉산 구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설치한 경계석(境界石)이나 표석(標石)이 지하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하나의 돌 표지가 발견된다면, 봉천동 임야의 역사적 성격이 단번에 밝혀질 수 있습니다.

"관악산 북사면의 국유 임야 1필지. 이것이 조선 왕조의 봉산이었다면, 그 안에는 수백 년 된 수령목과 함께 경계석, 표석, 혹은 산중 소시설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작은 면적이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임야는 오히려 더 선명한 역사를 간직합니다."

봉산(封山) 가능성

관악산 일대는 조선 시대 대표적 봉산 지역. 7,233㎡ 임야가 봉산 구역이었다면 경계석·표석 발굴 가능성 있음.

능림(陵林) 가능성

관악산 주변 왕실 관련 묘소나 재실(齋室) 연계 보호림이었을 가능성. 왕실과의 연결은 유물 가치를 대폭 높임.

예상 매장 유물

경계석, 봉산 표지, 산중 소건물 초석, 기와 파편, 도자기 조각. 지표조사에서 우선 확인 대상.

조사 우선도

단 1필지로 집중 조사 가능. 관악산 자락 지형 특성상 평탄면 이상 관찰이 핵심 지표조사 기법.



4

논 3,517㎡ — 산기슭 물길이 만든 국유 수전

두 번째 필지, 논 1필지 3,517㎡. 약 1,064평, 축구장 절반 크기의 국유 논입니다. 관악산 기슭에 논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 의외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산기슭에 어떻게 논이 가능했을까요?

봉천동 일대는 관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여럿 합쳐지는 지점입니다. 봉천(鳳川)을 비롯한 여러 계곡 물이 모이면서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에 충적층이 형성되었고, 이 충적지에 논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한 산전(山田) 형태의 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산기슭 논은 평야의 논보다 규모는 작지만, 관리가 잘 된 경우 토질이 비옥하고 용수가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국유 논 3,517㎡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규모로 보면 대규모 군량미 생산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봉천동 일대 어딘가에 있었을 관청이나 사찰의 운영 비용을 충당하는 소규모 수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은 인근 왕실 묘소나 재실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는 능침전(陵寢田) 성격의 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단 1필지, 하나의 논으로 이 모든 역할을 수행했다면, 이 땅은 봉천동 지역 사회에서 꽤 중요한 경제적 거점이었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논은 충적층 유물 보존 가능성을 가집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형성한 충적층에는 유기질 유물이 보존되기 좋은 혐기성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논 주변에는 수로(水路), 제방, 보(洑) 같은 수리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수리 시설 관련 유구는 조선 시대 농업 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가 됩니다.

"관악산 기슭에서 물이 모이는 곳. 그 자리에 단 하나의 국유 논이 있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이 논이 누구를 위해 쌀을 길러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봉천동 전체의 역사가 다르게 읽힙니다."



5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소규모 국유지 조사 전략

2필지 10,750㎡. 이 소규모 국유지에 적합한 조사 전략은 대규모 부지와는 다릅니다. 작은 면적이라는 것은 오히려 더 집중적이고 정밀한 조사가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단계별로 살펴보겠습니다.

1

문헌 기초조사 — 봉천동과 관악산의 역사 기록 추적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관악산 봉산 관련 기록, 관악구 일대 왕실 묘소 관련 자료를 검토합니다. 특히 봉천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고문헌, 관악산 봉산 지정 기록, 봉천동 일대 사찰이나 관청 관련 기록을 집중 조사합니다. 1912년 이전 고지도에서 봉천동 구역의 표기 방식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2

지표조사 — 2필지를 각각 집중 답사

10,750㎡의 소규모 부지이므로 전체를 정밀하게 답사할 수 있습니다. 임야 필지에서는 인위적 평탄면, 석축 잔재, 기와 파편 산포를 확인합니다. 논 필지에서는 옛 수로 흔적, 제방 유구, 유물 파편을 관찰합니다. 두 필지의 경계를 표시하던 경계석이 있다면 이 단계에서 발견됩니다.

3

시굴조사 — 소규모지만 전략적으로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역에 트렌치를 설치합니다. 임야 필지에서는 평탄면 구역에, 논 필지에서는 옛 논둑 방향을 따라 트렌치를 배치합니다. 10,750㎡ 전체의 시굴은 대규모 부지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될 수 있어, 효율적인 발굴 가능성 판별이 가능합니다.

4

표본조사 — 소규모지만 체계적으로

2필지를 각각 표본 구역으로 설정해 독립적으로 조사합니다. 임야 7,233㎡와 논 3,517㎡가 서로 다른 지목이므로, 각기 다른 조사 기법을 적용합니다. 임야는 낙엽 제거 후 표토 긁기, 논은 경작층 아래 지층 확인에 집중합니다.

5

발굴조사 — 봉천동의 역사를 꺼내다

시굴에서 중요 유구가 확인되면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아 전면 발굴을 진행합니다. 소규모 부지이므로 전면 발굴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봉산 관련 표석이나 사찰 관련 유구가 확인된다면, 봉천동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6

관악구 발굴 성공 사례와 봉천동의 가능성

봉천동 2필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같은 관악구에서 이미 확인된 역사 기록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봉천동 국유지의 작은 규모가 결코 그 역사적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음을 이 사례들이 보여줍니다.

성공 사례 01

관악구 신림동 — 31필지 183,752㎡, 관악산 기슭의 방대한 국유지 기록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이웃 동네 신림동에는 1912년 기준 31필지 183,752㎡의 국유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밭 15필지 93,481㎡, 논 11필지 52,377㎡, 임야 3필지 32,238㎡, 대지 2필지 5,656㎡로 구성된 이 광대한 국유지는 "당신이 오르는 관악산 기슭, 110년 전 그 땅의 진짜 이름은 무엇이었나"라는 제목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봉천동 2필지 10,750㎡는 신림동의 약 17분의 1 규모이지만, 같은 관악산 자락이라는 공통점에서 역사적 연결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림동 임야 3필지 32,238㎡와 봉천동 임야 1필지 7,233㎡가 관악산 봉산이라는 같은 역사적 맥락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광진구 모진동 — "100년을 거슬러 오르면 전혀 다른 모습"

광진구 모진동 문화유산 발굴조사 사례는 작은 규모의 국유지라도 그 역사적 재발견이 얼마나 극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동네가 100년 전에는 전혀 다른 역사적 얼굴을 가지고 있었음이 1912년 토지 기록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봉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대학가와 주택가로 빽빽한 이 동네가 110년 전에는 관악산 봉산의 자락에 국유 논과 임야가 고요히 자리했던 곳이었습니다.

2필지, 10,750㎡. 숫자로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부류에 속합니다. 하지만 작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2필지라는 단순한 구성이 더 명확한 역사적 용도를 가졌을 가능성을 높입니다. 봉천동의 이 두 필지는 관악산과 봉천이라는 역사의 무대 위에서, 조선 시대 누군가의 삶과 나라의 살림을 조용히 지탱했던 땅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이 땅에 처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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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필지, 10,750㎡.이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땅 중 하나입니다.하지만 관악산은 크고,봉천이 흐른 역사는 깊으며,이 두 필지를 국가가 직접 관리한이유는 반드시 있었습니다.작은 땅일수록 그 이유는 더 선명합니다.필요하지 않았다면 지정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봉황이 깃들었다는 냇가 마을에서,이 두 필지가 품은 이야기를 듣는 날이언젠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봉천동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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