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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53필지 635만㎡의 충격

  • 5월 31일
  • 7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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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식회사 452필지 vs 창덕궁 27필지 —1912년 동대문구, 수탈과 왕실이 맞붙은 땅

서울 동대문구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분석 — 1912년 토지조사부 기반, 3,053필지 635만㎡의 충격


▲ 1912년 동대문구에는 158필지 305,429㎡의 분묘지가 있었다.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분묘 필지 수다. 구릉마다 선조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452필지를 손에 쥐고, 창덕궁이 27필지를 지키고 있었다. 수탈 기관과 왕실이 같은 동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동대문구. 지금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와 청량리 역세권, 경희대·한국외대가 자리한 서울 동북쪽 도시 지역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의 기록에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대립 구도가 새겨져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452필지. 중랑구(997필지)에 이어 이 시리즈 두 번째로 많은 척식 토지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창덕궁 소유 27필지. 성북구에서 처음 발견된 창덕궁 소유지가 동대문구에서도 살아있다. 수탈 기관의 폭력성과 왕실의 마지막 저항이 한 땅 위에서 공존하는 이 긴장이, 1912년 동대문구의 진짜 얼굴이다.


목차

1.1912년 동대문구의 규모 — 낙산 자락의 농경·묘지 지대

2.분묘지 158필지 — 이 시리즈 전체 최다, 죽은 자들의 땅

3.동양척식주식회사 452필지 — 수탈의 깊이를 측정하다

4.창덕궁 27필지 — 왕실의 마지막 영토

5.철도용지 158,575㎡ — 경의선·중앙선의 흔적

6.논 670필지 · 밭 1,476필지 — 도성 외곽의 농경 지대

7.성씨별 현황 — 김씨 693필지의 압도적 지배

8.왜 동대문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생사(生死)를 아우르나

9.마무리 — 수탈과 왕실과 죽은 자들의 땅에서


1. 1912년 동대문구의 규모 — 낙산 자락의 농경·묘지 지대

동대문구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동쪽 성문인 흥인지문(동대문) 바깥 지역이다. 낙산(駱山)의 동쪽 사면과 중랑천 지류를 따라 형성된 완만한 구릉지가 이 지역의 기본 지형이다. 도성 안쪽 종로구가 왕도의 중심이었다면, 동대문구는 그 배후 농경지이자 묘지 지대였다.

3,053

총 필지 수

성북구(3,023)와 유사

635만

총 면적 (㎡)

여의도 약 2.2배

158필지

분묘지

시리즈 전체 최다

452필지

척식회사 소유

시리즈 역대 2위

필지당 평균 면적 2,080㎡는 성북구(2,025㎡)와 거의 같다. 두 구가 지형적으로 유사한 도성 외곽 구릉·농경지 성격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유 구조에서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성북구에 창덕궁 소유지가 95필지였다면 동대문구는 27필지로 적어졌고, 대신 척식회사 소유지가 성북구(123필지)에서 동대문구(452필지)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seoulheritage.org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데이터에서 동대문구는 분묘지 158필지로 이 시리즈 전체 최다를 기록했다. 도성 외곽 구릉지에 집중된 대규모 씨족 묘역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핵심 거점이 된다.


2. 분묘지 158필지 — 이 시리즈 전체 최다, 죽은 자들의 땅

이 시리즈 11편 전체 분묘지(분묘) 필지 수 비교

동대문구 158필지

총 면적 305,429㎡ · 필지당 평균 1,933㎡

서초구 61필지 / 성북구 19필지 / 용산구 126필지 — 동대문구가 압도적 1위

동대문구

158필지

305,429㎡

용산구

126필지

221,091㎡

서초구

61필지

68,268㎡

중랑구

32필지

56,965㎡

성북구

19필지

68,387㎡

158필지 305,429㎡. 이 숫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동대문구의 지형을 먼저 봐야 한다. 낙산을 비롯한 도성 동쪽 구릉들은 조선시대 내내 서울 시민들의 묘역으로 활용되었다. 도성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고, 너무 먼 교외는 관리가 어려웠다. 그 딱 적절한 거리에 있는 동대문구 구릉지가 '죽은 자들의 땅'이 된 것이다.

158필지 305,429㎡는 동대문구 전체 면적의 4.8%를 차지한다. 이 시리즈에서 분묘지 면적 비율이 5%에 가까운 구는 동대문구가 유일하다. 종로구에서 벼슬하고 창덕궁 주변에서 살던 양반들이 죽어 동대문 밖 구릉에 묻힌 것이다. 그 씨족 선산들이 158필지로 기록되어 있다.


▲ 낙산 동쪽 사면을 따라 펼쳐진 동대문구의 분묘지들. 도성 안 종로구에서 벼슬하고 살던 조선 사람들이 죽어서 이 구릉에 묻혔다

158필지 분묘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최우선 조사 대상이다. 조선 양반 가문의 씨족 선산에서는 묘비, 석상(石象), 상석, 망주석 등 석제 문화재와 함께 부장품(도자기, 금속 유물, 지석)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묘지명(墓誌銘, 돌에 새긴 묘 주인 약력)이 발굴되면 조선시대 실제 인물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분묘지 발굴 윤리: 분묘지 발굴은 문화재 보존과 후손의 감정적 반응이 충돌하는 가장 민감한 영역이다. 158필지 중 일부는 현재 후손이 생존한 가문의 선산일 수 있어, 발굴 전 반드시 지역 사회와의 협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3. 동양척식주식회사 452필지 — 수탈의 깊이를 측정하다

이 시리즈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를 추적해온 결과가 여기서 집대성된다. 동대문구 452필지는 중랑구(997필지)에 이어 이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많은 척식 토지 수다.

수탈 기관

452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

VS

왕실 소유

27필지

창덕궁

🚨 동양척식주식회사 452필지의 무게

452필지는 동대문구 전체 3,053필지의 14.8%다. 동대문구 땅의 약 7분의 1이 이미 1912년에 수탈 기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개인 소유 김씨(693필지) 다음으로 많은 필지를 보유한 두 번째 '소유자'가 바로 척식회사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동대문구에서 이렇게 많은 필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도성 외곽이라는 위치가 핵심이다. 종로구처럼 이미 복잡한 소유권이 얽혀 있는 도심부보다, 동대문구처럼 농경지가 광활하게 펼쳐진 도성 외곽이 토지 수탈의 1차 대상이 되기 쉬웠다. 1908년 설립된 척식회사가 불과 4년 만에 동대문구에서 452필지를 확보했다는 것은 그 수탈이 얼마나 빠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이 452필지는 주로 동대문구의 논밭 농경지였을 것이다. 척식회사는 소작 농민들에게 기존보다 높은 소작료를 부과하며 이 토지를 운영했다. 동대문구 김씨 693필지의 조선인 농민들 옆에서 452필지의 척식회사가 땅을 쥐고 있었다. 그 긴장 관계 속에서 1912년 동대문구 농민들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인 소유 1위 김씨 693필지. 그 바로 옆에 척식회사 452필지가 있었다. 이 두 숫자가 1912년 동대문구의 가장 날카로운 모순을 보여준다."


4. 창덕궁 27필지 — 왕실의 마지막 영토

성북구에서 창덕궁 소유지 95필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 이 시리즈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동대문구에서 27필지의 창덕궁 소유지가 또 나타났다. 나라가 망한 지 2년이 지나도 창덕궁의 이름은 서울 동쪽 땅에 살아있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452 필지

🏛️

국유지

137 필지

🏯

창덕궁

27 필지

🗾

일본인

42 필지

🏘️

마을 소유

22 필지

🏢

법인 소유

7 필지


▲ 창덕궁 소유 27필지. 조선이 망한 뒤에도 왕실의 이름이 동대문구 땅에 새겨져 있었다. 성북구(95필지)에서 동대문구(27필지)로 이어지는 창덕궁 소유지의 분포가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지도화된다

성북구 창덕궁 소유지 95필지와 동대문구 창덕궁 소유지 27필지. 두 지점을 지도에 표시하면 창덕궁 후원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간 왕실 직영 농지의 띠가 형성된다. 창덕궁 동쪽 방면의 농경지가 왕실 내수사 소속 둔전으로 관리되어 왔음을 이 시리즈가 처음으로 데이터로 증명한 것이다.

동대문구 창덕궁 27필지 구역은 성북구 95필지와 함께 왕실 관련 유구 발굴의 핵심 지점이다. 내수사 소속 농지에는 농업 시설 외에 왕실 소속 관리 창고, 세금 징수 관련 시설, 관리인 거주지 등의 유구가 함께 분포할 가능성이 있다.

🏆시리즈 창덕궁 소유지 지도 완성: 성북구 95필지(창덕궁 서북쪽) + 동대문구 27필지(창덕궁 동쪽) = 총 122필지. 두 지점의 창덕궁 소유지를 연결하면 창덕궁을 중심으로 한 조선 왕실 직영 농지의 공간 분포가 처음으로 복원된다. 이것은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역사 지리적 발견 중 하나다.


5. 철도용지 158,575㎡ — 경의선·중앙선의 흔적

동대문구에도 철도용지가 있다. 1필지 158,575㎡. 단 1필지이지만 면적은 158,575㎡로 구로구(1필지 15,497㎡)의 약 10배에 달한다.

용산구

1,724,715㎡

7필지

동대문구

158,575㎡

1필지

구로구

15,497㎡

1필지


▲ 동대문구 1필지 158,575㎡의 철도용지. 경원선 또는 경춘선의 청량리 일대 조차장 부지로 추정된다. 단 1필지가 용산구 다음으로 큰 단일 철도 필지 면적을 기록했다

1필지 158,575㎡는 단일 필지로는 이 시리즈에서 용산구 철도 필지들 다음으로 큰 철도 부지다. 이 광대한 단일 필지의 정체는 청량리 역사 및 조차장(操車場) 부지로 추정된다. 청량리역은 1911년 경원선 개통과 함께 서울 동북쪽의 주요 기점역으로 부상했다. 1912년 기록된 이 158,575㎡는 경원선 청량리역 일대 역사·조차장·부속 시설을 포함한 광대한 철도 복합 부지였을 것이다.

158,575㎡라는 광대한 단일 필지는 문화재 발굴 시 철도 관련 근대 산업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1910년대 초 개통된 경원선 청량리역 최초 역사 기초, 증기기관차 급수탑 기초, 초기 승강장 구조물 등이 지하에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6. 논 670필지 · 밭 1,476필지 — 도성 외곽의 농경 지대

동대문구의 토지 구성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밭이 논보다 2배 이상 많다는 점이 이 구역의 지형적 특성을 잘 반영한다.

1,476필지 · 43.2%

670필지 · 40.7%

대지

711필지 · 5.1%

분묘지

158필지 · 4.8%

임야

32필지 · 2.6%

철도용지

1필지 · 2.5%

밭 1,476필지가 논 670필지의 2.2배에 달한다. 동대문구는 낙산과 같은 구릉지가 많아 수리 시설이 필요한 논보다 구릉 경사면의 밭이 더 발달했다. 논은 주로 중랑천 지류 주변 저지대에, 밭은 낙산·봉화산 사면과 구릉 평지에 분포했을 것이다.

대지 711필지는 전체의 5.1%로, 이 시리즈의 다른 농촌형 구들과 비교하면 약간 높은 편이다. 도성 동대문에서 가까운 이 지역에는 도성 출입 관련 상업·주거 시설이 발달했을 것이다. 도성 문 근처의 상인, 군인, 하급 관리들의 주거지가 711필지 대지 안에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7. 성씨별 현황 — 김씨 693필지의 압도적 지배

동대문구의 성씨 분포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단순한 편에 속한다. 기록에 남은 성씨가 4개뿐이며, 1위 김씨와 나머지의 격차가 압도적이다.

1김씨693필지

2이씨305필지

3박씨208필지

4최씨107필지

김씨 693필지는 이씨(305필지)의 2.3배다. 이처럼 1위와 2위 격차가 크다는 것은 특정 김씨 가문이 동대문구 일대에 집중적인 집성촌을 형성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는 여러 김씨 가문들이 서로 다른 마을에 분산 거주하면서도 집합적으로 이 숫자를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

성씨가 4개뿐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종로구(27개), 성북구(5개 이상), 구로구(8개)와 비교하면 동대문구는 성씨 다양성이 현저히 낮다. 이는 동대문구가 도성 외곽의 소수 집성촌 중심 농촌 지대였음을, 그리고 나머지 토지 대부분이 척식회사·국유지·창덕궁 같은 집단 소유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반영한다.


8. 왜 동대문구 문화재 발굴조사는 생사(生死)를 아우르나

동대문구 문화재 발굴조사가 서울의 다른 어느 구와도 다른 이유는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의 공간이 한 땅 위에서 공존하기 때문이다.

158필지 분묘지는 죽은 자들의 기록이다. 봉분 아래 묘비, 석물, 부장품, 묘지명이 수백 년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670필지 논과 1,476필지 밭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그 땅에서 씨를 뿌리고 거두던 농민들의 일상 유구가 층위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452필지 척식회사 소유지는 수탈의 기록이고, 27필지 창덕궁 소유지는 왕실 저항의 기록이다.

이 네 가지 층위 — 죽은 자, 산 자, 수탈자, 왕실 — 가 한 구역 안에 중첩되어 있는 동대문구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어느 지점을 파도 서로 다른 역사의 층위와 만날 수 있는 서울의 가장 입체적인 역사 공간이다.

🏆성공 사례: 2021년 동대문구 용두동 재개발 부지 시굴조사에서 1912년 분묘지 기록 위치와 일치하는 구릉 사면에서 조선 후기 양반 가문 묘지명(墓誌銘) 석판 2점과 청자 및 백자 부장품 12점이 출토되었다. 묘지명에는 17세기 인물의 벼슬 이력과 가족 관계가 새겨져 있어 조선 중기 사대부 가문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452필지의 그림자. 조선인 농민들은 자신의 땅이 척식회사 명의로 기록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 동대문구 분묘지 발굴 현장. 158필지 중 어느 구릉을 파도 조선시대 선조들의 흔적과 만날 수 있다. 묘지명이 출토되는 날, 이름 없이 묻혔던 사람이 다시 역사 위로 올라온다


9. 마무리 — 수탈과 왕실과 죽은 자들의 땅에서

1912년 동대문구. 3,053필지의 땅 위에 세 개의 세계가 겹쳐 있었다. 452필지의 척식회사가 지배하는 수탈의 세계, 27필지의 창덕궁이 지키는 왕실의 마지막 세계, 그리고 158필지의 봉분 아래 잠든 죽은 자들의 세계.

그 세 세계 사이에서 김씨 693필지, 이씨 305필지, 박씨 208필지, 최씨 107필지의 평범한 농민들이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댔다. 척식회사의 그늘 아래서도, 왕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선조의 묘를 등 뒤에 두고도 — 씨를 뿌렸다.

지금 동대문구 청량리 역사 아래, 경희대 캠퍼스 아래, 신설동 주택가 아래에 그 모든 세계의 흔적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는 그 잠든 세 개의 세계를 동시에 깨우는 작업이다.

⚖️

"수탈이 452필지를 삼킬 때,왕실은 27필지로 버텼고,158개의 봉분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 모든 세계 사이에서농민들은 여전히 씨를 뿌렸다.우리가 그 땅을 파는 것은그 씨앗들에게,그 봉분들에게,그 마지막 왕실의 땅에게응답하기 위해서다."

📣 시리즈 전편 완독 도전

중랑구 → 종로구 → 용산구 → 강일동 → 양천구 → 성북구 → 개포동 → 서초구 → 구로구 → 동대문구까지 10편으로 1912년 서울의 열 가지 얼굴이 완성됩니다. 창덕궁 소유지 지도(성북구 95필지 + 동대문구 27필지)는 이 시리즈만의 독보적 발견입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 데이터는 seoulheritage.org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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