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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북구 번동 국유지 10필지 8,578㎡ — 전체의 70.3%가 대지. 북한산 자락에서 국가가 직접 관리한 건물들의 이야기.

  • 5월 30일
  • 6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대지 70% 압도 구성

10필지 중 5필지가 대지,번동 땅속에는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1912년 강북구 번동 국유지 10필지 8,578㎡ — 전체의 70.3%가 대지. 북한산 자락에서 국가가 직접 관리한 건물들의 이야기.

10필지 중 절반이 대지였습니다.


그것도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대지가요.


북한산 기슭 번동에는


도대체 어떤 건물이 있었을까요?

서울 강북구 번동.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수유역과 미아역 사이, 조용한 주택가가 자리를 지키는 이 동네는 110년 전 꽤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번동 국유지는 10필지, 8,578㎡. 면적으로는 이 시리즈에서 손에 꼽을 만큼 소규모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국유지의 내부 구성이 매우 이례적입니다. 10필지 중 무려 5필지, 면적으로는 6,026㎡로 전체의 70.3%가 대지(垈地)입니다. 논 1필지, 밭 3필지, 임야 1필지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지만, 압도적 다수는 대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번동이라는 작은 동네에, 국가가 직접 관리한 건물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건물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오늘 이 글의 핵심 여정입니다.

10필지총 국유지 필지 수

8,578㎡총 면적 (약 2,595평)

70.3%대지 비율 — 압도적

4종토지 유형 수


목 차

1.번동(樊洞)의 이름과 북한산 자락의 역사

2.1912년 번동 전체 데이터 — 대지 70%의 충격

3.대지 6,026㎡ — 5필지에 숨겨진 건물들의 정체

4.밭 1,233㎡ + 임야 839㎡ + 논 479㎡ — 세 지목이 던지는 단서

5.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번동 조사 전략

6.강북구 발굴 성공 사례와 번동의 가능성


1

번동(樊洞)의 이름과 북한산 자락의 역사

문화재 기초조사는 언제나 이름을 읽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번동(樊洞). 한자로 울타리 번(樊)에 골 동(洞). '울타리 마을' 혹은 '새장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 이름이 언제, 왜 붙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새를 가두는 울타리처럼 무언가를 보호하는 공간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중요한 시설을 둘러싼 경계가 있었을까요?

번동은 강북구에서도 북쪽에 위치합니다. 북쪽으로는 도봉산과 이어지는 산자락이 내려오고, 남쪽으로는 우이천(牛耳川)이 흐릅니다. 우이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해 강북구를 관통한 뒤 중랑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입니다. 번동은 이 우이천 상류의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 잡은 동네입니다. 산과 하천 사이의 이런 지형은 조선 시대에 소규모 관청 시설이나 군사 관련 시설이 들어서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번동 일대는 조선 시대 도성 북쪽의 방어 체계와 연결됩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중심으로 한 도성 외곽 방어선은 강북구 일대를 관통했고, 이 방어 체계를 지원하는 다양한 시설들이 북쪽 산자락 마을들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번동 국유지의 대지 70%는 이런 역사적 맥락과 깊이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樊 洞

번동 — 울타리 마을, 경계를 품은 동네

우이천 상류와 도봉산 자락이 만나는 지점. 조선 시대 북한산성 방어 체계와 연결된 북쪽 산자락 마을. '번(樊)'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경계·보호의 기능이 국유 대지 70%라는 데이터와 겹쳐 읽힙니다.



2

1912년 번동 전체 데이터 — 대지 70%의 충격

숫자를 직접 마주해봅시다. 10필지 8,578㎡. 이 중 대지 5필지 6,026㎡가 70.3%입니다. 나머지 4필지가 나머지 29.7%, 2,552㎡를 나눕니다. 이 비율은 이 시리즈를 통틀어 매우 이례적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국유지들은 대부분 논·밭·임야 같은 농경지나 산림이 주를 이루었고, 대지가 있더라도 전체의 20~30%를 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번동에서는 대지가 70%를 넘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번동 국유지는 농업 생산이나 산림 보전을 주 목적으로 한 토지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를 짓고, 무언가를 운영하기 위한 토지였습니다. 국가가 직접 건물을 세우고 관리했던 공간. 그것이 번동 국유지의 본질적인 성격입니다.

토지 유형

필지 수

면적 (㎡)

비율

대지 (垈地)

5필지

6,026㎡

70.3%

밭 (田)

3필지

1,233㎡

14.4%

임야 (林野)

1필지

839㎡

9.8%

논 (畓)

1필지

479㎡

5.6%

합계

10필지

8,578㎡

100%

70.3%

대지가 국유지 전체의 70%를 넘습니다

5필지 6,026㎡의 국유 대지. 이 시리즈에서 농경지·산림이 아닌 건물 용지가 70%를 넘은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번동에는 분명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국가 시설이 있었습니다.

대지 70.3%

밭 14.4%

임야 9.8%

대지 6,026㎡

밭 1,233㎡

임야 839㎡

논 479㎡


3

대지 6,026㎡ — 5필지에 숨겨진 건물들의 정체

5필지, 6,026㎡의 국유 대지. 이 다섯 필지에는 어떤 건물들이 서 있었을까요? 번동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을 종합하면 몇 가지 유력한 후보가 떠오릅니다.

5필지라는 구성이 중요합니다. 단 하나의 큰 건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채의 건물이 번동 국유지 안에 분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런 복합 시설 구성은 역원(驛院), 관청 복합 시설, 혹은 군사 시설의 본관과 부속 건물들이 함께 배치된 경우에 자주 나타납니다. 한 필지당 평균 1,205㎡, 약 365평씩. 이것은 작은 건물 1~2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입니다.

번동의 위치와 역사를 고려하면 가장 유력한 정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역원(驛院) 관련 시설입니다. 조선 시대 도성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역원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번동 부근에 역원이 있었다면, 본관·마구간·창고·숙소 등 여러 필지의 건물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북한산성 방어 관련 지원 시설입니다. 조선 후기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핵심 요새였고, 이 방어 체계를 지원하는 군량 창고, 병기고, 병사 숙소 등이 산성 아래 마을들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셋째, 지방 관아(官衙) 부속 시설입니다. 당시 양주군(楊州郡) 관할이었던 이 지역에서 군현 행정을 위한 소규모 출장소나 창고가 대지 필지로 등록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역원(驛院) 복합 시설

본관·마구간·숙소·창고 등 다수 건물 필지. 5필지 구성과 정확히 맞아 떨어짐. 역 관련 생활 유물 다량 출토 가능.

북한산성 지원 시설

군량 창고·병기고·병사 숙소 등. 조선 후기 북한산성 방어 체계의 하부 지원 거점. 군사 유물 발굴 가능성.

관아 부속 시설

양주군 관할 지역 행정 지원 건물. 관청 관련 문서·인장·도자기 등 행정 유물 출토 가능.

"5필지 대지, 6,026㎡. 이 다섯 개의 필지가 모두 다른 기능의 건물 터였다면, 번동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조선 시대 북쪽 길목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그 다섯 채 건물의 초석을 하나씩 찾아내는 것이 번동 문화재 발굴의 핵심 과제입니다."



4

밭 1,233㎡ + 임야 839㎡ + 논 479㎡ — 세 지목이 던지는 단서

대지의 압도적 존재감 속에서, 나머지 세 지목이 조용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밭 3필지 1,233㎡, 임야 1필지 839㎡, 논 1필지 479㎡. 각각 14.4%, 9.8%, 5.6%입니다.

밭 3필지 1,233㎡는 흥미롭게도 3개 필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대지 5필지와 합산하면 전체 10필지 중 8필지가 대지 또는 밭입니다. 이 밭들은 대지 위 건물들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자급하는 부속 농경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원의 경우 역리(驛吏)들이 먹을 채소와 작물을 직접 재배하는 소규모 밭이 역원 구내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번동 밭 3필지는 대지 5필지 건물들과 같은 공간 안에 배치된 부속 경작지였을 수 있습니다.

임야 1필지 839㎡는 작지만 의미심장합니다. 대지가 70%인 동네에서 임야가 단 하나만 있다는 것은, 이 숲이 특정 목적으로 지정·보호된 공간임을 시사합니다. 건물들 뒤편의 방풍림이거나, 건물 주변 경계를 표시하는 보호 식재 구역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이 임야가 대지와 인접해 있다면 건물 관련 석재나 목재를 조달하는 소규모 채석·채목 구역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논 1필지 479㎡는 가장 작은 필지입니다. 우이천의 물을 끌어들인 소규모 수전으로, 건물 운영에 필요한 쌀을 자급하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밭 (田) · 3필지

1,233㎡

대지 건물 부속 경작지 가능성 — 역원 채소밭 등

임야 (林野) · 1필지

839㎡

건물 경계 방풍림 또는 보호 산림

논 (畓) · 1필지

479㎡

우이천 수원 소규모 수전 — 건물 운영 쌀 자급

세 지목 합산

2,552㎡

대지 건물을 지원하는 부속 토지 복합체

"밭·임야·논이 모두 대지와 한 공간 안에 있었다면, 번동 국유지는 완전히 자급자족 가능한 복합 시설이었습니다.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을 먹여 살리는 밭과 논이 있고, 경계를 지키는 숲이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 역원이나 군사 주둔지의 전형적인 구성입니다."



5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번동 조사 전략

10필지 8,578㎡. 규모는 작지만, 대지 70%라는 구성이 만들어내는 조사 전략은 일반 농경지 중심 국유지와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건물 터를 찾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1

문헌 기초조사 — 번동 지역 역원·관청·군사 기록 추적

조선왕조실록,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조선 시대 지리지에서 양주군 번동 일대의 역원, 관아, 군사 시설 기록을 집중 검토합니다. 특히 북한산성 관련 지원 시설 기록과 조선 시대 도성 북방 역도(驛道) 관련 자료를 추적합니다. 1912년 이전 고지도에서 번동 위치에 표시된 건물이나 시설 기호를 확인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2

지표조사 — 건물 터를 찾는 집중 답사

8,578㎡의 소규모 부지이므로 전체를 정밀 답사할 수 있습니다. 대지 5필지 구역을 최우선 답사 대상으로, 각 필지에서 인위적 평탄면, 기와 파편 산포, 석재 잔재, 토색 이상을 꼼꼼히 기록합니다. 5필지 대지가 연속된 하나의 공간인지, 아니면 떨어진 위치에 분산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3

시굴조사 — 건물 기초를 향한 첫 삽

지표조사에서 기와 파편이나 토색 이상이 발견된 대지 구역에 우선 트렌치를 설치합니다. 역원이나 관청 건물의 경우 초석(礎石)이 지하 30~60cm 깊이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트렌치 방향은 예상 건물의 장축과 수직으로 설치해 기초 구조를 파악합니다.

4

표본조사 — 10필지 전체 구조 파악

10필지를 모두 개별 표본 구역으로 설정합니다. 소규모 부지이므로 표본 비율을 높게 가져가도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대지·밭·임야·논 4종의 지목별로 각각 다른 조사 기법을 적용합니다. 임야 839㎡는 표토 낙엽 제거 후 경계석이나 석재 잔재를 확인합니다.


5

발굴조사 — 번동의 정체를 밝히다

시굴에서 건물 기초 유구가 확인되면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아 전면 발굴을 시작합니다. 8,578㎡의 소규모 부지는 발굴 완료까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입니다. 발굴에서 역원 관련 유구가 확인된다면, 번동은 조선 시대 도성 북방 교통·군사 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됩니다.



6

강북구 발굴 성공 사례와 번동의 가능성

번동의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 바로 같은 강북구 안에 있습니다.

성공 사례 01

강북구 우이동 — 100년 전 기록이 시작한 역사 추적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같은 강북구의 우이동에서도 100년 전 국유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문화재 기초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만나는 우이동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사찰과 군사 시설이 밀집한 역사 지대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데이터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우이동의 사례는 북한산 자락 강북구 동네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잠재력을 잘 보여줍니다. 번동은 우이동과 같은 산자락 벨트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강북구 수유동 — 조선 시대 북방 교통로 인접 국유지 조사

강북구 수유동 역시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서 100년 전 기록을 바탕으로 한 기초조사가 이루어진 동네입니다. 수유동은 조선 시대 도성과 양주를 잇는 주요 도로 인근에 위치해 있어, 역원이나 관아 관련 시설의 역사적 흔적이 탐색되었습니다. 번동도 이 같은 북방 교통로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수유동 조사 사례는 번동 대지 70%의 역사적 의미를 해석하는 중요한 참조점이 됩니다.

10필지, 8,578㎡. 이 시리즈에서 규모로는 작은 편에 속합니다. 하지만 대지 70.3%라는 구성은 이 작은 땅이 놀랍도록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북한산 자락의 번동, 우이천이 흐르는 조용한 마을 어딘가에, 조선 시대 국가가 세우고 관리한 건물들이 지금도 땅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 초석 하나를 찾아내는 날, 번동이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가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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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땅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누군가 그 집의 기둥을 세우고기와를 올렸습니다.그 사람의 이름은 모르지만,그가 박은 초석은 아직 땅속에 있습니다.10필지, 8,578㎡.작은 숫자 안에 큰 역사가 있습니다.번동의 땅은누군가 첫 삽을 뜨기를북한산을 바라보며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번동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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