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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금천구 1,516필지 4,640,738㎡ — 논·밭이 전체의 87%를 덮은 농경 지대,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낮은 일본인 소유 비율의 비밀.

  • 5월 30일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논+밭 86.6% 농경 왕국일본인 겨우 3필지

1912년 금천구,일본인은 3필지였다— 조선인의 땅이 지켜진 이유

1912년 서울 금천구 1,516필지 4,640,738㎡ — 논·밭이 전체의 87%를 덮은 농경 지대,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가장 낮은 일본인 소유 비율의 비밀.

같은 1912년,


서울 중구 일본인 소유 3,264필지.


서울 금천구 일본인 소유 단 3필지.


이 극적인 차이,


왜 생겼을까요?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 서울 도심인 중구에서는 이미 일본인이 3,264필지를 소유하며 토지 지형을 급격히 재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같은 서울 안의 금천구에서는 일본인 소유 필지가 고작 3필지에 불과했습니다. 이 극적인 대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1912년 금천구는 1,516필지 4,640,738㎡ 중 86.6%가 논과 밭이었습니다. 조선인 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 마을 공유지 6필지. 광활한 안양천 변 농경지대를 조선인들이 아직 굳건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땅 아래에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는지를 지금부터 낱낱이 들여다보겠습니다.

1,516필지총 필지 수

4,640,738㎡총 면적 (약 140만평)

86.6%논+밭 면적 비율

단 3필지일본인 소유 — 최저


목 차

1.1912년 금천구 토지 전체 데이터 — 농경 왕국의 실체

2.논 46.5% + 밭 40.1% — 안양천이 만든 서울 최대 농경 지대

3.특수 지목들 — 철도·잡종지·사사지·지소가 말하는 것

4.일본인 3필지의 비밀 — 왜 금천구는 달랐나

5.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 — 조선인의 땅을 지킨 사람들

6.중구 vs 금천구 — 같은 1912년, 전혀 다른 두 세계

7.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금천구 조사 전략

8.금천구 발굴 성공 사례와 역사적 의미


1

1912년 금천구 토지 전체 데이터 — 농경 왕국의 실체

1,516필지 4,640,738㎡. 서울 25개 구 중에서 금천구의 현재 면적은 13.0㎢로 작은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1912년 기록에 등장하는 4,640,738㎡는 현재 행정 구역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 금천 지역 일대의 토지 규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데이터입니다. 이 광활한 토지의 구성은 놀랍도록 단순합니다. 논과 밭이 전체 면적의 86.6%를 차지합니다. 금천구는 1912년 당시 서울 근교에서 가장 넓은 농경지대 중 하나였습니다.

토지 유형

필지 수

면적 (㎡)

비율

논 (畓)

591필지

2,156,260㎡

46.5%

밭 (田)

725필지

1,860,719㎡

40.1%

잡종지 (雜種地)

20필지

285,310㎡

6.2%

대지 (垈地)

162필지

225,779㎡

4.9%

임야 (林野)

12필지

61,401㎡

1.3%

철도용지

1필지

47,140㎡

1.0%

사사지 (寺社地)

3필지

2,998㎡

0.1%

지소 (池沼, 연못)

2필지

1,127㎡

0.0%

합계

1,516필지

4,640,734㎡

100%

논 46.5%

밭 40.1%

잡종지 6.2%

대지

논 2,156,260㎡

밭 1,860,719㎡

잡종지 285,310㎡

대지 225,779㎡

임야 61,401㎡

기타



2

논 46.5% + 밭 40.1% — 안양천이 만든 서울 최대 농경 지대

논 591필지 2,156,260㎡, 밭 725필지 1,860,719㎡. 합산하면 1,316필지 4,016,979㎡로 전체의 86.6%입니다. 이것은 이 시리즈에서 이미 살펴본 어떤 지역보다도 농경지 비율이 높은 수치입니다. 금천구 전체가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농경 지대였다는 뜻입니다.

이 광활한 논밭의 배경에는 안양천(安養川)이 있습니다. 경기도 안양에서 발원해 금천구를 관통한 뒤 한강으로 합류하는 안양천은, 이 일대에 수천 년에 걸쳐 비옥한 충적 평야를 만들어왔습니다. 하천이 운반한 토사가 쌓여 형성된 이 충적지는 물 공급이 풍부하고 토질이 뛰어나 쌀 생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습니다. 논 591필지 중 대부분이 이 안양천 변 충적지에 형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필지 수 기준으로는 밭이 725필지로 논 591필지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면적 기준으로는 논이 2,156,260㎡로 밭 1,860,719㎡보다 넓습니다. 이것은 논의 평균 필지 크기(약 3,648㎡)가 밭의 평균 필지 크기(약 2,566㎡)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규모 있는 수전 지대와 상대적으로 작은 밭들이 혼재하는 형태가 1912년 금천구 농경 지형의 특성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광대한 논밭 지대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안양천 충적층에는 유기질 유물이 보존되기 좋은 혐기성 환경이 형성되어 있어, 목재·씨앗·섬유류 등의 유기질 유물이 수백 년간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1,316필지의 논밭에는 수로, 보(洑), 제방, 논둑 같은 조선 시대 수리 시설의 흔적이 지하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농업 인프라 유구는 조선 시대 농업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논 2,156,260㎡ + 밭 1,860,719㎡ = 4,016,979㎡. 이 면적은 여의도 전체 면적의 약 14.6배입니다. 1912년 금천구는 안양천 변에 펼쳐진 서울 최대 규모의 조선인 농경 지대였습니다."



3

특수 지목들 — 철도·잡종지·사사지·지소가 말하는 것

86.6%의 논밭이 지배하는 금천구 안에서도, 나머지 13.4%를 채우는 특수 지목들이 이 지역의 복잡한 역사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지목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근대 충격

철도용지

47,140㎡

1필지. 경부선이 금천 농경지를 관통하며 남긴 흔적. 독산동 철도용지와 동일 선로. 철도 이전 지층의 역사 유구 잔존 여부 확인 필요.

조사 핵심

잡종지

285,310㎡

20필지. 전체의 6.2%. 군사·관청·하천 부속 시설 가능성. 정체불명이라는 사실이 가장 다양한 발굴 가능성을 열어줌.

발굴 우선

사사지

2,998㎡

3필지. 사찰 혹은 신사 관련 부지. 금천 일대 불교 역사와 연결. 건물 기초·석조물·불교 유물 출토 가능.

희귀 지목

지소 (池沼)

1,127㎡

2필지. 이 시리즈 최초 등장 지목. 연못·늪지. 생태 환경 유지 또는 관개 저수지 기능. 수중 유물 보존 가능성.

특히 지소(池沼) 2필지 1,127㎡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지목입니다. 연못이나 늪지를 가리키는 지소는 조선 시대 농경 용수를 저장하는 저수지나, 풍수지리상 특별한 의미를 가진 연못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연못이나 늪지는 혐기성 환경으로 인해 유기질 유물의 보존 상태가 특히 좋습니다. 수중 발굴 조사를 통해 목기(木器), 도자기, 씨앗류 등이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금천구 문화재 기초조사에서 이 두 필지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소(池沼) 2필지.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지목입니다. 연못은 땅이 아닌 물 속에 역사를 담습니다. 수백 년 된 목제 유물, 씨앗, 심지어 완전한 형태의 도자기가 연못 바닥에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4

일본인 3필지의 비밀 — 왜 금천구는 달랐나

1912년 중구에서 일본인이 3,264필지를 소유하던 바로 그 해에, 금천구에서는 일본인 소유 필지가 단 3필지에 불과했습니다. 이 극적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입지입니다. 중구는 한양 도성의 중심, 즉 조선 왕조의 정치·경제·문화 핵심 지대였습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거점을 먼저 도심에 구축했기 때문에, 중구에서의 토지 수탈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반면 금천 지역은 당시 한양 도성에서 상당히 떨어진 근교 농촌 지대였습니다. 일제의 토지 수탈이 도심에서 바깥쪽으로 순서대로 진행되었다면, 1912년 시점에는 아직 금천 지역까지 본격적인 수탈이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토지 유형입니다. 일제는 도시 지역의 대지(집터)와 상업 용지를 우선적으로 수탈했습니다. 금천구처럼 논밭이 86.6%를 차지하는 농촌 지역에서는, 상업적 가치가 높은 도심 부동산보다 수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2년은 아직 일제의 농지 수탈이 본격화되기 전 단계였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조선인 공동체의 결속입니다. 101필지의 국유지, 6필지의 마을 공유지, 그리고 이씨 313필지·김씨 256필지로 대표되는 촘촘한 조선인 소유 구조는 외부 침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방어막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마을 공유지 6필지는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관리하던 토지로, 매각이나 수탈이 개인 토지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서울 중구 (1912)

3,264필지

일본인 소유


도심·상업 중심 수탈 진행


전체의 약 28%

서울 금천구 (1912)

단 3필지

일본인 소유


농촌 지대 수탈 미진행


전체의 0.2% 미만


5

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 — 조선인의 땅을 지킨 사람들

1912년 금천구의 토지 소유자 구조를 보면, 조선인들이 이 땅의 압도적 다수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로 시작하는 성씨 랭킹. 그리고 9필지의 법인, 6필지의 마을 공유지, 101필지의 국유지까지.

소유자별 필지 분포 (1912년 서울 금천구)

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

국유지

101필지

법인

9필지

마을공유

6필지

일본인

3필지

조선인 성씨 상위 2개 합산

569필지

이씨(313) + 김씨(256)

이 두 성씨만으로 금천구 전체 1,516필지의 37.5%를 차지합니다. 여기에 다른 조선인 성씨들까지 합산하면, 조선인 소유 필지가 전체의 80%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12년 금천구는 조선인의 땅이었습니다.

마을 공유지 6필지는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 시대 마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소유·관리하던 이 토지는 산림, 공터, 공동 경작지 등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마을 공유지는 개인 토지보다 역사적 연속성이 강하고, 일제의 토지 수탈에도 상대적으로 더 잘 버텨낼 수 있는 소유 구조였습니다. 이 6필지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문화재 기초조사에서 중요한 과제입니다.

"마을 공유지 6필지. 이것은 단순한 토지가 아닙니다. 금천 지역 조선인 마을 공동체가 함께 관리하고 지켜온 공간의 기록입니다. 그 땅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지역 공동체 역사 연구의 출발점입니다."



6

중구 vs 금천구 — 같은 1912년, 전혀 다른 두 세계

이 시리즈에서 가장 흥미로운 비교 중 하나가 바로 중구와 금천구입니다. 같은 서울, 같은 1912년이지만, 두 지역의 토지 구조는 마치 다른 나라처럼 대조적입니다.

항목

서울 중구

서울 금천구

총 필지 수

11,623필지

1,516필지

총 면적

6,824,623㎡

4,640,738㎡

대지(집) 비율

53.5%

4.9%

논+밭 합계 비율

34.5%

86.6%

일본인 소유 필지

3,264필지

3필지

동양척식 소유

107필지

미확인

마을 공유지

미확인

6필지

지역 성격

도심·상업·행정

농경·농촌

중구가 도시와 식민 지배의 최전선이었다면, 금천구는 아직 조선의 농촌 공동체가 살아 숨쉬고 있었던 공간이었습니다. 중구에서 일본인이 3,264필지를 차지하는 동안, 금천구에서는 이씨와 김씨가 569필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같은 나라, 같은 해, 전혀 다른 두 세계. 이 대조가 1912년 조선의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7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금천구 조사 전략

4,640,738㎡, 1,516필지. 이 광대한 농경 지대를 어떻게 조사할까요? 금천구의 특성상 농경지 중심의 조사 전략이 핵심입니다.

1

문헌 기초조사 — 금천현 역사와 안양천 수리 기록 추적

조선 시대 금천현(衿川縣) 관련 기록, 안양천 수리 시설 문헌, 마을 공유지 관련 고문서, 조선 후기 지리지를 종합합니다. 1912년 토지 대장의 소유자 성씨와 필지 위치를 현재 지적도와 대조해 역사 지형도를 작성합니다. 지소(池沼) 2필지의 위치를 고지도에서 특정하는 작업도 이 단계의 핵심 과제입니다.

2

지표조사 — 농경지 지표조사의 특수 전략

86.6%의 논밭을 대상으로 한 지표조사는 대규모·장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선 사사지 3필지, 잡종지 20필지, 지소 2필지를 최우선 답사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논·밭 지역은 경작층 아래 구 지표면의 유물 산포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며, 특히 안양천 변 충적층 지역을 집중 답사합니다.

3

표본조사 — 1,516필지의 전략적 표본 설계

전체를 논 구역·밭 구역·특수 지목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표본 비율을 적용합니다. 논 지역은 안양천 인접부를 높은 비율로, 고지대 논을 낮은 비율로 표본 설계합니다. 잡종지 20필지는 전체를 표본 대상으로 지정해 독립적으로 조사합니다.

4

시굴조사 — 충적층과 특수 지목 집중 시굴

안양천 변 충적층 논 지역은 유기질 유물 보존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선별해 시굴합니다. 사사지 3필지는 각각 독립 시굴 대상으로 설정하고, 지소 2필지는 수중 시굴 또는 주변 육상 시굴을 병행합니다. 철도용지 인접 구역은 철도 건설 이전 지층 잔존 여부를 확인합니다.

5

발굴조사 — 금천 농경 문화의 역사를 꺼내다

시굴에서 수리 시설 유구나 사찰 관련 유구가 확인되면 국가유산청 허가 하에 전면 발굴을 시작합니다. 조선 시대 금천현 농업 인프라가 발굴된다면, 서울 서남부 농업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나올 것입니다.



8

금천구 발굴 성공 사례와 역사적 의미

금천구 전체 데이터의 가능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미 이 시리즈에서 다룬 금천구 내 개별 동네들의 발굴 기초조사 사례들입니다.

성공 사례 01

금천구 시흥동 — 20필지 51,702㎡, 잡종지 발굴의 선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금천구 시흥동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은 20필지 51,702㎡로, 이 중 잡종지를 포함한 복합 지목 구성이 문화재 기초조사의 중요 대상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시흥동 사례는 금천구 전체 잡종지 20필지 285,310㎡의 발굴 가능성을 해석하는 중요한 선례가 됩니다. 금천구 전체 잡종지는 시흥동 국유지 전체 면적의 5.5배에 달합니다.

성공 사례 02

금천구 독산동 — 81필지 444,332㎡, 철도용지를 포함한 복합 조사

금천구 독산동의 1912년 국유지 기록에서 철도용지 1필지 47,140㎡가 확인되었습니다. 금천구 전체 기록의 철도용지 47,140㎡와 면적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보면, 금천구 전체 철도용지가 바로 이 독산동 경부선 구간과 동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산동 철도용지 기초조사는 금천구 전체 철도 문화재 조사의 핵심 사례가 됩니다.

1,516필지, 4,640,738㎡. 이 숫자들은 1912년 금천구가 얼마나 광활하고, 얼마나 조선인의 손으로 가득 찬 땅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일본인 단 3필지, 마을 공유지 6필지, 이씨 313필지, 김씨 256필지. 그 사람들이 일구고 지켜온 논밭 아래에, 안양천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충적층 안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금천의 역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일본인 단 3필지의 금천구, 그 땅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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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 논을 갈고,김씨가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마을 사람들이 함께 보(洑)를 쌓아안양천 물을 논으로 끌어들였습니다.1912년 금천구는일본인이 3필지를 가지는 동안조선인이 천 필지 넘는 땅을 지켰습니다.그 땅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그들이 남긴 논두렁과 수로의 흔적은안양천 충적층 깊은 곳에아직 남아 있습니다.그것을 꺼내는 날,금천의 진짜 역사가 시작됩니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1912년 금천구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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