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들판이 품은 110년의 비밀1912년 서울 공릉동 국유지를 파헤치다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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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숲과 들판이 품은 110년의 비밀1912년 서울 공릉동 국유지를 파헤치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 12필지 99,197㎡의 국유지. 그 광활한 땅 아래, 어떤 역사가 잠들어 있을까요?
99,197㎡, 약 3만 평의 땅이
110년 동안 침묵을 지켜왔습니다.
지금, 그 입을 열어드립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아니면 가볍게 오르기 좋은 불암산 산자락 정도를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110년 전, 이 동네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토지 대장에는 공릉동 안에 무려 12필지, 합산 면적 99,197㎡에 달하는 국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구장 약 14개에 해당하는 이 넓은 땅은, 당시 임야와 밭, 그리고 대지로 나뉘어 국가 소유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 아래에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역사의 조각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능성을 데이터와 스토리로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12필지총 국유지 필지 수
99,197㎡총 면적 (약 30,001평)
1912년지적 등록 연도
목 차
1.1912년 공릉동 국유지 — 숫자로 읽는 땅의 역사
2.임야 48,929㎡ — 서울 숲이 품은 역사의 층위
3.밭 38,515㎡ — 국가가 경작한 땅의 의미
4.대지 11,752㎡ — 건물이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
5.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절차 완전 해설
6.노원구에서 실제로 발굴된 역사 — 성공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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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공릉동 국유지 — 숫자로 읽는 땅의 역사
1912년은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일제는 조선 전역을 대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각 지역의 토지 대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릉동의 국유지가 공식 기록에 포착됩니다. 총 12필지, 99,197㎡. 당시 노원구 일대는 지금처럼 아파트와 대학 캠퍼스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북쪽으로 불암산, 남쪽으로 중랑천이 흐르는 이 일대는 광활한 임야와 농경지가 펼쳐진 전형적인 근교 지대였습니다.
12필지를 세 가지 토지 유형으로 분류하면 이렇습니다. 면적 기준으로 가장 넓은 것은 임야(林野)로, 8필지에 48,929㎡. 전체의 49.3%를 차지합니다. 두 번째는 밭(田)으로 3필지, 38,515㎡, 전체의 38.8%. 마지막으로 대지(垈地)가 1필지, 11,752㎡, 전체의 11.8%를 차지합니다. 이 구성은 매우 이례적이고 흥미롭습니다. 특히 대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농경지나 산림이 아닌 어떤 건축물이나 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호입니다.
토지 유형 | 필지 수 | 면적 (㎡) | 비율 |
임야 (林野) | 8필지 | 48,929㎡ | 49.3% |
밭 (田) | 3필지 | 38,515㎡ | 38.8% |
대지 (垈地) | 1필지 | 11,752㎡ | 11.8% |
합계 | 12필지 | 99,197㎡ | 100% |
임야
48,929㎡ (8필지)
밭
38,515㎡ (3필지)
대지
11,752㎡ (1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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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 48,929㎡ — 서울 숲이 품은 역사의 층위
공릉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임야입니다. 8필지에 걸쳐 총 48,929㎡, 약 14,801평에 달하는 국유 임야가 이 동네 어딘가에 존재했습니다. 이 숫자를 실감하려면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축구장 약 6.8개를 이어 붙인 크기의 숲이 전부 국가 소유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국유 임야는 왜 중요할까요? 문화재 고고학의 관점에서 임야는 결코 단순한 산림이 아닙니다. 조선 시대의 산림 국유지는 대부분 특정 목적을 가지고 지정되었습니다. 왕실 소유의 능림(陵林), 즉 왕릉 주변 보호 산림이거나, 군사 목적의 요새지, 혹은 사찰의 부속 산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릉동이라는 지명 자체에도 힌트가 있습니다. '공릉(恭陵)'은 조선 예종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의 능호입니다. 실제로 공릉은 경기도 파주에 있지만, 이 지명이 이곳에 붙었다는 사실은 서울 북동부 일대에 왕실과 관련된 토지나 시설이 분포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또한 8필지라는 필지 수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의 큰 산림을 여러 구획으로 나눈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위치에 산재한 여러 임야 필지인지에 따라 역사적 해석이 달라집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이런 임야 내부의 지형 변화, 인위적으로 조성된 평탄면, 석축 흔적, 매몰된 석물(石物) 등을 면밀히 살피게 됩니다. 불암산 자락의 임야라면, 산중 사찰 터나 조선 시대 군사 관련 시설의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임야는 발굴의 무덤이자 발굴의 보고(寶庫)입니다. 나무뿌리가 유구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숲이 수백 년간 사람의 손을 막아 유물을 온전히 보존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릉동 국유 임야 8필지는 그 두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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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38,515㎡ — 국가가 경작한 땅의 의미
두 번째로 큰 면적, 3필지에 38,515㎡의 국유 밭. 전체 면적의 38.8%를 차지하는 이 농경지는 단순히 채소를 키우던 땅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 시대 국유 밭은 크게 세 가지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첫째는 관둔전(官屯田)입니다. 군영(軍營)이나 관청이 직접 경작하여 운영 비용을 충당하던 땅입니다. 공릉동 일대에는 조선 후기까지 군사 관련 시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관둔전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그 주변에는 군사 시설 관련 유구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능침전(陵寢田)입니다. 왕릉이나 왕실 묘소 주변에 설치해 제사 비용을 충당하던 농경지입니다. 공릉이라는 지명과 연결 지으면, 이 밭들이 왕실 제례와 연관된 용도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는 역(驛)과 연결된 역전(驛田)입니다. 조선 시대 역원(驛院) 체계에서 각 역에 배정된 농지가 바로 역전입니다. 노원구 일대에는 조선 시대 노원역(蘆原驛)이 있었던 것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어, 이 국유 밭이 노원역과 연결된 역전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3필지라는 필지 구성도 의미 있게 읽힙니다. 38,515㎡를 세 필지로 나누었다는 것은, 각기 다른 용도나 관리 주체가 있었음을 시사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다면, 이 밭 지역에서 기와 파편, 도자기 조각, 농기구 관련 철기 유물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경작 활동으로 인해 지표 가까이로 올라온 유물들이 지표조사 단계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둔전 가능성
군영·관청 경작지
군사 시설 유구 출토 가능성
능침전 가능성
왕실 제례 관련 농지
공릉 지명과의 연관성
역전 가능성
노원역 부속 농경지
조선 노원역 기록과 일치
예상 출토 유물
기와·도자기·철기
지표조사 1순위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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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11,752㎡ — 건물이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공릉동 국유지 중 가장 작은 면적이지만,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대지(垈地) 1필지, 11,752㎡입니다. 대지란 건물이 세워지거나 건물 용도로 지정된 땅을 말합니다. 단순히 경작이나 산림 용도가 아니라, 실제로 어떤 구조물이 존재했거나 존재할 예정이었던 땅이라는 뜻입니다.
11,752㎡, 약 3,555평에 달하는 국유 대지가 공릉동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규모의 국유 대지라면, 조선 시대 기준으로 작은 규모의 관청, 군사 시설, 혹은 왕실 관련 시설이 들어서기에 충분한 면적입니다. 실제로 공릉동 일대에는 조선 시대 군사 훈련 관련 기록이 남아 있으며, 군사 시설과 연관된 건물 터가 이 대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화재 고고학에서 옛 대지 터는 최우선 발굴 조사 대상입니다. 건물이 세워졌던 자리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습니다. 기둥을 받쳤던 초석(礎石), 벽체를 구성한 석축, 온돌 시설의 연도(煙道), 배수 시설인 수혈(竪穴), 그리고 당시 생활을 보여주는 다양한 생활 유물들이 지하에 매장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대형 관청 건물이 있었다면, 건물 배치도를 알 수 있는 기단(基壇) 유구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대지 구역은 항상 가장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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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절차 완전 해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이 생기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조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문화재 발굴 기초조사는 크게 네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단계마다 목적과 방법이 다르고, 각각의 결과가 다음 단계를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이 절차를 이해하면, 공릉동 국유지 같은 역사적 토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문화재로 인정받게 되는지 훨씬 명확하게 보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지표조사(地表調査)입니다.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을 육안으로 조사하는 단계입니다. 고고학자와 역사 전문가가 함께 해당 부지를 걸어다니며 지형, 유물 파편의 산포 여부, 인위적인 지형 변화 등을 꼼꼼히 기록합니다. 1912년 토지 대장 같은 고문헌 분석도 이 단계에서 병행됩니다. 공릉동 국유지처럼 역사적 맥락이 뚜렷한 토지는 지표조사만으로도 중요한 단서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시굴조사(試掘調査)입니다. 지표조사에서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면, 전체 부지의 일부 구간에 트렌치를 굴착하여 지하 상황을 파악합니다. 보통 전체 면적의 5~10% 정도를 표본으로 선택해 시굴합니다. 공릉동의 경우 대지 구역 주변을 우선 시굴 대상으로 선정하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타당한 접근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표본조사(標本調査)입니다. 시굴조사와 유사하지만, 더 넓은 범위에서 비율적으로 일부를 선택해 조사하는 방식입니다. 99,197㎡처럼 대규모 부지에서 특히 유용한 방법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발굴조사(發掘調査)입니다. 시굴이나 표본조사에서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면, 해당 구역을 전면적으로 발굴합니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과거의 건물 배치, 생활 양식, 매장된 유물의 종류와 수량이 온전히 밝혀집니다. 발굴조사는 국가유산기본법에 따라 국가유산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발굴 조사 기관만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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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에서 실제로 발굴된 역사 — 성공 사례
이론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으시죠. 실제로 서울, 그것도 노원구에서 역사가 땅 위로 올라온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 공릉동 국유지 99,197㎡의 가능성이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님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성공 사례 01
노원구 월계동 — 초안산 분묘군과 조선 내시 1,000기의 무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노원구 월계동에는 1912년 기준 2필지, 3,094㎡의 국유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작은 국유지 바로 옆에는 놀라운 역사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국가 사적 제440호로 지정된 초안산 분묘군(草安山 墳墓群), 즉 조선 시대 내시(內侍)들의 무덤이 1,000기 이상 밀집해 있는 것입니다. 2002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이 분묘군은,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과정에서 그 규모와 역사적 가치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월계동 국유지와 인접한 공릉동 국유지 역시, 이런 역사적 층위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02
광진구 군자동 — 서울 최대 국유지 130필지 1,189,235㎡의 역사 재발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 의하면, 광진구 군자동의 경우 1912년 기준 130필지, 무려 1,189,235㎡의 국유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40.9%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 방대한 국유지 기록이 문헌 자료로 정리되면서, 뚝섬 일대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재 발굴 가능성이 새롭게 조명받게 되었습니다. 공릉동 99,197㎡도 이런 시리즈 조사의 일환으로, 체계적인 기초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역사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들여다보지 않은 곳에 있을 뿐입니다. 공릉동 국유지 12필지, 99,197㎡. 이 땅이 언제 다시 조사받고,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을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당신이 사는 동네 아래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공릉동처럼 서울 곳곳의 국유지 기록을 추적하는 문화유산 발굴 기초조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질문해 주세요.
우리 동네 발굴조사 더 알아보기 ↗
110년 전, 누군가는 이 땅을 경작하며 살았습니다.누군가는 이 숲을 지키며 기도했습니다.누군가는 이 대지 위에 지붕을 얹고 불을 피웠습니다.그들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그들이 남긴 흔적은 아직 이 땅 아래에 있습니다.땅은 기억을 잊지 않습니다.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공릉동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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