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중구11,623필지의 땅은누구의 것이었나
- 5월 30일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식민지 토지 수탈 기록11,623필지 전수 분석
1912년 서울 중구11,623필지의 땅은누구의 것이었나
일본인 3,264필지, 조선인 성씨 총합, 분묘 28필지 412,094㎡, 철도용지, 수도용지… 대한제국이 사라진 직후, 서울 도심의 땅은 어떻게 재편되고 있었는가.
1912년, 서울 한복판의 땅을
일본인이 3,264필지 갖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김씨 1,579필지,
이씨 1,248필지…
이 숫자들이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토지 기록이 아닙니다.
서울 중구. 지금의 명동, 을지로, 남대문, 충무로가 모두 이 안에 있습니다. 조선의 심장부이자 대한제국의 도심이었던 이 지역이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서울 중구의 토지는 총 11,623필지, 6,824,623㎡. 지금의 중구 전체 면적(9.97㎢)에 육박하는 이 방대한 기록 안에는 땅의 용도뿐 아니라 토지 소유자의 국적과 성씨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부동산 데이터가 아닙니다. 조선이 무너진 직후, 이 나라의 땅이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날것의 역사 기록입니다. 지금부터 그 11,623필지를 하나씩 들여다보겠습니다.
11,623필지총 필지 수
6,824,623㎡총 면적
3,264필지일본인 소유 (최다)
10종+토지 유형 수
1912년지적 등록 연도
목 차
1.1912년 중구 토지 유형 전체 데이터 — 땅의 구성이 말하는 것
2.집(대지) 53.5% vs 밭 28.8% — 도심과 농경의 공존
3.특수 지목들 — 철도·수도·분묘·사사지가 던지는 질문
4.누가 이 땅을 갖고 있었나 — 소유자 국적 완전 분석
5.조선인 성씨 랭킹 — 김씨 1,579필지에서 강씨 106필지까지
6.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중구 조사 전략
7.중구 발굴 성공 사례와 역사적 의미
1
1912년 중구 토지 유형 전체 데이터 — 땅의 구성이 말하는 것
먼저 중구 전체 토지의 용도별 구성을 살펴봅니다. 11,623필지 6,824,623㎡라는 방대한 기록이 보여주는 1912년 중구의 토지 지형도입니다. 이미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의 도심 지역인 만큼, 집터(대지)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발견되는 특수 지목들이 이 시대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토지 유형 | 필지 수 | 면적 (㎡) | 비율(면적) |
집 / 대지 (垈地) | 10,054필지 | 3,651,389㎡ | 53.5% |
밭 (田) | 1,259필지 | 1,968,309㎡ | 28.8% |
분묘 (墳墓) | 28필지 | 412,094㎡ | 6.0% |
잡종지 (雜種地) | 23필지 | 251,796㎡ | 3.7% |
철도용지 | 1필지 | 53,425㎡ | 0.8% |
수도용지 | 2필지 | 30,043㎡ | 0.4% |
임야 (林野) | 26필지 | 39,838㎡ | 0.6% |
사사지 (寺社地) | 10필지 | 18,737㎡ | 0.3% |
논 (畓) | 64필지 | 385,720㎡ | 5.7% |
도로부지 | 156필지 | 13,269㎡ | 0.2% |
합계 | 11,623필지 | 6,824,623㎡ | 100% |
대지 53.5%
밭 28.8%
분묘 6%
논 5.7%
대지 3,651,389㎡
밭 1,968,309㎡
분묘 412,094㎡
논 385,720㎡
잡종지 251,79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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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대지) 53.5% vs 밭 28.8% — 도심과 농경의 공존
1912년 중구는 이미 조선의 수도 한양 도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밭이 전체 면적의 28.8%를 차지했습니다. 1,259필지, 1,968,309㎡. 현대의 중구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수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의 중구는 빌딩과 상업시설로 가득하지만, 110년 전에는 상당 부분이 아직 도시화되지 않은 경작지였음을 보여줍니다.
대지 10,054필지 3,651,389㎡는 압도적인 다수입니다. 이 집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기와집과 초가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12년 시점에 이 대지의 소유권이 이미 급격히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 소유의 집터와 일본인 소유의 집터가 혼재하기 시작했고, 특히 남대문 주변, 충무로, 명동 일대는 이미 일본인 거류지 중심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논 64필지 385,720㎡도 주목됩니다. 도심 한복판에 논이 존재했다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 논들은 남산 자락과 청계천 변의 충적지에 형성된 수전으로, 조선 후기 도성 안팎의 농업 생산 흔적입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이 논 지역은 충적층 유물 보존 가능성을 가지는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도심 한복판에 논 385,720㎡, 밭 1,968,309㎡. 1912년 중구는 도시와 농경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공간이었습니다. 그 경계선을 따라 지금도 문화재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
특수 지목들 — 철도·수도·분묘·사사지가 던지는 질문
중구 11,623필지 중 면적으로는 작지만 역사적 의미로는 가장 강렬한 이야기를 품은 지목들이 있습니다. 철도용지, 수도용지, 분묘, 사사지. 이 네 지목은 1912년 중구가 어떤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근대 인프라
철도용지
53,425㎡
1필지. 경부선 혹은 경인선 노선이 중구를 관통한 흔적. 철도 부설로 훼손된 조선 시대 지층의 잔존 여부 확인이 핵심 조사 과제.
근대 인프라
수도용지
30,043㎡
2필지. 1908년 뚝도 수원지에서 공급된 서울 최초 근대 상수도 시설 관련 부지. 일제가 설치한 근대 인프라의 직접적 기록.
발굴 최우선
분묘지
412,094㎡
28필지. 전체 면적의 6%. 도심 한복판에 이 규모의 묘지가 있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 조선 시대 왕실·관료 관련 묘소일 가능성.
발굴 최우선
사사지
18,737㎡
10필지. 조선 시대 사찰 터 혹은 일제 신사(神社) 부지. 어느 쪽이든 건물 기초·석조물·종교 유물 출토 가능성이 높음.
특히 분묘 28필지 412,094㎡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수치입니다. 전체 중구 면적의 6%가 묘지. 도심 한가운데에 이 규모의 묘지가 존재했다는 것은 단순한 농촌 묘지가 아님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 안팎에는 왕실 관련 인물, 고위 관료, 공신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고, 이 묘소들이 1912년 시점에 분묘지로 분류되어 토지 대장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28필지 중 어느 하나라도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조선 시대 인물사와 문화유산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4
누가 이 땅을 갖고 있었나 — 소유자 국적 완전 분석
이제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데이터를 마주할 차례입니다. 1912년 중구의 11,623필지, 이 땅은 누가 소유하고 있었을까요? 국적별 소유 필지 수를 보면, 1912년이라는 시점이 얼마나 격변의 해였는지가 한눈에 드러납니다.
1912년 서울 중구 — 토지 소유자 국적 분포
일본인 3,264필지 · 조선인 성씨 합계(김+이+박+최 등) 약 5,000+필지 추정 · 국유지 556필지 · 중국인 275필지 · 동양척식 주식회사 107필지 · 법인 46필지 · 미국인 29필지 · 독일인 17필지 · 프랑스인 16필지 · 영국인 7필지 · 덴마크인 2필지 · 공유지 1필지
🇯🇵
일본인
3,264필지
단일 국적 최다 소유
🏛
국유지
556필지
조선총독부 관할
🇨🇳
중국인
275필지
청나라 상인 기반
🏢
동양척식(주)
107필지
일제 수탈 기관
🇺🇸
미국인
29필지
선교사·외교관
🇩🇪
독일인
17·🇫🇷16·🇬🇧7필지
서양 외교·상업 거점
이 데이터가 전해주는 것은 단순한 토지 소유 현황이 아닙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불과 2년 만인 1912년, 이미 일본인이 중구에서 단일 국적 기준 최다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07필지까지 합산하면 일본 관련 소유가 더욱 방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토지 수탈이 숫자로 기록된 모습입니다. 한편 서양 각국의 소유 필지들은 당시 한성에 주재하던 외국 공사관, 선교사, 상인들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미국인 29필지 안에는 정동 일대 선교사 가옥과 교회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인 16필지에는 명동성당 관련 부지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각 필지마다 하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프랑스인 16필지. 이 안에 명동성당이 있었습니다. 미국인 29필지. 정동의 선교사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인 17필지. 독일 공사관이 있었습니다. 1912년 중구의 소유자 목록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외교 지형도입니다."

5
조선인 성씨 랭킹 — 김씨 1,579필지에서 강씨 106필지까지
일본인이 3,264필지를 소유하는 상황 속에서도, 중구에는 조선인들의 토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성씨별 소유 필지 랭킹은 당시 조선인 사회의 구성과 경제적 지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조선인 성씨별 소유 필지 순위 (1912년 서울 중구)
김씨
1,579필지
이씨
1,248필지
박씨
596필지
최씨
407필지
정씨
234필지
조씨
232필지
임씨
175필지
신씨
157필지
한씨
157필지
장씨
144필지
전씨
140필지
송씨
127필지
류씨
123필지
윤씨
116필지
오씨
115필지
홍씨
109필지
강씨
106필지
김씨 1,579필지, 이씨 1,248필지. 이 두 성씨만 합쳐도 2,827필지로, 일본인 3,264필지에 근접합니다. 나머지 조선인 성씨들까지 합산하면 조선인 전체 소유 필지는 일본인을 크게 앞서는 숫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필지 수 기준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면적 기준으로 따지면,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필지들이 훨씬 넓은 대형 필지 중심이었고, 조선인들의 필지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성씨 데이터 하나하나는 단순한 인구 통계가 아닙니다. 1912년 한양 도심에서 아직 자신의 땅을 지키고 있던 조선인 가문들의 이름입니다.
"김씨 1,579필지, 이씨 1,248필지, 박씨 596필지. 이 이름들은 1912년 일제강점기의 격변 속에서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신의 집과 땅을 지켜낸 조선인 가문들의 기록입니다. 토지 대장은 수탈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항과 생존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6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중구 조사 전략
6,824,623㎡, 11,623필지. 이 방대한 규모를 어떻게 조사할까요? 중구는 이미 오랜 도시 개발이 이루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조사 전략도 다른 지역과는 달라야 합니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더 어렵지만, 동시에 개발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유구가 드러나는 기회가 생기는 곳이기도 합니다.
1
문헌 기초조사 — 1912년 기록과 조선 시대 지도의 대조
1912년 토지 대장, 조선 시대 한양 지도(수선전도, 도성도), 조선왕조실록의 한양 관련 기록을 종합해 각 필지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합니다. 특히 분묘 28필지와 사사지 10필지의 위치를 고지도와 대조해 조선 시대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를 추적합니다. 소유자 국적 데이터를 공간 정보와 연결해 식민지 시대 공간 재편의 패턴을 분석합니다.
2
지표조사 — 도심 지표조사의 특수성
도심 지역은 농경지나 임야와 달리 지표면 관찰이 제한됩니다. 대신 건물 철거 부지, 도로 공사 현장, 지하 굴착 공사 현장에서 노출되는 단면층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긴급 지표조사' 방식이 중요합니다. 분묘 28필지와 사사지 10필지는 현재 위치를 특정해 개발 전 집중 답사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3
시굴조사 — 개발과 병행하는 선제적 조사
중구에서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될 때 사업 전 시굴조사가 법적으로 의무화됩니다. 분묘지 구역, 사사지 구역, 철도용지 인접부를 시굴 우선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도심 시굴은 현장 여건상 트렌치 규모가 제한될 수 있어, 소형 트렌치 다수 배치 방식이 효율적입니다.
4
표본조사 — 대규모 부지의 전략적 탐색
11,623필지를 구역별로 나누어 지목·소유자 특성이 유사한 필지들을 그룹화하고, 각 그룹에서 표본을 추출해 집중 조사합니다. 분묘지 28필지는 전체를 표본 대상으로 지정해 빠짐없이 검토합니다.
5
발굴조사 — 서울 도심의 역사를 새로 쓰다
시굴에서 중요 유구가 확인되면 국가유산청 허가 하에 전면 발굴을 진행합니다. 중구에서의 발굴은 이미 다수 사례가 있습니다. 청계천 변, 명동, 충무로 지역의 재개발 공사에서 조선 시대 건물 기초, 청자·백자, 기와 유물이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습니다. 1912년 기록은 이 발굴들의 역사적 배경을 해석하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7
중구 발굴 성공 사례와 역사적 의미
1912년 중구 기록이 단순한 숫자 나열이 아닌, 실제 발굴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01
중구 회현동3가 — 13필지에 숨겨진 식민지 도시의 시작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중구 회현동3가는 "13필지에 숨겨진 식민지 도시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12년 기록에서 이미 일본인 소유와 조선인 소유가 혼재하던 이 지역은, 이후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며 일본인 상업 거점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토지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회현동 사례는 중구 전체 11,623필지 데이터를 읽는 가장 좋은 축소판입니다.
성공 사례 02
광진구 군자동 비교 — 규모의 맥락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 전체에서 최대 국유지로 기록된 광진구 군자동 130필지 1,189,235㎡와 비교해도, 중구 전체 11,623필지 6,824,623㎡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그러나 중구의 특별함은 규모가 아니라 복잡성에 있습니다. 10종 이상의 지목, 10개 이상의 국적 소유자, 17개 이상의 성씨. 이 복잡성이 중구를 서울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만듭니다.
11,623필지. 이 숫자 안에는 조선의 마지막 숨결과 일제의 첫 번째 손길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씨의 집터 옆에 일본인의 상점이 들어서고, 조선 시대 무덤 옆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사찰 자리에 신사가 들어서는 과정. 그 모든 것이 1912년 토지 대장 한 권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해독하는 것이 바로 서울 중구 문화재 기초조사의 출발점입니다.

11,623필지의 역사, 당신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1912년 중구 토지 기록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면 바로 질문해 주세요. 소유자 국적 분포, 지목별 문화재 조사 방법, 실제 발굴 기관 정보까지 상세히 안내해 드립니다.
중구 발굴조사 더 알아보기 ↗
1912년의 토지 대장 한 권.11,623개의 필지, 수십 개의 성씨,열 개가 넘는 국적의 소유자들.이것은 단순한 부동산 기록이 아닙니다.조선이 사라지던 바로 그 순간,서울 도심의 땅이 어떻게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는지를담담하게 기록한 역사의 증언입니다.김씨의 집터, 이씨의 밭,그 위에 세워진 누군가의 새 건물.그 모든 이야기가지금도 서울 중구의 땅속에잠들어 있습니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1912년 서울 중구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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