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강서구 가양동 국유지 27필지 227,215㎡ — 밭·잡종지·대지·사사지·분묘·임야·논, 일곱 개의 지목이 한 동네에 공존한 이유.
- 5월 30일
- 8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분묘 · 사사지 포함7종 지목 복합 국유지
27필지 속에 숨은 분묘와 사사지,가양동이 한강 옆에서지켜온 것들
1912년 강서구 가양동 국유지 27필지 227,215㎡ — 밭·잡종지·대지·사사지·분묘·임야·논, 일곱 개의 지목이 한 동네에 공존한 이유.
무덤이 있었습니다.
절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활한 밭과 잡종지가 있었습니다.
1912년 가양동은 이 모든 것이
한 동네에 공존했습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 지금은 가양역과 한강공원, 서울식물원이 들어선 이 동네는 110년 전 전혀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1912년 토지 대장에 기록된 가양동 국유지는 27필지, 총 227,215㎡. 이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구성입니다. 무려 7가지 지목이 한 동네 안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밭, 잡종지, 대지, 사사지(寺社地), 분묘(墳墓), 임야, 논. 이 일곱 개의 지목은 단순한 토지 분류가 아닙니다. 조선 시대 가양동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역사의 지층입니다. 특히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두 지목, 분묘와 사사지는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최고 수준의 주목을 요합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드리겠습니다.
27필지총 국유지 필지 수
227,215㎡총 면적 (약 68,730평)
7종지목 수 — 이 시리즈 최다
1912년지적 등록 연도
목 차
1.가양동 전체 데이터 — 7종 지목이 말하는 것
2.밭 106,575㎡ + 잡종지 87,630㎡ — 한강변 광활한 국유 농경지대
3.대지 28,337㎡ — 14필지에 숨겨진 건물들의 흔적
4.사사지 2,019㎡ — 절과 신사가 이 땅을 쓴 이유
5.분묘 350㎡ — 국가가 관리한 무덤, 누구의 것인가
6.임야 1,266㎡ + 논 1,038㎡ — 작지만 빠뜨릴 수 없는 단서들
7.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가양동 조사 전략
8.강서구 발굴 성공 사례와 가양동의 미래
1
가양동 전체 데이터 — 7종 지목이 말하는 것
27필지 227,215㎡. 이 규모는 축구장 약 31.8개를 이어 붙인 넓이입니다. 경복궁의 절반을 조금 넘는 면적이 강서구 가양동 한 동네의 국유지였습니다. 그런데 규모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7가지 지목의 공존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동네도 7종의 지목이 한꺼번에 나타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 다양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 동네의 국유지가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은, 가양동이 1912년 당시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복합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공간임을 뜻합니다. 한강 수운의 거점, 군사·행정 시설, 종교 공간, 묘지 관리, 농업 생산까지. 이 모든 기능이 하나의 동네 안에 압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토지 유형 | 필지 수 | 면적 (㎡) | 비율 |
밭 (田) | 7필지 | 106,575㎡ | 46.9% |
잡종지 (雜種地) | 1필지 | 87,630㎡ | 38.6% |
대지 (垈地) | 14필지 | 28,337㎡ | 12.5% |
사사지 (寺社地) 희귀 | 2필지 | 2,019㎡ | 0.9% |
임야 (林野) | 1필지 | 1,266㎡ | 0.6% |
논 (畓) | 1필지 | 1,038㎡ | 0.5% |
분묘 (墳墓) 최초 | 1필지 | 350㎡ | 0.2% |
합계 | 27필지 | 227,215㎡ | 100% |
밭 46.9%
잡종지 38.6%
대지
밭 106,575㎡
잡종지 87,630㎡
대지 28,337㎡
사사지 2,019㎡
임야 1,266㎡
논 1,038㎡
분묘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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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106,575㎡ + 잡종지 87,630㎡ — 한강변 광활한 국유 농경지대
면적 기준으로 두 개의 거인이 가양동 국유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밭 7필지 106,575㎡와 잡종지 1필지 87,630㎡. 합산하면 194,205㎡로 전체의 85.5%입니다. 이 두 지목이 가양동 국유지의 사실상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밭 106,575㎡는 7필지로 분산되어 있습니다. 한 필지 평균 약 15,225㎡, 즉 축구장 2.1개 크기의 밭들이 가양동 곳곳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강 하구에 인접한 가양동의 지형은 한강이 운반한 충적토로 형성된 비옥한 평야입니다. 이 비옥한 땅에 조성된 국유 밭 106,575㎡는 조선 시대 가장 중요한 국가 농경지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규모로 보면 군량미 생산을 위한 대규모 군둔전(軍屯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는 궁중에 채소와 작물을 공급하는 내수사(內需司) 관할 농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잡종지 1필지 87,630㎡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단 하나의 필지에 87,630㎡. 필지당 면적으로는 가양동 국유지 중 단연 최대입니다. 이 광대한 단일 잡종지 필지는 한강 변의 갯벌, 하중도, 혹은 대규모 군사 훈련 부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양동 일대는 조선 시대 한강 수군(水軍)의 훈련 거점이었던 양화진(楊花津)과 인접해 있습니다. 이 잡종지가 수군 훈련 관련 시설 부지나 한강 수운 관련 창고·선착장 부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밭 106,575㎡ + 잡종지 87,630㎡ = 194,205㎡. 이 두 지목만으로 이미 여의도공원 전체 면적의 1.8배에 달합니다. 1912년 가양동은 한강 변에서 가장 광활한 국유 농경지대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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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28,337㎡ — 14필지에 숨겨진 건물들의 흔적
대지 14필지, 28,337㎡. 전체 면적의 12.5%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면적이 아니라 필지 수입니다. 무려 14필지. 27필지 중 절반 이상이 대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14개의 서로 다른 대지 필지는 14개의 서로 다른 건물 혹은 시설이 가양동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대규모 관청이 아니라, 작은 시설들이 동네 전체에 산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구성은 어떤 경우에 나타날까요?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조선 시대 양화진(楊花津) 나루터와 관련된 복합 시설군입니다. 양화진에는 도강(渡江)을 담당하는 진(津) 관련 건물, 세금 징수 관청, 물자 보관 창고, 관리들의 숙소, 선박 수리 시설 등 다양한 기능의 건물들이 분산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14필지의 대지는 이런 복합 시설의 각 구성 요소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14필지의 대지는 14개의 독립적인 발굴 대상지를 의미합니다. 각 필지에서 서로 다른 기능의 건물 기초가 발견될 수 있으며, 이 건물들의 배치를 종합하면 1912년 이전 가양동의 공간 구조 전체가 복원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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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지 2,019㎡ — 절과 신사가 이 땅을 쓴 이유
이제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두 지목 중 첫 번째, 사사지(寺社地)입니다. 2필지 2,019㎡. 전체의 0.9%에 불과하지만,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는 전체 부지 중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는 지목 중 하나입니다.
사사지란 절(寺) 또는 신사(社)와 관련된 토지를 가리킵니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사찰의 소유지나 사찰 부속 시설이 있던 토지가 사사지로 분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일본 신사(神社) 관련 토지도 이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가양동의 사사지 2필지 2,019㎡가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질문입니다.
가양동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불교 사찰과 인연이 깊은 지역입니다. 강서구 일대에는 조선 초기부터 이어진 여러 사찰의 기록이 있으며, 한강 나루터 주변에는 나루를 이용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사찰이나 기도처가 존재했습니다. 사사지 2필지가 이런 사찰 부지와 연결된다면, 그 안에는 건물 기초, 석탑 부재, 범종 파편, 불교 관련 도자기, 비석 등이 매장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강서구 불교 역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됩니다.
사사지 (寺社地)
2,019㎡
2필지 · 전체의 0.9%
사찰 혹은 신사 관련 부지
건물 기초·석조물·불교 유물 발굴 최우선 대상
분묘 (墳墓)
350㎡
1필지 · 전체의 0.2%
국가 관리 묘지 부지
이 시리즈 전체에서 처음 등장하는 희귀 지목
"사사지 2필지. 면적은 작지만 이 두 필지 안에는 수백 년 된 사찰의 역사가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강서구 가양동에 어떤 절이 있었는지, 그 절이 누구의 기도를 받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이 땅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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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 350㎡ — 국가가 관리한 무덤, 누구의 것인가
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처음 등장하는 지목, 분묘(墳墓). 1필지 350㎡. 면적으로는 27필지 중 가장 작지만, 역사적 의미로는 어떤 지목보다 강렬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분묘란 무덤, 즉 묘소(墓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묘소가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조선 시대에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묘소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왕실 관련 인물의 묘소입니다. 왕, 왕비, 왕세자, 혹은 왕실 공신의 무덤이 이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국가 공인 의인(義人)이나 충신의 묘소로, 국가가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직접 관리했습니다. 셋째로는 주인 없는 무덤 중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국가가 인수해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양동 분묘 1필지 350㎡는 어느 경우에 해당할까요? 한강 나루터 가양동의 지리적 특성을 생각하면, 조선 시대 양화진 일대와 관련된 인물의 묘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이 지역 일대에서 큰 역할을 했던 관리나 군인의 묘소였을 수도 있습니다. 350㎡라는 면적은 1기의 중간 규모 묘소에 해당합니다. 이 분묘 필지 내부에는 봉분(封墳) 아래 석실(石室), 석관(石棺), 부장품 등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묘비(墓碑)나 문인석(文人石) 같은 석조 부속물이 지하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분묘는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대상입니다. 인체 유골이 포함될 수 있으며, 관련 법령에 따라 특별한 절차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분묘 발굴은 해당 인물의 신원, 생존 시기, 사회적 지위 등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역사 자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역사 연결 고리
양화진(楊花津)과 가양동 — 조선 한강의 핵심 거점
양화진은 조선 시대 한양과 삼남(三南) 지방을 잇는 가장 중요한 한강 나루터 중 하나였습니다. 수군 훈련, 물자 유통, 외국 사신 접대까지 이루어진 이 전략적 지점 바로 인근에 위치한 가양동 국유지는 양화진의 복합 기능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분묘 350㎡와 사사지 2,019㎡는 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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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 1,266㎡ + 논 1,038㎡ — 작지만 빠뜨릴 수 없는 단서들
임야 1필지 1,266㎡와 논 1필지 1,038㎡. 각각 전체의 0.6%와 0.5%로 가양동 국유지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지목들입니다. 하지만 이 두 필지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임야 1,266㎡는 단 1필지. 앞서 살펴본 봉천동(임야 100%, 7,233㎡)이나 구의동(임야 100%, 37,887㎡)에 비하면 극히 작은 규모입니다. 그런데 가양동처럼 대부분이 평탄한 한강 변 충적지인 동네에 임야가 존재했다는 것은 특이합니다. 이 임야는 한강 변의 낮은 구릉이나 제방 관련 토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사사지나 분묘와 인접한 보호 산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임야의 위치가 사사지, 분묘 필지와 어떤 공간적 관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논 1필지 1,038㎡는 가양동 전체 면적의 0.5%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가양동처럼 밭이 압도적으로 많은 동네에서 논이 단 1필지뿐이라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 논은 인근 관청이나 시설의 쌀 공급을 위한 소규모 수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사지 2필지와 연결 지으면, 사찰의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사찰 부속 논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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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 가양동 조사 전략
7종 지목, 27필지, 227,215㎡. 이 복잡하고 광대한 국유지를 어떻게 조사해야 할까요? 지목별 특성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가양동 조사는 역대 어떤 부지보다 세분화된 전략이 필요합니다.
1
문헌 기초조사 — 양화진과 가양동의 역사 문헌 총망라
조선왕조실록의 양화진 관련 기록, 강서구 일대 사찰 기록, 한강 수군 관련 문헌, 1912년 지적 원도를 종합합니다. 특히 분묘 필지의 주인을 추적하기 위해 강서구 일대 묘소 관련 고문서와 족보 자료도 검토합니다. 사사지 2필지의 사찰 명칭을 확인하기 위한 불교 사료 조사도 병행합니다.
2
지표조사 — 7종 지목별 맞춤 답사
분묘 350㎡와 사사지 2,019㎡를 최우선 답사 대상으로 지정합니다. 대지 14필지는 각 필지별 지형 이상과 유물 파편 산포를 확인합니다. 잡종지 87,630㎡는 광대한 면적이므로 드론 항공촬영을 병행해 지형 이상 구역을 먼저 특정한 후 현장 답사를 집중합니다.
3
시굴조사 — 우선순위 5구역 집중 시굴
분묘 필지, 사사지 2필지, 대지 밀집 구역, 잡종지 지형 이상 구역을 5대 우선 시굴 구역으로 설정합니다. 분묘 필지 시굴 시에는 관련 법령에 따라 유골 처리 절차를 사전에 준비합니다. 사사지에서는 사찰 관련 층위를 확인하고, 대지 구역에서는 건물 기초 유구를 탐색합니다.
4
표본조사 — 광대한 밭·잡종지의 전략적 탐색
밭 106,575㎡와 잡종지 87,630㎡는 격자 구획 표본 조사를 실시합니다. 전체를 50×50m 격자로 나누어 일정 비율의 격자를 표본으로 선택하고 시굴합니다. 특히 잡종지 단일 필지 87,630㎡는 한강 방향과 내륙 방향으로 트렌치 방향을 달리하여 지하 구조물의 방향성을 파악합니다.
5
발굴조사 — 가양동의 역사를 새로 쓰다
시굴 결과를 바탕으로 중요 유구 확인 구역을 선별해 국가유산청 허가 하에 전면 발굴을 진행합니다. 분묘와 사사지에서 유구가 확인된다면, 강서구 가양동의 역사는 완전히 새롭게 쓰일 것입니다. 양화진 관련 시설이 확인된다면 서울 한강 수운사(水運史) 연구에 결정적 자료가 됩니다.

8
강서구 발굴 성공 사례와 가양동의 미래
가양동의 가능성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같은 강서구에서 이미 진행된 역사 기록과 조사 사례들입니다.
성공 사례 01
강서구 오곡동 — 한강 변 국유지의 놀라운 역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에 따르면, 같은 강서구 오곡동에서 1912년 국유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역사 추적이 이루어졌습니다. "1912년 강서구 오곡동의 놀라운 역사를 지금부터 들려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조사 기록은 한강 하구 일대 강서구 동네들이 얼마나 풍부한 역사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양동은 오곡동보다 훨씬 복잡한 7종 지목 구성을 가지고 있어, 그 역사적 가능성은 오곡동 사례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기대됩니다.
성공 사례 02
광진구 군자동 — 130필지 대규모 국유지, 다양한 지목의 역사적 가치 입증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시리즈의 군자동 편은 5종 지목이 복합된 대규모 국유지에서 역사적 발굴 가능성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입니다. 가양동은 군자동보다 2종이 더 많은 7종 지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분묘 지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지목 = 다양한 역사적 층위. 가양동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다층적인 역사를 품은 국유지 중 하나입니다.
27필지, 7종 지목, 227,215㎡. 이 숫자들의 합산은 단순한 토지 면적이 아닙니다. 한강 수운의 거점이었던 양화진, 조선 시대 사찰과 묘소, 군사·행정 복합 시설, 그리고 광활한 국유 농경지. 이 모든 것이 한 동네 안에 켜켜이 쌓인 역사입니다. 가양동 국유지가 본격적인 문화재 기초조사를 받는 날, 강서구의 역사 지도가 완전히 새로 그려질 것입니다.

7종 지목, 27필지 — 가양동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분묘와 사사지가 포함된 복합 국유지의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발굴 기관 정보와 실제 절차, 분묘 조사의 법적 절차까지 바로 질문하세요.
가양동 발굴조사 더 알아보기 ↗
누군가 이 땅에 씨를 뿌렸습니다.누군가 이 땅의 절에서 기도했습니다.누군가 이 땅에 잠들었습니다.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1912년이라는 숫자 하나가 남았습니다.27필지, 7종 지목.이 건조한 기록 안에는이름 없이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의뜨거운 하루하루가 담겨 있습니다.우리가 그 이야기를 꺼내주기를이 땅은 한강 옆에서110년째 기다리고 있습니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록에서, 가양동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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