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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성북구 정릉동은 몇 필지였을까?계모를 향한 아들의 복수로 도성 밖으로 쫓겨난 왕비의 무덤이 있는 마을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북구 편 1912년 서울 성북구 정릉동은몇 필지였을까? 계모를 향한 아들의 복수로 도성 밖으로 쫓겨난 왕비의 무덤이 있는 마을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총 965필지밭 543필지논 214필지김씨 155필지강씨 58필지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는 남편의 사랑은,아들의 손에 의해 도성 밖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북구 정릉동은 총 965필지, 1,102,067㎡ 규모였습니다. 밭이 543필지 568,838㎡로 가장 많았고, 논이 214필지 377,459㎡, 대지가 172필지 확인되었습니다. 성씨별로는 김씨가 155필지, 손씨가 131필지로 상위권을 이루었고, 강씨 58필지를 비롯해 총 열일곱 개 성씨의 소유가 확인되었습니다. 국유지는 84필지, 법인(사찰 등) 소유는 32필지였습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던 그해.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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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동구 송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숫말을 기르던 그 들판이 소나무 정자가 되기까지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성동구 송정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숫말을 기르던 그 들판이 소나무 정자가 되기까지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52필지잡종지 면적 85.5%밭 41필지논 3필지 숫말을 기르던 그 들판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며 소리만 남기고전혀 다른 뜻의 한자로 옷을 갈아입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동구 송정동의 국유지는 총 52필지, 1,000,735㎡였습니다. 잡종지가 단 6필지에 불과했지만 855,960㎡, 국유지 전체 면적의 85.5%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이었습니다. 밭이 41필지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고, 논 3필지, 대지 2필지도 확인됩니다. 송정동(松亭洞)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명확한 문헌이나 구비설화가 남아 있지 않지만, 흥미로운 추정이 전해집니다. 송정동 앞에는 예로부터 '솔마장벌' 또는 '양마장평'이라 불리던 들판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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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초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서초구 잠원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44필지밭 면적 84.0%대지 24필지임야 2필지 중전과 세자빈은 직접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이며,백성들에게 길쌈의 본을 보였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초구 잠원동 국유지는 총 44필지, 529,318㎡였습니다. 밭이 18필지 444,825㎡로 면적의 84.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이었고, 대지가 24필지 59,243㎡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임야도 2필지 25,249㎡ 있었습니다. 잠원동(蠶院洞)이라는 이름은 두 마을의 이름을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이 자리는 '잠실리(蠶室里)'라 불렸는데, 1963년 서울로 편입될 때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과 이름이 겹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를 피하려고 잠실리의 '잠(蠶)'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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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대문구 신공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큰더기 마을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신공덕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큰더기 마을에서 새로 갈라져 나온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8필지밭 5필지분묘지 1필지대지 2필지 본래 하나였던 공덕리에서 사람들이 새로 마을을 이루자,이 자리는 '새로운 공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신공덕동의 국유지는 총 8필지, 11,533㎡였습니다. 밭이 5필지 5,153㎡로 가장 많았고, 분묘지가 1필지 5,586㎡로 면적이 가장 넓었으며, 대지도 2필지 793㎡ 확인됩니다. 신공덕동(新孔德洞)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새로운 공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리즈가 앞서 다룬 공덕동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로,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했던 신창내계와 공덕리계의 흥례동, 신동이라는 자연부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공덕동의 유래가 우리말 '큰더기(높은 언덕)'에서 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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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마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새우젓 장수가 해를 마주하며 걷던 그 나루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마포구 마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새우젓 장수가 해를 마주하며 걷던 그 나루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6필지대지 3필지밭 3필지 서쪽 나루에서 새우젓을 이고 도성으로 향하던 이들은,하루 종일 눈부신 햇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어야 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마포구 마포동의 국유지는 총 6필지, 23,401㎡였습니다. 대지가 3필지 14,357㎡, 밭이 3필지 9,044㎡로 정확히 절반씩 나뉘어 있었습니다. 마포(麻浦)라는 이름은 '삼개나루'라는 순우리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일대에 삼(麻)을 많이 재배해 삼개라 불렸다는 설과, 세 개의 물줄기(한강, 만초천, 서강)가 만나는 포구라는 뜻에서 삼개라 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 나루는 조선시대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의 최대 관문이었습니다. 이 마포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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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남구 신사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 나루마을이 하나로 합쳐진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강남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강남구 신사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 나루마을이 하나로 합쳐진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28필지밭 16필지논 6필지대지 6필지 한강 나루터에 자리했던 두 작은 마을은,훗날 각자의 이름 한 글자씩을 내어주며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강남구 신사동의 국유지는 총 28필지, 154,889㎡였습니다. 밭이 16필지 91,623㎡로 가장 많았고, 논과 대지가 각 6필지씩 확인됩니다. 신사동(新沙洞)이라는 이름은 한강변의 두 자연부락, 새말(新村)과 사평리(沙平里)의 이름을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새말, 동산말, 사평이라는 마을들을 하나로 묶으며, 각각의 첫 글자 '신(新)'과 '사(沙)'를 따서 신사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새말은 한남대교 남쪽, 나루터가 있던 한적한 모래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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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볕 좋은 마을이라 불리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중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중구 남대문5가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볕 좋은 마을이라 불리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6필지전부 대지 본디 볕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이 자리는,훗날 큰 성문의 이름을 빌려 지금의 동네가 되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중구 남대문5가의 국유지는 총 6필지, 976㎡였으며, 그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남대문5가는 지금의 남대문로5가에 해당하는 자리로, 서울역 동편, 후암로 이북 블록에 위치합니다. 이 자리의 원래 이름은 '볕 양(陽)' 자를 쓴 양동(陽洞)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은 다른 남대문로 1가부터 4가와는 지리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소 떨어져 있었는데,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대문5가에 편입되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름의 유래가 된 남대문, 곧 숭례문은 이 자리에서 남대문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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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국가가 소유했던 그 쓸모없는 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영등포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영등포구 여의도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국가가 소유했던 그 쓸모없는 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60필지잡종지 면적 72.2%밭 76필지임야 3필지 "너나 가져라"던 그 쓸모없는 섬의 상당 부분은,정작 어느 개인도 아닌 나라가 소유하고 있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국유지는 총 160필지, 3,375,549㎡였습니다. 잡종지가 75필지 2,437,495㎡로 면적의 72.2%를 차지하며 압도적으로 넓었고, 밭이 76필지 769,686㎡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임야 3필지, 대지 5필지, 사사지 1필지도 확인됩니다. 이 시리즈가 앞서 다룬 여의도동 전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의도(汝矣島)라는 이름에는 "너나 가져라", "나의 섬이다, 너의 섬이다"라는 얄궂은 유래가 함께 전해집니다. 홍수 때마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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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마을 이름 자체가 된 백제 왕실의 무덤들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송파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송파구 석촌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마을 이름 자체가 된 백제 왕실의 무덤들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30필지임야 12필지대지 16필지밭 2필지 이 마을 어디를 파도 돌무더기가 나왔다.사람들은 결국 그 돌무지 자체를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송파구 석촌동의 국유지는 총 30필지, 121,550㎡였습니다. 임야가 12필지 84,926㎡로 면적이 가장 넓었고, 대지가 16필지 29,927㎡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밭도 2필지 6,697㎡ 있었습니다. 석촌동(石村洞)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돌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마을에 돌무지무덤, 곧 적석총이 유독 많았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1916년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이 일대에는 무려 90여 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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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노루가 살던 산자락, 왕자의 별서가 있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북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성북구 장위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노루가 살던 산자락, 왕자의 별서가 있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3필지임야 2필지밭 1필지 병자호란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그 왕자는,이 산자락에 별서를 짓고 폭포 곁에서 붓을 들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북구 장위동의 국유지는 총 3필지, 4,786㎡였습니다. 임야가 2필지 3,973㎡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밭이 1필지 813㎡ 있었습니다. 장위동(長位洞)이라는 이름은 마을 뒤에 있는 장위산(獐位山)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노루 장(獐)' 자를 쓴 이 산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이어지며, 지금은 '길 장(長)' 자로 바뀌어 장위동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동북쪽 끝자락에 자리했던 이 마을은, 우이천을 경계로 한적한 농촌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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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태종이 화살을 맞을 뻔한 벌판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성동구 성수2가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태종이 화살을 맞을 뻔한 벌판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90필지밭 84필지임야 3필지대지 3필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쏜 화살은 빗나가, 그가 세워둔 차일 기둥에 꽂혔다.사람들은 그날 이후 이 벌판을 '화살이 꽂힌 벌'이라 불렀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동구 성수2가의 국유지는 총 90필지, 393,499㎡였습니다. 밭이 84필지 291,254㎡로 가장 많았고, 임야가 3필지 101,345㎡, 대지가 3필지 899㎡ 있었습니다. 성수동이라는 이름은 6.25 전쟁 후 1950년에 만들어진 비교적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 이전 이 자리는 '뚝섬', 혹은 '둑도(纛島)', '살곶이벌'이라는 훨씬 오래된 이름으로 불려왔습니다. 성수2가는 옛 동뚝도리, 곧 웃말이라 불리던 마을에 해당합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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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우면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소가 잠든 산자락, 왕자의 태를 묻은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초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서초구 우면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소가 잠든 산자락, 왕자의 태를 묻은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필지논 4,413㎡ 소가 편안히 졸고 있는 형상의 그 산자락 아래,단 한 뙈기의 논만이 나라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초구 우면동의 국유지는 단 1필지, 4,413㎡였습니다. 그 전부가 논으로 확인되며, 다른 지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면동(牛眠洞)이라는 이름은 마을을 감싼 우면산(牛眠山)에서 그대로 유래했습니다. 산의 생김새가 마치 소가 편안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면산은 서초동, 방배동, 우면동, 양재동의 경계를 이루며, 소가 졸고 있는 모습이라는 그 정겨운 형상 덕에 오래도록 이 일대 사람들에게 친근한 산으로 자리해왔습니다. 우면동은 우면산 아래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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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대문구 북아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나라 땅으로 남았던 마을 숲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서대문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서대문구 북아현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나라 땅으로 남았던 마을 숲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26필지밭 18필지임야 2필지 · 전량 국유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진 논밭 사이, 단 한 뙈기의 숲만은끝내 개인의 소유로 넘어가지 않고 나라의 땅으로 남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국유지는 총 26필지, 61,702㎡였습니다. 밭이 18필지 56,496㎡로 국유지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임야가 2필지 1,933㎡, 대지가 5필지 1,464㎡, 논이 1필지 1,808㎡ 있었습니다. 특히 임야 2필지는 북아현동 전체 임야 면적과 정확히 일치해, 이 마을 산림 전부가 국유지였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북아현동 전체의 토지 현황을 다루며, 무덤 41,011㎡라는 이 시리즈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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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동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신촌천변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 다섯 뙈기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국유지 심층편) 1912년 마포구 동교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신촌천변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 다섯 뙈기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5필지논 3필지밭 2필지 135필지의 조용한 다리 마을 가운데,단 다섯 뙈기만이 나라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 14,737㎡였습니다. 그 가운데 논이 3필지 11,649㎡로 가장 많았고, 밭이 2필지 3,087㎡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마포구 동교동 전체 자료를 다룬 바 있습니다. 동쪽 다리라는 뜻의 동교(東橋)에서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신촌천을 사이에 두고 서교동과 짝을 이루던 조용한 농촌이었습니다. 총 135필지 가운데 오씨가 22필지로 1위를 차지하며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오씨 우위 구도를 보였고, 훗날 이 마을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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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1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임금이 직접 밭을 갈던 적전, 선농단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국유지 세부)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1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임금이 직접 밭을 갈던 적전, 선농단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총 11필지밭 5필지임야 2필지논 2필지대지 2필지 곤룡포를 벗고 쟁기를 잡은 임금이,백성들 앞에서 손수 밭을 갈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는 총 11필지, 17,130㎡였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5필지 3,424㎡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고, 임야가 2필지 11,107㎡로 면적에서는 가장 넓었습니다. 논이 2필지, 대지가 2필지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자료는 제기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지목별 세부 내역입니다. 이번 글에 대한 안내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1912년 제기동 전체의 토지 현황이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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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3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세종이 세운 말 목장 정자, 화양정 터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광진구 편 (국유지 세부)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3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세종이 세운 말 목장 정자, 화양정 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총 31필지밭 23필지논 6필지임야 1필지대지 1필지 임금이 정자를 짓고 앉아,말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던 언덕이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는 총 31필지, 93,557㎡였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23필지 58,839㎡로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논이 6필지 6,049㎡, 임야가 1필지 27,996㎡, 대지가 1필지 671㎡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자료는 화양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지목별 세부 내역입니다. 이번 글에 대한 안내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1912년 화양동 전체의 토지 현황이 아니라, 그 가운
7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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