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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3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세종이 세운 말 목장 정자, 화양정 터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8월 3일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광진구 편 (국유지 세부)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3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세종이 세운 말 목장 정자, 화양정 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총 31필지밭 23필지논 6필지임야 1필지대지 1필지

임금이 정자를 짓고 앉아,말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던 언덕이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는 총 31필지, 93,557㎡였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23필지 58,839㎡로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논이 6필지 6,049㎡, 임야가 1필지 27,996㎡, 대지가 1필지 671㎡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자료는 화양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지목별 세부 내역입니다.

이번 글에 대한 안내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1912년 화양동 전체의 토지 현황이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31필지만을 지목별로 세분화한 자료입니다. 화양동의 논, 밭, 대지 전체 규모나 성씨별 소유 현황은 이번 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으며, 국유지 항목의 내부 구성만을 다룹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아래 내용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432년, 세종 14년. 임금은 지금의 화양동 언덕 위에 정자 하나를 세웠습니다. 화양정(華陽亭)입니다. 이 언덕 아래로는 조정이 직접 관리하는 말 목장이 펼쳐져 있었고, 세종은 이 정자에 올라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니는 광경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이 정자는 조선 왕실사의 여러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1455년, 삼촌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 가던 단종이 이곳에서 부인 송씨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이별했습니다. 사람들은 부인이 다시 돌아오기를(回行) 바란다는 뜻에서 이 마을을 회행리라고도 불렀습니다. 훗날 명성황후와도 얽힌 사연이 전해지는 이 정자는, 700년이 넘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는 느티나무 노거수로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양정은 1911년 7월, 낙뢰를 맞아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로 이 1912년 토지조사가 이루어지기 불과 몇 달 전의 일입니다. 480년 가까이 서 있던 왕실의 정자가 벼락에 스러진 바로 다음 해, 이 마을의 땅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을까요. 국유지 31필지의 세부 구성을 지금부터 살펴봅니다.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국유지를 여러 차례 다루었지만, 대개는 한 동네 전체 필지 가운데 국유지가 몇 필지, 몇 퍼센트를 차지했는지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양동 자료는 그 국유지 자체를 다시 지목별로 쪼개어 보여줍니다. 국유지라는 하나의 덩어리 안에도 밭과 논, 임야와 대지가 저마다 다른 비중으로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국유지가 단순히 하나의 성격을 가진 땅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용도와 내력을 지닌 필지들의 집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목차

  1. 화양동과 화양정은 어떤 곳이었나요?

  2.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3.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4. 국유지 중 임야와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5. 데이터 검증 노트

  6. 국유지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7.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9. 자주 묻는 질문

  10. 한 줄 결론


1. 화양동과 화양정은 어떤 곳이었나요?

화양동이라는 이름은 이 조선시대 정자, 화양정에서 그대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남서 두모방 즐곶계로 편입되었습니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 장내능동, 1914년 고양군 뚝도면 모진리로 이어지다가, 1949년 서울시 성동구 화양리가 되었고 1950년 지금의 화양동이 되었습니다.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며 지금의 광진구 화양동이 되었습니다.

화양정 터는 지금의 건국대학교 부속병원 서쪽 언덕, 화양동 110번지 32호 자리로 전해집니다. 7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1973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지금은 화양동주민센터가 이 옛 정자 터 부근에 자리해, 조선 왕실 목장을 관리하던 지역 중심지의 오랜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화양동 국유지 31필지 가운데 밭은 23필지, 58,839㎡였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74.2%, 면적의 62.9%를 차지하는 가장 큰 비중입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2,558.2㎡, 약 774평입니다.

조정 목장이 있던 이 일대에서, 말을 기르던 목초지의 일부가 훗날 밭으로 전환되어 국유지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왕실 소유의 목장 부지였던 만큼, 개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국가의 소유로 이어진 땅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이후 왕실 목장은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면서, 목초지가 실제 경작지로 전환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화양동의 국유지 가운데 밭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소유권만은 개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국가가 계속 관리했다는 점에서, 이 밭들은 겉보기엔 평범한 농지였지만 그 뿌리는 왕실 목장에 닿아 있는 특별한 땅이었습니다.



3.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화양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6필지, 6,049㎡였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19.4%, 면적의 6.5%입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은 1,008.2㎡, 약 305평으로 비교적 아담한 규모입니다.

이 6필지의 논은 목장 인근의 저지대, 혹은 개천 주변의 물 대기 좋은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왕실 목장의 부속 농지로서 소규모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4. 국유지 중 임야와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화양동 국유지 가운데 임야는 1필지 27,996㎡, 대지는 1필지 671㎡였습니다.

임야 1필지의 면적은 국유지 전체 면적의 29.9%에 달하는 매우 큰 규모입니다. 아차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의 산림 일부가 이 단일 필지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왕실 목장을 둘러싸던 울창한 숲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대지 1필지 671㎡는 낙뢰로 무너지기 전까지 화양정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 혹은 목장을 관리하던 관원의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480년 가까이 이어진 왕실 정자의 마지막 흔적이 이 작은 대지 한 필지에 담겨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5.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 검증: 논 6 + 대지 1 + 임야 1 + 밭 23 = 31필지로, 국유지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검증: 6,049 + 671 + 27,996 + 58,839 = 93,555㎡로, 국유지 전체 면적 93,557㎡와 2㎡의 근소한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평(坪) 단위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올림 오차로 추정되며, 원자료 수치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합니다. 이번 자료는 화양동 전체가 아니라 국유지 항목만을 다루므로, 화양동 전체의 필지 수나 면적, 민간 소유 현황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6. 국유지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구분

필지 수

면적(㎡)

필지 비율

면적 비율

23필지

58,839㎡

74.2%

62.9%

6필지

6,049㎡

19.4%

6.5%

임야

1필지

27,996㎡

3.2%

29.9%

대지

1필지

671㎡

3.2%

0.7%

국유지 전체

31필지

93,557㎡

100%

100%

표 설명: 1912년 광진구 화양동 국유지의 지목별 구성을 정리한 표로, 밭 23필지가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표는 화양동 전체가 아닌 국유지 항목만의 세부 내역이다.

국유지 면적 비율 그래프

62.9%

임야

29.9%

6.5%

대지

0.7%

시리즈 기록 노트

이번 자료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특정 동네의 국유지 항목만을 별도로 세분화해 다룬 사례입니다. 지금까지는 국유지가 전체 필지 가운데 하나의 소유 구분 항목으로만 등장했지만, 화양동에서는 그 국유지 31필지 자체의 지목별 내부 구성이 확인되었습니다.

화양정이라는 실제 왕실 정자와 목장 부지가 국유지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다른 국유지 사례들(하왕십리의 군사시설 추정, 잠실동·신천동의 하천부지 추정)과는 또 다른 유형, 즉 왕실 직할 목장이라는 세 번째 국유지 형성 경로로 기록됩니다.


7.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화양동의 이 국유지 기록은 조사 전략에 특별한 신호를 보냅니다. 화양정 터는 이미 700년 된 느티나무로 그 위치가 명확히 확인되어 있고,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 보호 구역입니다. 그러나 정자 건물 자체의 기초와 부속 시설의 흔적은 1911년 낙뢰로 소실된 이후 정밀하게 조사된 바가 많지 않습니다.

첫째, 대지 1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화양정 건물의 실제 기초를 찾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임야 1필지의 범위를 파악하면 조선시대 왕실 목장의 경계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셋째, 밭으로 전환된 23필지의 옛 지목 변화를 추적하면, 목장에서 농지로 이어진 토지 이용의 역사를 규명할 수 있습니다.

세종이 말들의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 언덕은, 지금 대학가의 소음 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 국유지 31필지의 기록은 그 잊힌 왕실 목장의 마지막 지도를 그려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입니다.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화양동 느티나무, 이미 보존된 왕실 유산의 증거

화양정 터에 남은 700년 된 느티나무는 1973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이미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는 문헌 기록과 현존 유산이 함께 어우러져 한 장소의 역사를 온전히 증언하는 사례로, 앞으로의 정밀 조사가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기대하게 하는 선례입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왕실 관련 시설의 흔적이 근대 이후에도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화양정 터 조사에 참고할 선례입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화양정 역시 같은 세종 시대에 세워진 시설입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9.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화양동의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국유지는 31필지, 93,557㎡였습니다. 이는 화양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규모입니다.

Q. 화양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1432년 세종이 지금의 화양동 언덕에 세운 정자, 화양정(華陽亭)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정자 아래로 조정이 직접 관리하는 말 목장이 있었습니다.

Q. 화양정에는 어떤 역사적 사연이 있나요?

A.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가던 길에 이곳에서 부인과 마지막 밤을 보내며 이별했습니다. 이 때문에 회행리라는 별칭도 전해집니다. 정자는 1911년 7월 낙뢰로 소실되었습니다.

Q. 1912년 화양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

A. 밭이 23필지 58,839㎡로 국유지 전체 면적의 62.9%를 차지해 가장 넓었습니다. 임야 1필지도 29.9%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Q. 화양동의 국유지가 넓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조선 왕실이 직접 관리하던 말 목장이 있던 지역이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왕실 소유의 목장 부지가 개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국가 소유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0.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광진구 화양동의 국유지 31필지, 93,557㎡는 밭 23필지가 대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임야 1필지가 상당한 면적을 차지했으며, 세종이 세운 왕실 정자 화양정과 그 아래 조정 목장의 흔적을 품은, 낙뢰로 정자가 무너진 바로 다음 해에 기록된 땅이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광진구 화양동 국유지의 지목별 세부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토지 기록 (국유지 항목)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국유지 31필지


분석 항목: 국유지 필지 수, 지목(논·대지·임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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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임금이 정자에 앉아 말들의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던 언덕,


그 이름을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스물세 뙈기의 밭이 옛 목장의 자리를 대신하고,


여섯 배미의 논이 그 곁에서 작게 물을 머금었다.



단종이 부인과 이별하던 그 밤의 슬픔도,


세종이 즐기던 태평성대의 풍경도 모두 이 언덕에 새겨졌다.



정자는 벼락을 맞아 무너지고 다음 해,


땅의 절반은 여전히 나라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칠백 년 된 느티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오래전 말발굽 소리를 기억한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화양동의 국유지 31필지에 다시 목장의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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