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마을 이름 자체가 된 백제 왕실의 무덤들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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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송파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송파구 석촌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마을 이름 자체가 된 백제 왕실의 무덤들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30필지임야 12필지대지 16필지밭 2필지
이 마을 어디를 파도 돌무더기가 나왔다.사람들은 결국 그 돌무지 자체를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송파구 석촌동의 국유지는 총 30필지, 121,550㎡였습니다. 임야가 12필지 84,926㎡로 면적이 가장 넓었고, 대지가 16필지 29,927㎡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밭도 2필지 6,697㎡ 있었습니다.
석촌동(石村洞)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돌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마을에 돌무지무덤, 곧 적석총이 유독 많았다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1916년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 이 일대에는 무려 90여 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지명 하나가 통째로 그 마을의 고고학적 실체를 증언하는, 참으로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이 돌무지무덤들은 실제로 한성백제 시대, 백제 초기 왕실과 지배층의 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1974년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이 3·4호분을 긴급 발굴조사한 결과, 고구려의 국내성(지금의 중국 환런) 인근 적석총과 매우 유사한 구조와 축조 양식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백제를 세운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한 이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1975년, 이 유적은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광복 이후 전쟁과 혼란을 거치며 이 고분 유적지는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심지어 무덤 위에 무허가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1983년 도로공사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이형구 교수의 노력으로 다시 조사가 이루어지며 사적 지정면적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1912년의 이 마을 국유지 장부에서, 임야가 12필지로 국유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30장의, 마을 이름 자체가 된 그 돌무지무덤들의 오랜 기억이 새겨진 이 자리의 기록을 지금부터 넘겨봅니다.

목차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국유지 임야 12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대지 16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밭 2필지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데이터 검증 노트
지목별 현황 표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송파구 석촌동의 국유지는 총 30필지, 121,550㎡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36,769평입니다.
조선시대부터 백제 초기 왕실 무덤이 흩어져 있던 이 자리는, 지금의 석촌호수와 인접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석촌호수는 원래 한강의 옛 물길이었던 곳으로, 1971년 한강 개발 과정에서 지금의 호수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송파구의 잠실동, 신천동, 송파동, 삼전동, 방이동, 문정동, 마천동, 거여동, 가락동을 다루었습니다. 이번 석촌동 국유지 편은 그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지금의 석촌동은 서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이 자리하며, 석촌호수와 함께 인근 주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 명소로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2. 국유지 임야 12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에는 임야가 12필지, 84,926㎡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40.0%, 면적으로는 69.9%를 차지하는 가장 넓은 지목입니다. 임야 한 필지의 평균은 7,077.2㎡, 약 2,141평이라는 상당히 넓은 규모입니다. 돌무지무덤이 흩어져 있던 이 벌판의 상당 부분이, 국가 소유의 임야로 보존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3. 국유지 대지 16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에는 대지가 16필지, 29,927㎡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53.3%로 가장 많은 필지 수를 이루는 지목입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은 1,870.4㎡, 약 566평으로 넉넉한 규모입니다.
4. 국유지 밭 2필지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1912년 석촌동 국유지에는 밭이 2필지, 6,697㎡ 있었습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3,348.5㎡, 약 1,013평입니다. 고분군 인근 넓은 벌판 일부가, 국가 소유의 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5.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와 면적 검증: 대지 16필지 29,927㎡ + 임야 12필지 84,926㎡ + 밭 2필지 6,697㎡ = 30필지, 121,550㎡로, 전체 국유지 필지 수와 면적 모두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차 없는 완벽한 데이터셋입니다.
6. 지목별 현황 표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대지 | 16필지 | 29,927㎡ | 53.3% | 24.6% |
임야 | 12필지 | 84,926㎡ | 40.0% | 69.9% |
밭 | 2필지 | 6,697㎡ | 6.7% | 5.5% |
전체 | 30필지 | 121,550㎡ | 100% | 100% |
표 설명: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으로, 대지가 필지 수, 임야가 면적에서 각각 최대 비중을 차지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
석촌동은 마을 이름 자체가 실제 고고학적 유적(백제 적석총)에서 유래했다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직접적인 지명-유적 연결 사례로 기록됩니다. 사적 제243호로 지정된 실제 백제 왕실 무덤군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각별합니다.
잠실동, 신천동, 송파동, 삼전동, 방이동, 문정동, 마천동, 거여동, 가락동에 이은 송파구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7.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석촌동의 기록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1916년 조사 당시 확인된 90여 기의 적석총과 봉토분 가운데,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1912년의 이 국유지 필지들이 정확히 어느 고분군과 겹치는지를 대조하는 일은, 이미 훼손되어 사라진 나머지 고분들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광복 이후 전쟁과 혼란 속에서 무허가 민가가 들어서며 훼손된 고분들의 흔적을 지표조사로나마 재확인하는 작업도 시급합니다.
이 마을 어디를 파도 돌무더기가 나왔다는 그 오랜 기억은, 이제 사적 제243호라는 이름으로 공식화되어 지금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서울 석촌동 고분군, 백제와 고구려를 잇는 결정적 증거
1974년 서울대박물관의 긴급 발굴조사는, 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돌무지무덤이 실제로 고구려 국내성 인근 적석총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녔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백제를 세운 세력이 고구려로부터 남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1983년 이형구 교수의 재조사로 사적 지정면적이 크게 확대되었고, 1985년에는 정부가 석촌동·방이동 고분군과 몽촌토성을 아우르는 백제유적보존령을 내려 519억 원 규모의 보존 사업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지명 속에 숨겨진 유적의 가치를 뒤늦게나마 온전히 되살린 좋은 사례입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9.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30필지, 121,550㎡(약 36,769평)였으며, 대지 16필지, 임야 12필지, 밭 2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Q. 석촌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돌마을'이라는 뜻으로, 이 지역에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적석총)이 유독 많았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Q.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무엇인가요?
A. 한성백제 시대 백제 왕실과 지배층의 무덤으로 확인된 유적으로, 1975년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16년 조사 당시 90여 기의 적석총과 봉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Q. 석촌동 고분군은 왜 고구려와 관련이 있나요?
A. 1974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국내성(지금의 중국 환런) 인근 적석총과 매우 유사한 구조가 확인되어, 백제를 세운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10.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는 총 30필지 121,550㎡로, 임야가 면적의 대부분을, 대지가 필지 수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마을 이름 자체가 백제 왕실의 돌무지무덤에서 유래한, 지명과 유적이 하나로 겹쳐진 각별한 땅이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국유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대지·임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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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이 마을 어디를 파도 돌무더기가 나왔다.
사람들은 결국 그 돌무지 자체를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서른 필지, 121,550제곱미터의 국유지가 그 이름의 뿌리를 조용히 품고 있었다.
아흔 기가 넘던 그 돌무지무덤들은, 전쟁과 무허가 민가 속에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몇 기의 무덤이, 백제와 고구려를 잇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마을의 이름 하나가, 잊혔던 왕조의 뿌리를 끝내 증언해냈다.
이제 그 자리에는 복원된 고분군과 잔잔한 호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석촌동 국유지의 30필지에 다시 그 돌무지무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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