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태종이 화살을 맞을 뻔한 벌판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동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성동구 성수2가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태종이 화살을 맞을 뻔한 벌판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90필지밭 84필지임야 3필지대지 3필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쏜 화살은 빗나가, 그가 세워둔 차일 기둥에 꽂혔다.사람들은 그날 이후 이 벌판을 '화살이 꽂힌 벌'이라 불렀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동구 성수2가의 국유지는 총 90필지, 393,499㎡였습니다. 밭이 84필지 291,254㎡로 가장 많았고, 임야가 3필지 101,345㎡, 대지가 3필지 899㎡ 있었습니다.
성수동이라는 이름은 6.25 전쟁 후 1950년에 만들어진 비교적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 이전 이 자리는 '뚝섬', 혹은 '둑도(纛島)', '살곶이벌'이라는 훨씬 오래된 이름으로 불려왔습니다. 성수2가는 옛 동뚝도리, 곧 웃말이라 불리던 마을에 해당합니다.
이 자리에는 조선 왕실의 극적인 일화가 전해집니다. 1402년, 함흥에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의 간청으로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해 이 벌판에 차일을 치고 기둥을 세웠는데, 태조가 아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고, 태종이 급히 기둥 뒤로 몸을 피하며 화살이 그 기둥에 꽂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날 이후 이 벌판은 '화살이 꽂힌 벌', 곧 살곶이벌(전관평, 箭串坪)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벌판은 조선 초기부터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관마(官馬)의 목마장이자, 군대를 사열하는 열무장(閱武場)으로 쓰였습니다. 나라의 말을 기르고 병사를 조련하던 이 너른 벌판에, 1912년의 국유지 장부에서도 여전히 국가 소유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습니다. 밭이 84필지로 국유지 전체의 93.3%를 차지하며 가장 넓은 지목으로 확인됩니다. 90장의, 왕실의 극적인 순간과 국가 목장의 기억이 함께 새겨진 이 자리의 기록을 지금부터 넘겨봅니다.
흥미롭게도 뚝섬이라는 이름에는 또 다른 유래도 함께 전합니다. 1555년, 말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30리에 달하는 땅 둘레에 돌담을 쌓았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둑을 쌓은 섬처럼 보여 '뚝섬'이라 불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설로는 조선 태조 때 독기(纛旗)가 강류를 따라 떠내려 오자, 이를 기려 독제소를 설치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린 데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화살의 전설과 돌담의 흔적, 그리고 깃발을 기리던 제사까지, 이 벌판의 이름 하나에는 여러 겹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는 셈입니다.

목차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국유지 밭 84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임야와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데이터 검증 노트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성동구 성수2가의 국유지는 총 90필지, 393,499㎡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119,033평입니다.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은 4,372.2㎡, 약 1,323평.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합류부에 위치한 반도 형태의 이 지역은,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물길이 생겨 섬처럼 보였다 하여 '뚝섬'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성동구의 송정동, 성수1가, 상왕십리, 사근동, 마장동, 금호동을 다루었습니다. 성수2가 국유지는 그 여덟 번째 성동구 편이자, 국유지만을 별도로 다루는 특별편입니다. 지금의 성수2가는 서울숲, 뚝섬한강공원과 함께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어 수제화 공방과 소셜벤처 밀집지구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1966년 이전까지 이 일대는 개발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농경지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뚝섬지구가 토지구획정리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며 준공업지구로 급격히 탈바꿈했고, 1963년 모나미를 비롯한 여러 공장이 이곳에 자리 잡으며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 지역으로 성장했습니다. 조선시대 국가 목장에서 근대 공업지구로, 그리고 지금은 다시 문화와 창업의 거리로 변모해온 이 지역의 역사는, 한 자리가 겪어온 시대별 정체성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2. 국유지 밭 84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에는 밭이 84필지, 291,254㎡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93.3%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3,467.3㎡, 약 1,049평. 관마 목장이자 열무장으로 쓰이던 이 벌판의 상당 부분이, 국가 소유의 밭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3. 국유지 임야와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성수2가 국유지에는 임야가 3필지 101,345㎡, 대지가 3필지 899㎡ 있었습니다.
임야 한 필지의 평균은 33,781.7㎡, 약 10,219평이라는 이 시리즈에서도 매우 넓은 규모입니다. 국유지 전체 면적의 25.8%를 차지하는 이 넓은 임야는,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이 지역의 하천변 숲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지는 3필지 899㎡로, 국유지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건물 부지로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4.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와 면적 검증: 대지 3필지 899㎡ + 임야 3필지 101,345㎡ + 밭 84필지 291,254㎡ = 90필지, 393,498㎡로, 전체 필지 수와는 정확히 일치하며, 면적은 전체 표기 393,499㎡와 1㎡의 극히 근소한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평(坪) 단위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상적인 반올림 오차로 판단됩니다.
5.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밭 | 84필지 | 291,254㎡ | 93.3% | 74.0% |
임야 | 3필지 | 101,345㎡ | 3.3% | 25.8% |
대지 | 3필지 | 899㎡ | 3.3% | 0.2% |
전체 | 90필지 | 393,499㎡ | 100% | 100% |
표 설명: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을 정리한 표로, 밭이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면적 비율 그래프
밭
74.0%
임야
25.8%
시리즈 기록 노트
성수2가는 마장동, 등촌동, 면목동, 여의도동, 목동에 이은 이 시리즈 여섯 번째 목축 관련 지명(관마 목장, 열무장) 사례로 기록됩니다. 태종과 태조의 실제 왕실 일화가 지명 유래로 확인되는 각별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송정동, 성수1가, 상왕십리, 사근동, 마장동, 금호동에 이은 성동구 여덟 번째 편(국유지 특별편)입니다.
6.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성수2가 국유지의 기록은 조사 전략에 각별한 신호를 보냅니다. 첫째, 태조와 태종의 화살 일화가 전해지는 정확한 위치를 문헌으로 규명하는 일은 조선 초기 왕실사 연구에 흥미로운 자료가 됩니다. 둘째, 조선시대 관마 목장과 열무장의 정확한 경계와 규모를 확인하는 일도 국가 목축 및 군사 훈련사 연구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셋째, 살곶이다리라는 조선 전기 최대 규모 돌다리의 원형과 그 주변 국유지 이용 방식을 함께 조사하는 일도 조선시대 교통사 연구에 의미가 있습니다.
1912년 국유지의 93.3%가 밭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 이미 목장으로서의 실질적 기능이 상당 부분 축소되고 농경지로 전환되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걸쳐 국가 목장 체계가 어떻게 해체되고 그 토지가 어떤 방식으로 재편되었는지를 추적한다면, 전통적인 국가 관리 체계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로 이행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화살이 아들을 스치듯 지나갔던 그 극적인 순간의 기억은, 지금도 이 벌판의 이름 속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살곶이다리, 조선 전기 최대 규모 돌다리의 원형
살곶이다리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가장 큰 규모의 돌다리로, 한양과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이 다리를 건너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인릉, 성종과 중종의 능인 선릉·정릉으로 향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콘크리트 덧칠과 1925년 을축년 대홍수의 시련을 겪었지만, 지속적인 보존을 통해 지금도 그 원형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총 몇 필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A. 1912년 성수2가 국유지는 총 90필지, 393,499㎡(약 119,033평)였습니다.
Q. 살곶이벌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1402년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돌아올 때, 태조가 쏜 화살이 태종이 세운 차일 기둥에 꽂혔다는 일화에서 '화살이 꽂힌 벌'이라는 뜻으로 유래했습니다.
Q. 성수2가는 예전에 어떤 용도로 쓰였나요?
A. 조선 초기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관마 목장이자, 군대를 사열하는 열무장으로 쓰였습니다.
Q. 성수동이라는 이름은 언제 생겼나요?
A. 1950년에 만들어진 이름으로, 성덕정의 '성'과 뚝도수원지의 '수'를 합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뚝섬, 살곶이벌 등으로 불렸습니다.
Q. 살곶이다리는 지금도 남아 있나요?
A. 네. 조선 전기 최대 규모의 돌다리로, 여러 시련을 겪었지만 지금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9.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는 총 90필지 393,499㎡의 살곶이벌로, 밭 84필지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넓은 임야가 강가를 지켰으며, 아버지의 화살이 아들을 스치고 지나갔던 그 극적인 왕실의 순간과, 관마를 기르고 병사를 조련하던 국가 목장의 기억을 함께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화살과 돌담, 깃발의 전설이 겹겹이 쌓인 그 벌판은, 이제 도시 속 초록빛 숲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2가 국유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대지·임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912년#성동구성수2가#성수동#뚝섬#살곶이벌#살곶이다리#국유지#마장동#금호동#토지조사사업#문화재발굴
닫는 글 · 산문시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쏜 화살은 빗나가, 그가 세워둔 차일 기둥에 꽂혔다.
사람들은 그날 이후 이 벌판을 '화살이 꽂힌 벌'이라 불렀다.
여든넉 뙈기의 밭이 이 국유지의 대부분을 채우고,
세 곳의 넓은 숲이 강가를 조용히 지켰다.
관마를 기르고 병사를 조련하던 그 오랜 벌판의 소임은,
왕실의 극적인 순간과 함께 이 자리에 새겨졌다.
이제 그 벌판에는 서울숲의 푸르름과 공방의 망치질 소리가 가득하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성수2가의 90필지에 다시 그 화살의 이야기가 되새겨졌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