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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노루가 살던 산자락, 왕자의 별서가 있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6시간 전
  • 5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성북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성북구 장위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노루가 살던 산자락, 왕자의 별서가 있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3필지임야 2필지밭 1필지

병자호란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그 왕자는,이 산자락에 별서를 짓고 폭포 곁에서 붓을 들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성북구 장위동의 국유지는 총 3필지, 4,786㎡였습니다. 임야가 2필지 3,973㎡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밭이 1필지 813㎡ 있었습니다.

장위동(長位洞)이라는 이름은 마을 뒤에 있는 장위산(獐位山)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노루 장(獐)' 자를 쓴 이 산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이어지며, 지금은 '길 장(長)' 자로 바뀌어 장위동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동북쪽 끝자락에 자리했던 이 마을은, 우이천을 경계로 한적한 농촌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조선 왕실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인평대군은, 이 일대에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구천은폭(九天銀瀑)이라는 폭포 곁에서 풍류를 즐기며 여러 예술 작품을 남겼습니다. 별서는 별장과 비슷하지만 농사도 함께 지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른, 조선 왕실과 사대부의 독특한 전원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지금 북서울꿈의숲 안에는 이 인평대군의 별서와 관련된 창녕위궁 재사(昌寧尉宮 齋舍)가 남아, 그 오랜 흔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1912년의 이 마을 국유지 장부에서, 임야가 2필지로 국유지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루가 뛰놀던 이 산자락과, 왕자가 풍류를 즐기던 그 별서의 기억이 함께 새겨진 이 자리의 기록을 지금부터 넘겨봅니다.

인평대군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로, 병자호란 당시 형인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인물입니다. 귀국 후 그는 정치보다는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시서화에 두루 능한 왕실 문인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가 마련한 이 별서는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국난의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던 개인적인 문화 공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구천은폭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폭포 곁에서, 그는 정치적 격랑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꾸어갔습니다.



목차

  1. 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2. 국유지 임야 2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3. 국유지 밭 1필지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4. 데이터 검증 노트

  5. 지목별 현황 표

  6.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8. 자주 묻는 질문

  9. 한 줄 결론


1. 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성북구 장위동의 국유지는 총 3필지, 4,786㎡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1,448평입니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에 속했던 이 마을은, 1895년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소문외계 장위리로 불렸습니다.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속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이 되었습니다. 1949년 서울시 성북구 숭인출장소 장위리로 편입되었고, 1950년 지금의 장위동이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성북구의 정릉동, 장위동, 안암동, 성북동, 석관동, 상월곡동, 돈암동을 다루었습니다. 이번 장위동 국유지 편은 그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일제강점기 경원선·경춘선 등이 개통되며 도시화의 기틀이 마련된 이 지역은, 해방 이후 다양한 택지개발사업이 이루어져 서울 주택사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2. 국유지 임야 2필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에는 임야가 2필지, 3,973㎡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66.7%, 면적의 83.0%를 차지하는 대부분입니다. 임야 한 필지의 평균은 1,986.5㎡, 약 601평입니다. 장위산 자락, 노루가 뛰놀던 이 산림의 상당 부분이 국가 소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3. 국유지 밭 1필지는 어떤 자리였을까요?

1912년 장위동 국유지에는 밭이 1필지, 813㎡ 있었습니다.

국유지 전체의 33.3%, 약 246평 규모입니다.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던 이 자리에, 국가가 소유하던 작은 밭 한 뙈기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4.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와 면적 검증: 임야 2필지 3,973㎡ + 밭 1필지 813㎡ = 3필지, 4,786㎡로, 전체 국유지 필지 수와 면적 모두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차 없는 완벽한 데이터셋입니다.


5. 지목별 현황 표

구분

필지 수

면적(㎡)

필지 비율

임야

2필지

3,973㎡

66.7%

1필지

813㎡

33.3%

전체

3필지

4,786㎡

100%

표 설명: 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으로, 임야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

장위동 국유지는 이 시리즈에서도 가장 작은 규모의 국유지 기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평대군 별서라는 실제 왕실 관련 유적이 지금도 북서울꿈의숲 안에 남아 있는 이 시리즈 각별한 사례입니다.

정릉동, 장위동, 안암동, 성북동, 석관동, 상월곡동, 돈암동에 이은 성북구 국유지 특별편입니다.


6.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장위동 국유지의 기록은 조사 전략에 각별한 신호를 보냅니다. 첫째, 인평대군의 별서와 구천은폭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는 일은 조선 왕실 별서 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둘째, 창녕위궁 재사의 원형 건축과 그 주변 국유지의 관계를 조사하는 일도 조선 후기 왕실 관련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셋째, 장위산이라는 지명의 정확한 위치와 그 지형적 변화를 확인하는 일도 이 지역 지명사 연구에 의미가 있습니다.

병자호란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그 왕자가 폭포 곁에서 누렸던 풍류의 기억은, 지금도 북서울꿈의숲 안 재사의 처마 밑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창녕위궁 재사, 왕실 별서의 살아있는 흔적

북서울꿈의숲 안에 자리한 창녕위궁 재사는, 인평대군의 별서 문화와 관련된 조선 왕실 건축의 귀중한 원형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보존을 통해,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겪은 왕자가 어떻게 예술과 풍류로 자신을 다스렸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 현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3필지, 4,786㎡(약 1,448평)였으며, 임야 2필지와 밭 1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Q. 장위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마을 뒤 장위산(獐位山, 노루 위치 산)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길 장(長)' 자로 표기가 바뀌었습니다.

Q. 인평대군과 장위동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인평대군이 이 일대에 별서를 마련하고, 구천은폭이라는 폭포 곁에서 풍류를 즐기며 여러 예술 작품을 남겼습니다.

Q. 창녕위궁 재사는 지금도 남아 있나요?

A. 네. 북서울꿈의숲 안에 인평대군의 별서와 관련된 창녕위궁 재사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9.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는 총 3필지 4,786㎡의 작은 규모로, 임야 2필지가 그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노루가 뛰놀던 장위산 자락과 병자호란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인평대군이 풍류를 즐겼던 별서의 기억을 함께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기록이 궁금하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국유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임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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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병자호란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그 왕자는,


이 산자락에 별서를 짓고 폭포 곁에서 붓을 들었다.



단 세 필지, 겨우 4,786제곱미터의 국유지가


이 장위산 자락의 오랜 기억을 조용히 품고 있었다.



노루가 뛰놀던 그 산과, 구천은폭의 맑은 물소리가


왕자의 시름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북서울꿈의숲이 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장위동 국유지의 단 세 필지에 다시 그 왕자의 풍류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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