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마포구 동교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신촌천변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 다섯 뙈기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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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국유지 심층편)
1912년 마포구 동교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신촌천변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 다섯 뙈기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5필지논 3필지밭 2필지
135필지의 조용한 다리 마을 가운데,단 다섯 뙈기만이 나라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 14,737㎡였습니다. 그 가운데 논이 3필지 11,649㎡로 가장 많았고, 밭이 2필지 3,087㎡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마포구 동교동 전체 자료를 다룬 바 있습니다. 동쪽 다리라는 뜻의 동교(東橋)에서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신촌천을 사이에 두고 서교동과 짝을 이루던 조용한 농촌이었습니다. 총 135필지 가운데 오씨가 22필지로 1위를 차지하며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오씨 우위 구도를 보였고, 훗날 이 마을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자리하며 '동교동계'라는 정치 용어까지 낳았습니다.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그 135필지 가운데, 국가가 직접 소유하고 있던 다섯 뙈기의 땅에 초점을 맞춘 세부 기록입니다. 전체 마을의 3.7%에 불과한 이 작은 국유지가, 어떤 지목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동안 여러 동네의 국유지 자료를 별도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광진구 화양동(옛 모진동)의 경우 전체 필지의 72.97%가 국유지였던 압도적인 사례였고, 성동구 송정동 역시 65.82%에 달하는 높은 국유지 비율을 보였습니다. 이런 마을들은 대체로 옛 왕실 목장이나 국가 시설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동교동의 국유지 비율(4.8%)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이 마을이 특별한 국가 시설 없이 평범한 개인 농경지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목차
1912년 동교동 국유지는 어떤 성격이었나요?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데이터 검증 노트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1912년 동교동 국유지는 어떤 성격이었나요?
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 14,737㎡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4,458평입니다.
이는 동교동 전체 135필지, 304,731㎡ 가운데 필지 수로는 3.7%, 면적으로는 4.8%에 해당하는 작은 비중입니다. 신촌천을 낀 이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대부분의 땅은 개인 문중의 소유였고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땅은 이렇게 소수에 그쳤습니다.
필지 하나의 평균 면적은 2,947.4㎡, 약 892평으로, 동교동 전체 필지 평균(2,257.3㎡)보다도 오히려 넓은 규모입니다. 적은 수의 필지였지만 각각의 크기는 상당히 큰 편이었던 셈입니다.
이는 국유지가 소규모로 잘게 쪼개어 관리되기보다, 상대적으로 큰 단위의 필지로 통합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개인 소유의 논밭이 세대를 거치며 상속과 분할을 반복해 점차 작은 필지로 쪼개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가 관리하는 땅은 그런 분할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2.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동교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3필지, 11,649㎡ 있었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79.0%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은 3,883.0㎡, 약 1,175평에 달하는 큰 배미였습니다. 신촌천의 물줄기와 가까운 저지대 논이 국유지로 편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교동 전체 자료에서 확인된 논 49필지, 162,856㎡와 비교하면, 이 3필지의 국유지 논은 전체 논 면적의 7.2%에 해당합니다. 신촌천 물줄기와 가까운 특정 구역의 논만이 국유로 편입되어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논은 여전히 개인 소유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국유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특정한 필요나 목적에 따라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3.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동교동 국유지 가운데 밭은 2필지, 3,087㎡ 있었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21.0%입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1,543.5㎡, 약 467평이었습니다. 3필지의 논과 2필지의 밭, 이 다섯 뙈기가 동교동 국유지의 전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동교동 전체 밭 57필지, 111,362㎡와 비교하면, 이 2필지의 국유지 밭은 전체 밭 면적의 2.8%에 해당합니다. 국유지 논의 비율(7.2%)보다도 낮은 수치로, 밭보다는 논이 국유화 대상으로 더 자주 선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경향은 저지대의 관개 가능한 논이 밭보다 상대적으로 국가 관리의 필요성이 컸거나, 수리 시설과의 연계성이 높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4.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 검증: 논 3 + 밭 2 = 5필지로, 전체 국유지 합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검증: 11,649 + 3,087 = 14,736㎡로, 전체 면적 14,737㎡와 1㎡의 극히 근소한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평(坪) 단위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상적인 반올림 오차로 판단됩니다.
5.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논 | 3필지 | 11,649㎡ | 60.0% | 79.0% |
밭 | 2필지 | 3,087㎡ | 40.0% | 21.0% |
전체 | 5필지 | 14,737㎡ | 100% | 100% |
표 설명: 1912년 마포구 동교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을 정리한 표로, 논이 필지 수와 면적 모두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면적 비율 그래프
논
79.0%
밭
21.0%
시리즈 기록 노트
동교동 국유지 비율(4.8%)은 이 시리즈 전체 평균 범위에 속하는 수치입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마을 전체 평균보다 넓다는 점은, 국유지가 소규모로 흩어지기보다 비교적 큰 단위로 관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확인해온 국유지 비율은 마을의 역사적 성격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왕실 목장이나 군사 시설이 있던 마을은 국유지 비율이 절반을 훌쩍 넘는 반면, 평범한 개인 농경지 중심의 마을은 국유지 비율이 한 자릿수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동교동은 후자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사례로, 이 마을이 특별한 국가적 시설 없이 순수하게 개인 문중들이 오랜 세월 일구어온 평범한 농촌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이런 대조는 오히려 이 시리즈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국유지 비율이 유독 높았던 동네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대부분 조선시대 왕실이나 관청이 직접 운영하던 시설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반면 동교동처럼 국유지 비율이 낮은 동네들은 대체로 평범한 농촌 마을로서, 특정한 국가적 기능 없이 순수하게 주민들의 생활 터전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이렇게 낮은 국유지 비율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 마을의 평범하고 소박한 역사를 증언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는 셈입니다.
이 글은 앞서 다룬 동교동 전체 자료(135필지)의 후속 심층편으로, 국유지 세부 구성만을 별도로 정리한 자료입니다.
6.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국유지 세부 자료는 특히 소유권 변동 이력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땅은 대체로 관리 기록이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어, 이후 시대별 용도 변화를 추적하기에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5필지에 불과한 이 작은 국유지가 이후 어떤 경로로 민간에 불하되었는지, 혹은 다른 공공 용도로 전환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동교동 일대의 근현대 토지 이용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135필지의 조용한 다리 마을 가운데 단 다섯 뙈기만이 나라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얼마나 철저히 개인 문중의 손에 뿌리내려 있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작은 규모의 국유지라도 그 세부 내역을 별도로 기록하고 대조하는 작업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전체 마을 통계만 놓고 보면 놓치기 쉬운 소유 구조의 미세한 결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유지가 유독 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땅이 어떤 성격의 관리 대상이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예컨대 관개시설이나 수리 관련 시설과 인접한 논이 우선적으로 국유지로 편입되었을 가능성, 혹은 이전 시기 왕실이나 관청에 속했던 토지가 그대로 국유로 이어졌을 가능성 등을 검토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밀한 분석은 오직 이렇게 지목별로 세분화된 자료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1910년대 초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전까지 관습적으로 인정되던 경작권과 소유권의 경계가 이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명확한 법적 등기로 정리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유지로 분류된 땅은 대체로 조선 왕조 시기부터 국가나 관청이 관리해온 토지였거나, 소유 관계가 불분명해 국가 귀속으로 처리된 토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교동의 이 다섯 필지가 어느 쪽에 해당했는지는 추가적인 문헌 대조 없이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자체로 근대 토지제도 성립기의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합니다.
7.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동교동 김대중 가옥, 2025년 국가유산이 된 민주화의 현장
2025년 10월,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회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안건을 조건부 가결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유적뿐 아니라 20세기 현대사의 현장 역시 체계적인 조사와 지정을 통해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최신 사례입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국유지는 총 몇 필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A. 총 5필지, 14,737㎡(약 4,458평)였습니다.
Q. 국유지 가운데 논과 밭의 비중은 어땠나요?
A. 논이 3필지 11,649㎡(79.0%), 밭이 2필지 3,087㎡(21.0%)로, 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Q. 동교동 전체 필지 가운데 국유지 비율은 어느 정도였나요?
A. 동교동 전체 135필지 가운데 국유지는 5필지로, 약 3.7%에 해당합니다. 면적으로는 전체 304,731㎡ 가운데 4.8%였습니다.
Q. 동교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A. 신촌천을 사이에 두고 서교동과 짝을 이루던 조용한 농촌 마을로, 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자리하며 '동교동계'라는 정치 용어를 낳았습니다.
Q. 동교동의 국유지 필지는 다른 국유지 사례와 비교해 어떤 특징이 있나요?
A. 필지 수는 5개로 적지만, 필지당 평균 면적(2,947.4㎡)은 동교동 전체 필지 평균보다 오히려 넓었습니다. 이는 국유지가 소규모로 쪼개지지 않고 비교적 큰 단위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9.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마포구 동교동의 국유지는 총 5필지 14,737㎡로 동교동 전체의 채 5%가 되지 않는 작은 비중이었으며, 논 3필지가 그 가운데 79.0%를 차지한, 신촌천변 조용한 다리 마을에 남아 있던 나라 땅의 마지막 흔적이었습니다. 작은 규모였지만, 그 안에는 이 마을의 소유 구조 전체를 이해할 실마리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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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마포구 동교동 국유지의 세부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국유지)
분석 항목: 국유지 필지 수, 지목(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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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백서른다섯 뙈기의 다리 마을 가운데,
겨우 다섯 뙈기만이 나라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세 배미의 논이 그 가운데 열에 여덟을 차지하고,
두 뙈기의 밭이 나머지를 조용히 채웠다.
개인 문중의 손이 대부분을 이루던 이 작은 마을에서,
국가의 몫은 이렇게 소박하게 남아 있었다.
신촌천은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고,
그 곁에서 나라 땅과 개인 땅이 나란히 어우러져 있었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동교동의 다섯 뙈기 국유지에 다시 조용한 물결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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