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1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임금이 직접 밭을 갈던 적전, 선농단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동대문구 편 (국유지 세부)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11필지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임금이 직접 밭을 갈던 적전, 선농단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총 11필지밭 5필지임야 2필지논 2필지대지 2필지
곤룡포를 벗고 쟁기를 잡은 임금이,백성들 앞에서 손수 밭을 갈았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는 총 11필지, 17,130㎡였습니다. 이 가운데 밭이 5필지 3,424㎡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고, 임야가 2필지 11,107㎡로 면적에서는 가장 넓었습니다. 논이 2필지, 대지가 2필지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자료는 제기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지목별 세부 내역입니다.
이번 글에 대한 안내
이번에 살펴보는 자료는 1912년 제기동 전체의 토지 현황이 아니라, 그 가운데 국유지로 분류된 11필지만을 지목별로 세분화한 자료입니다. 제기동의 논, 밭, 대지 전체 규모나 성씨별 소유 현황은 이번 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으며, 국유지 항목의 내부 구성만을 다룹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아래 내용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의 임금은 해마다 경칩이 지난 길한 날, 사흘 동안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뒤 새벽같이 이곳으로 나왔습니다. 신농씨와 후직씨, 농사를 가르쳤다는 고대 중국의 두 신에게 풍년을 비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제사터를 제기(祭基), 즉 '제사를 지내던 터'라 불렀고, 그 이름이 그대로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임금은 곤룡포 대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고, 관경대에 올라 세자와 대신들과 함께 몸소 쟁기를 잡았습니다.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 즉 임금이 직접 경작하는 상징적 논밭에서였습니다. 이 의식을 친경(親耕)이라 했고, 백성들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몸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에 올렸던 음식을 여럿이 나눠 먹기 위해 고기 국물에 밥을 말아낸 것이 오늘날 설렁탕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 친경 의식은 1909년, 융희 3년을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폐지되었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3년 뒤인 1912년, 이 토지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임금이 손수 밭을 갈던 그 적전의 흔적이 국유지 11필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그 세부 구성을 살펴봅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광진구 화양동에서도 국유지만의 지목별 세부 자료를 다룬 바 있습니다. 화양동이 세종이 세운 왕실 목장의 흔적이었다면, 제기동은 국가 제례가 열리던 성역의 흔적입니다. 두 사례 모두 조선 왕조의 직할 시설이 국유지로 이어졌다는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그 성격은 각각 실용적 목축과 상징적 의례로 대비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왕실 시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근대의 국유지 제도 안에 흡수되어간 과정을, 이 두 편을 나란히 놓고 볼 때 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제기동과 선농단은 어떤 곳이었나요?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국유지 중 논과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데이터 검증 노트
국유지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제기동과 선농단은 어떤 곳이었나요?
제기동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선농단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한성부 인창방 제기리계에 속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기정(祭基町)이 되었다가, 1943년 경성부 동대문구로 편입되었고, 1946년 지금의 제기동이 되었습니다.
선농단은 지금의 제기동 274-1번지에 위치하며, 2001년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곁에는 선농단을 축조할 당시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1972년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릉천이 제기동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며, 지금도 매년 동대문구청 주관으로 선농제가 다시 봉행되고 있습니다.
2.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제기동 국유지 11필지 가운데 밭은 5필지, 3,424㎡였습니다.
국유지 전체 필지의 45.5%로 가장 많은 지목이지만, 면적으로는 20.0%에 그칩니다. 밭 한 필지의 평균은 684.8㎡, 약 207평입니다.
임금이 직접 쟁기를 잡고 갈았다는 적전이 바로 이 밭들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백성에게 농사의 본을 보이던 그 상징적인 땅만큼은 개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국가의 소유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제기동 국유지 가운데 임야는 2필지, 11,107㎡였습니다.
국유지 전체 면적의 64.8%에 달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임야 한 필지의 평균은 5,553.5㎡, 약 1,680평에 이르는 큰 규모입니다.
선농단 주변의 숲과 향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심어진 구역이 이 임야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국가 제사 시설인 선농단의 신성한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그 주변 숲도 함께 국유로 관리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사를 지내는 제단 주변에는 예로부터 함부로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헤치지 못하도록 하는 금양 구역이 설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두 필지에 불과한 이 임야가 국유지 면적의 3분의 2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조선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이 신성한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만큼은 유지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4. 국유지 중 논과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제기동 국유지 가운데 논은 2필지 2,138㎡, 대지는 2필지 459㎡였습니다.
논 한 필지의 평균은 1,069.0㎡, 약 323평입니다. 적전이 반드시 밭의 형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선농단 인근 정릉천의 물을 끌어들인 작은 논이 함께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대지 2필지, 평균 229.5㎡는 선농단 제사를 준비하던 관리들의 시설이나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매년 임금이 사흘간 재계하며 준비하던 이 국가 제례를 위해서는, 제기를 보관하고 관원들이 머물 최소한의 시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5.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모든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필지 수 검증: 논 2 + 대지 2 + 임야 2 + 밭 5 = 11필지로, 국유지 전체 필지 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면적 검증: 2,138 + 459 + 11,107 + 3,424 = 17,128㎡로, 국유지 전체 면적 17,130㎡와 2㎡의 근소한 차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평(坪) 단위를 제곱미터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올림 오차로 추정되며, 원자료 수치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합니다. 이번 자료는 제기동 전체가 아니라 국유지 항목만을 다루므로, 제기동 전체의 필지 수나 면적, 민간 소유 현황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6. 국유지 지목별 현황 표와 그래프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필지 비율 | 면적 비율 |
밭 | 5필지 | 3,424㎡ | 45.5% | 20.0% |
임야 | 2필지 | 11,107㎡ | 18.2% | 64.8% |
논 | 2필지 | 2,138㎡ | 18.2% | 12.5% |
대지 | 2필지 | 459㎡ | 18.2% | 2.7% |
국유지 전체 | 11필지 | 17,130㎡ | 100% | 100% |
표 설명: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 국유지의 지목별 구성을 정리한 표로, 임야 2필지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밭 5필지가 필지 수에서 가장 많다. 이 표는 제기동 전체가 아닌 국유지 항목만의 세부 내역이다.
국유지 면적 비율 그래프
임야
64.8%
밭
20.0%
논
12.5%
대지
2.7%
시리즈 기록 노트
제기동은 광진구 화양동에 이어 이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확인된 '국유지만의 지목별 세부' 유형 자료입니다. 두 사례 모두 조선 왕실의 직할 시설, 즉 화양동의 조정 목장과 제기동의 국가 제단이 국유지 형성의 배경으로 추정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임야가 국유지 면적의 64.8%를 차지하는 것은 화양동(29.9%)보다 훨씬 높은 비중으로, 국가 제례 시설 특유의 경관 보호 목적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됩니다.
7.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제기동의 이 국유지 기록은 조사 전략에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선농단 자체는 이미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고, 그 향나무도 천연기념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전의 정확한 범위와 관경대의 옛 위치는 도시화 과정에서 상당 부분 잊혔습니다.
첫째, 밭 5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추적하면 적전의 실제 경계를 복원할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둘째, 대지 2필지는 제사 준비 시설의 흔적을 찾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임야 2필지의 범위를 파악하면 선농단을 둘러싼 원래의 숲 경관을 되짚어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손수 쟁기를 잡던 그 자리는, 지금 아파트와 상가가 빼곡한 도심 한복판에 사적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 국유지 11필지의 기록은 그 신성한 의례의 공간이 정확히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를 되짚어볼 수 있는 소중한 문헌입니다.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서울 선농단, 이미 사적으로 보존된 왕실 제례의 증거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서울 선농단은 2001년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었고, 그 곁의 500년 된 향나무는 1972년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문헌 기록과 현존 유산이 함께 어우러져 국가 제례 공간의 역사를 온전히 증언하는 사례이며, 앞으로 적전과 관경대의 정밀 조사가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기대하게 하는 선례입니다.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국가 시설의 흔적이 근대 이후에도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선농단 인근 조사에 참고할 선례입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9.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제기동의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국유지는 11필지, 17,130㎡였습니다. 이는 제기동 전체 토지가 아니라 국유지로 분류된 필지만의 규모입니다.
Q. 제기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A. '제사를 지내던 터'라는 뜻의 제기(祭基)에서 왔습니다. 조선 초기 세워진 선농단에서 임금이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했습니다.
Q. 적전이란 무엇인가요?
A. 임금이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뒤 직접 쟁기를 잡고 경작하던 상징적인 논밭입니다. 백성들에게 농사의 소중함을 몸소 보여주기 위한 친경 의식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1909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습니다.
Q. 설렁탕과 제기동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선농단에서 제사를 마친 뒤 참석자들에게 나눠주던 고기 국물 음식, 선농탕(先農湯)이 설렁탕의 유래 가운데 하나로 전해집니다.
Q. 1912년 제기동 국유지 중 가장 넓은 지목은 무엇이었나요?
A. 임야가 2필지 11,107㎡로 국유지 전체 면적의 64.8%를 차지해 가장 넓었습니다. 이는 선농단 주변 숲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0.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동대문구 제기동의 국유지 11필지, 17,130㎡는 임야 2필지가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한 가운데 밭 5필지가 필지 수에서 가장 많았으며, 임금이 손수 쟁기를 잡던 적전과 신농씨에게 풍년을 빌던 선농단의 신성한 흔적을 품은, 친경 의식이 폐지된 지 3년 만에 기록된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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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국유지의 지목별 세부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토지 기록 (국유지 항목)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국유지 11필지
분석 항목: 국유지 필지 수, 지목(논·대지·임야·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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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곤룡포를 벗고 쟁기를 잡던 임금의 자리,
사람들은 그 제사터를 제기라 불렀다.
다섯 뙈기의 밭이 그 상징적인 경작을 대신 기억하고,
두 필지의 넓은 숲이 신성한 제단을 조용히 둘렀다.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풍년을 빌던 그 새벽,
백성들은 임금이 손수 흙을 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친경의 의식은 융희 삼 년, 나라와 함께 저물었지만
그 흙의 기억만은 국유지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남았다.
오백 년 된 향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에서
옛 임금의 발걸음을 기억한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제기동의 국유지 11필지에 다시 선농제의 향내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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