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볕 좋은 마을이라 불리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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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중구 편 (국유지 특별편)
1912년 중구 남대문5가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볕 좋은 마을이라 불리던 자리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6필지전부 대지
본디 볕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이 자리는,훗날 큰 성문의 이름을 빌려 지금의 동네가 되었다.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중구 남대문5가의 국유지는 총 6필지, 976㎡였으며, 그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남대문5가는 지금의 남대문로5가에 해당하는 자리로, 서울역 동편, 후암로 이북 블록에 위치합니다. 이 자리의 원래 이름은 '볕 양(陽)' 자를 쓴 양동(陽洞)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마을은 다른 남대문로 1가부터 4가와는 지리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소 떨어져 있었는데,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대문5가에 편입되며 지금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름의 유래가 된 남대문, 곧 숭례문은 이 자리에서 남대문로4가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래, 숭례문 앞은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양의 관문이자 핵심 간선도로였습니다. 그 남대문 곁에서 태종·세종 대부터 시장이 형성되었고, 1608년 선혜청이 세워지며 지금의 남대문시장으로 발전해온 유서 깊은 상업 지역이 바로 이 인근입니다.
1912년의 이 자리 국유지 장부에서, 6필지 모두가 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성 관문에 가까운 이 자리에, 국가가 소유한 작은 집터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볕 좋은 마을이라는 정겨운 옛 이름과, 도성 대문의 위엄이 함께 새겨진 이 자리의 기록을 지금부터 넘겨봅니다.

목차
1912년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국유지 대지 6필지, 그 전부의 기록
데이터 검증 노트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 1912년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중구 남대문5가의 국유지는 총 6필지, 976㎡였습니다. 평으로 환산하면 약 295평의 작은 규모입니다.
이 시리즈는 앞서 중구의 남대문5가부터 1가, 광희동2가, 광희동1가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국유지 특별편은 그 연장선입니다. 지금의 남대문5가는 서울남대문경찰서, 서울스퀘어, 그랜드센트럴,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이 자리한 서울역 인근 도심 업무지구입니다.
2. 국유지 대지 6필지, 그 전부의 기록
1912년 남대문5가 국유지의 전부는 대지 6필지, 976㎡였습니다.
대지 한 필지의 평균은 162.7㎡, 약 49평으로 매우 작은 규모입니다. 다른 지목은 확인되지 않으며, 이 여섯 뙈기의 작은 집터가 국유지의 전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도성 관문에 가까운 이 도심 요지에, 국가가 소유하던 소규모 부지가 이렇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3. 데이터 검증 노트
검증 노트
본 글의 수치는 게재 전 프로그램(Python) 산술 검증을 거쳤습니다. 국유지 대지 6필지 976㎡가 전체 국유지 필지 수 및 면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오차 없는 완벽한 데이터셋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남대문5가 국유지는 이 시리즈에서도 손꼽히게 작은 국유지 기록으로, 지목이 대지 단일 항목으로만 구성된 명료한 사례입니다.
4. 이 자료가 문화유산 기초조사에 중요한 이유
114년 전의 필지 목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답은 법에 있습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매장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지표조사에서 표본조사로, 시굴조사에서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판단의 출발점이 이런 문헌 기초조사입니다.
남대문5가의 기록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원래 양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의 이름을 얻은 이 자리의 원형 취락 구조를 확인하는 일은, 도성 관문 인근 근대 도시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국유지 6필지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국가 소유가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일도 근대 국유지 편입 정책사 연구에 흥미로운 과제입니다.
볕 좋은 마을이라 불리던 이 자리의 정겨운 옛 이름은, 지금은 남대문로5가라는 이름 아래 도심 업무지구의 분주함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5.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세 가지
동대문운동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영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부지에서 조선 시대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인 이간수문이 통째로 드러났습니다. 발굴 덕분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가 바뀌었고, 유구는 현장에 보존되어 역사 공원이 되었습니다.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발견된 백제 왕성
1997년, 서울 풍납동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초기의 토기와 유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후 조사를 통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일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었고, 한국 고대사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습니다.
인사동 금속활자, 항아리 하나에 담긴 세계사
2021년,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 항아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세종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면 영원히 사라졌을 유산입니다.
세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조사가 있었기에 발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언제나 1912년 토지조사부 같은 문헌을 읽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6. 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6필지, 976㎡(약 295평)였으며,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Q. 남대문5가는 원래 어떤 이름이었나요?
A. 양동(陽洞), 곧 '볕 좋은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대문5가에 편입되었습니다.
Q. 남대문5가는 지금 어떤 곳인가요?
A. 서울남대문경찰서, 서울스퀘어, 그랜드센트럴,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이 자리한 서울역 인근 도심 업무지구입니다.
7. 한 줄 결론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는 총 6필지 976㎡의 작은 규모로, 그 전부가 대지였으며, 볕 좋은 마을이라는 정겨운 옛 이름 양동의 기억을 지금도 간직한 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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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자료를 동 단위로 정리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을 찾고 계시거나, 개발 예정 부지의 매장유산 조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 방문해 보세요.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5가 국유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대지),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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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 산문시
본디 볕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이 자리는,
훗날 큰 성문의 이름을 빌려 지금의 동네가 되었다.
여섯 뙈기, 겨우 976제곱미터의 국유지가 이 도심 한복판에 조용히 자리했다.
도성의 관문 곁에서, 이 작은 집터들은 나라의 이름으로 오랜 세월을 견뎠다.
양동이라는 그 정겨운 이름은, 남대문5가라는 새 이름 아래 조용히 잊혔다.
이제 그 자리에는 빌딩숲과 분주한 발걸음이 가득하다.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남대문5가의 여섯 필지에 다시 그 볕 좋은 마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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