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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산도 밭도 없이, 집터 두 자리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시간 전
8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산도 밭도 없이, 집터 두 자리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필지국유지 전체

651㎡국유지 총면적

100%대지 비중

325.5㎡필지당 평균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는 국유지 2필지, 총 651㎡가 있었습니다.

이 2필지 651㎡는 모두 대지였으며, 임야·밭·논 등 다른 지목의 국유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서계동 국유지는 필지당 평균 325.5㎡, 약 98평 규모의 집터 두 곳으로만 이루어진 도성 밖 주거지의 땅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 걸어서 5분.매일 수십만 명이 스쳐 가는 그 뒤편 언덕을,당신은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본 적 있나요?

아마 대부분은 아닐 거예요.

기차에서 내리면 다들 앞쪽 광장으로 나가니까요.

그런데 그 뒤편, 가파른 골목이 얽힌 서계동에는 114년 전 나라가 장부에 직접 이름을 올린 땅이 있었습니다.

딱 두 필지.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사람이 살던 집터였습니다.

산 한 자락, 밭 한 뙈기 없이 오직 집터만. 이 짧은 기록이 서계동이라는 동네의 정체를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오늘은 그 두 자리를 따라 걸어 보겠습니다. 다 읽고 나면, 다음에 서울역에 내릴 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 거예요.


목차

  1. 1912년 서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2. 서계동 이름의 역사, 청파 마을의 서쪽 갈래

  3. 1912년 서계동은 어디에 속해 있었나요?

  4. 대지 2필지 651㎡, 국유지 전부가 집터였다

  5. 필지당 325.5㎡, 두 자리의 크기를 상상하다

  6. 산도 밭도 없는 국유지가 말해주는 것

  7. 숫자로 한눈에 보는 서계동 국유지

  8.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인 이유

  9. 도심 땅속에서 역사를 건져 올린 성공 사례

  10. 재개발 앞의 서계동, 지금 꼭 알아야 할 것


011912년 서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질문에 바로 답부터 드릴게요.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에 있던 국유지는 모두 2필지입니다. 면적을 합치면 651㎡가 됩니다.

그리고 이 2필지는 둘 다 대지였습니다. 국유지 중 대지가 2필지 651㎡, 그게 서계동 국유지의 전부예요.

651㎡는 평으로 바꾸면 약 197평입니다. 농구 코트 한 면이 대략 420㎡ 정도니까, 코트 한 면 반 남짓한 넓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숫자만 보면 작죠. 같은 용산구 보광동의 국유지가 26필지 63,920㎡였던 것과 비교하면, 서계동은 그 100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작다고 해서 가벼운 기록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단출한 기록일수록 땅의 성격이 또렷하게 드러나거든요.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계동 국유지는 2필지 651㎡였고, 그 전부가 사람이 살던 대지였습니다.


02서계동 이름의 역사, 청파 마을의 서쪽 갈래

청파동과 한 뿌리에서 나온 동네

서계동의 역사를 알려면 바로 옆 청파동부터 이야기해야 합니다. 두 동네는 원래 한 동네였거든요.

조선 시대 이 일대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에 속한 청파 마을이었습니다. 청파는 여러 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4계와 5계에 해당하던 지역이 오늘날의 서계동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계라는 이름이 처음 공식 기록에 등장한 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입니다. 청파의 서쪽 갈래라는 뜻이 담긴 이름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그러니까 1912년 토지조사가 이루어질 당시에는 서계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직 없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기록은 지금의 서계동 범위에 해당하는 땅을 정리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성문 밖 사람들의 언덕

청파 일대는 남대문 밖에서 도성 안으로 물자를 대던 길목이었습니다. 땔감과 먹거리, 생활 물품이 이 언덕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죠.

장작과 참새가 많아 작작골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성문 바로 바깥, 도시와 시골의 경계에 사람들이 모여 집을 짓고 살던 동네. 그게 서계동의 원래 얼굴이었어요.

서쪽으로는 만리재 고개가 넘어가고, 아래로는 훗날 경성역이 들어설 골짜기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1925년 붉은 벽돌의 경성역사가 완공되면서, 서계동은 서울의 관문 바로 뒤편 동네가 됩니다.


031912년 서계동은 어디에 속해 있었나요?

옛 땅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이 바로 행정 구역입니다. 지금 주소로만 검색하면 100년 전 기록은 대부분 놓치게 돼요.

1912년의 서계동 일대는 경성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용산방 청파계 지역이었고, 이 일대에는 신교동, 주교동, 신촌동 같은 작은 동네 이름들이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 이름들이 정리되면서 서계동이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식 동명 정책에 따라 서계정으로 불렸고, 1943년 구제가 시행되며 용산구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일본식 이름을 걷어내고 지금의 서계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서계동의 옛 기록을 제대로 찾으려면 청파, 용산방, 신교동, 주교동, 서계정 같은 이름까지 함께 뒤져야 합니다. 이 과정이 바로 문화유산 기초조사의 첫 단계예요. 이름의 변천을 따라가야 땅의 이력이 온전히 보입니다.


04대지 2필지 651㎡, 국유지 전부가 집터였다

지목은 단 하나, 대지

대지는 집이나 건물이 들어선 땅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이 실제로 살던 자리예요.

서계동 국유지 2필지는 모두 이 대지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필지 수도 100%, 면적도 100%가 대지입니다.

이건 이번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에서도 흔치 않은 구성입니다. 대부분의 동네 국유지에는 산자락인 임야나 경작지인 밭, 논이 섞여 있거든요. 그런데 서계동은 국유지의 전부가 집터입니다.

나라는 왜 이 집터를 가지고 있었을까

장부만으로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어요.

관청이나 관리용 건물이 서 있던 자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성문 밖 길목에는 물자를 관리하거나 길을 지키는 시설이 들어서곤 했으니까요.

주인이 떠나거나 소유를 증명하지 못한 집터가 토지조사 과정에서 국유로 정리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은 모든 땅에 주인을 하나씩 적어 넣는 작업이었고, 그 과정에서 문서가 없는 땅은 국유지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사실은 하나입니다. 이 두 자리에는 분명 사람이 살거나 머물던 흔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흔적은 기록이 멈춘 곳에서 땅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05필지당 325.5㎡, 두 자리의 크기를 상상하다

651㎡를 2필지로 나누면, 한 필지 평균은 325.5㎡입니다. 평으로는 약 98평이에요.

98평이라고 하면 감이 오시나요? 요즘 아파트 30평대 세 채를 합친 정도의 넓이입니다. 1912년 도성 밖 언덕 동네의 집터로 보면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닙니다.

당시 서계동 일대는 비탈을 따라 작은 집들이 촘촘히 붙어 있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동네에서 한 필지에 100평 가까운 대지라면, 안채와 마당, 부속 건물이 함께 들어설 수 있는 크기예요.

평범한 살림집이었을 수도, 조금 더 공적인 쓰임을 가진 건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답은 장부가 아니라 땅이 쥐고 있습니다.

대지는 문화유산 조사에서 특히 주목받는 지목입니다. 구들 자리, 아궁이와 굴뚝 흔적, 담장의 기초석, 깨진 기와와 그릇 조각처럼 사람의 일상이 고스란히 남는 땅이기 때문이죠.


06산도 밭도 없는 국유지가 말해주는 것

임야 0, 밭 0, 논 0

이번 기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사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입니다.

서계동 국유지에는 임야가 없습니다. 밭도 없고, 논도 없습니다. 분묘지나 잡종지 같은 다른 지목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이건 1912년 무렵 서계동이 이미 농사짓는 시골이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주거지였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도성 바로 바깥이라 성안의 인구가 흘러넘쳐 자리 잡기 좋은 동네였던 거죠.

오늘의 서계동과 겹쳐 보면

지금의 서계동을 떠올려 보세요. 가파른 언덕에 다세대주택과 오래된 집들이 빽빽하고, 골목 곳곳에서 재봉틀 소리가 들리던 봉제공장 동네입니다. 국립극단이 자리한 문화 공간도 이 동네에 있죠.

100년 넘게 이 언덕은 한결같이 사람이 사는 땅이었습니다. 1912년 국유지 2필지가 모두 대지였다는 사실은, 그 오랜 주거의 역사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는 작은 증거입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이런 땅은 층이 겹겹이 쌓인 곳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현대 집터 아래 조선 후기의 생활면이, 그 아래 더 오래된 흔적이 숨어 있을 수 있어요.


07숫자로 한눈에 보는 서계동 국유지

지금까지의 내용을 표 하나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표만 저장해 두셔도 1912년 서계동 국유지 현황은 한눈에 보입니다.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 지목별 현황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대지

2

651

100%

325.5

임야

0

0

0%

-

밭

0

0

0%

-

논

0

0

0%

-

합계

2

651

100%

325.5

면적 비중을 막대로 그려 보면, 서계동의 특징이 더 선명해집니다.

대지

100%

임야

0%

밭

0%

논

0%

막대는 단 하나만 꽉 차 있습니다. 이 한 줄이 1912년 서계동 국유지의 풍경 전부입니다.

검증 노트

원자료의 국유지 전체는 2필지 651㎡이고, 지목별 자료의 대지도 2필지 651㎡입니다. 필지 수와 면적 모두 전체와 대지 값이 일치하므로 다른 지목의 국유지는 없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필지당 평균은 651 ÷ 2 = 325.5㎡입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으로, 총면적 약 196.9평, 필지당 약 98.5평입니다.

표의 임야·밭·논 0필지는 원자료에 해당 지목이 기재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개별 필지의 위치(지번)는 제공된 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 서계동

서계동 국유지는 단일 지목, 대지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필지와 면적 모두 대지 비중이 100%로, 임야나 경작지가 섞인 다른 동네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구성입니다.

같은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에서 대지가 1필지 479㎡(면적 0.75%)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서계동은 도성 밖 주거지의 성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록입니다.


08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인 이유

땅을 파기 전에, 땅을 읽어야 한다

문화유산 조사는 삽을 드는 데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록을 펼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 공사를 하려면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에 따라 문화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 방법과 절차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의 기준을 따르고요.

이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1. 지표조사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을 검토하고 현장을 걸으며 유물 흔적을 확인합니다.

2. 표본조사유적 가능성이 있는 곳에 작은 구덩이를 일부 파서 땅속 층위를 살핍니다.

3. 시굴조사트렌치를 넣어 유구의 범위와 성격을 확인합니다.

4. 발굴조사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 조사하고 기록·보존 방안을 정합니다.

집터 기록이 특히 중요한 이유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이 가운데 첫 단계인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여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는 곳이라도, 100여 년 전 그 자리가 무엇이었는지 알려 주니까요.

서계동처럼 국유지 전부가 대지였던 곳은 더욱 그렇습니다. 대지 기록은 생활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지점을 미리 짚어 주는 지도 역할을 합니다.

도심 주거지는 땅이 여러 번 뒤집히기 때문에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건물 기초 사이사이, 마당이었던 자리 아래에서 옛 생활면이 확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업을 준비하는 쪽에서도 이 기록은 든든한 안전장치입니다. 공사 도중 유구가 나와 일정이 멈추는 것보다, 처음부터 기초조사로 주의 구간을 알고 시작하는 편이 시간도 비용도 아낍니다.


09도심 땅속에서 역사를 건져 올린 성공 사례

종로 공평동, 빌딩 아래 살아남은 집터와 골목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도심 재개발을 앞두고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골목길과 집터가 층층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이 유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로 지은 빌딩 지하에 그대로 보존되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되었죠. 오늘날 누구나 유리 바닥 위를 걸으며 옛 집터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서계동과 공평동의 공통점이 보이시나요? 둘 다 사람이 빽빽하게 살던 도심 주거지라는 점입니다. 집터는 평범해 보여도, 제대로 조사하면 도시의 오래된 일상을 통째로 보여 주는 타임캡슐이 됩니다.

광화문광장, 공사 현장에서 다시 만난 육조거리

광화문광장을 새로 단장하는 공사 과정에서는 조선 시대 관청 터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사헌부 터를 비롯한 유구가 드러났고, 그 일부는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보존·전시되었어요.

매일 수많은 사람이 오가던 도심 한복판에서도 땅은 수백 년 전의 기억을 붙잡고 있었던 겁니다.

두 사례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같습니다. 땅 아래 무엇이 있는지 먼저 아는 것이 개발도, 역사도 함께 지키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앎은 언제나 기록에서 출발합니다. 1912년 서계동의 집터 두 자리도 그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0재개발 앞의 서계동, 지금 꼭 알아야 할 것

서계동은 지금 큰 변화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노후 주거지와 급경사 지형 때문에 오랫동안 개발이 멈춰 있던 이 언덕에 통합 재개발과 모아타운 같은 정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어요.

머지않아 오래된 골목과 계단이 사라지고, 새 단지가 들어서는 날이 올 겁니다.

바로 지금이 이 땅의 기록을 다시 읽어야 할 때입니다.

한 번 깎여 나간 언덕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1912년 국유지 2필지가 어디였는지, 그 집터가 어떤 지형 위에 앉아 있었는지, 주변 옛 주거지의 흔적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확인해 두어야 합니다.

성문 밖에서 장작을 지고 언덕을 넘던 사람들, 재봉틀 앞에서 밤을 새우던 사람들. 그들이 100년 넘게 쌓아 온 삶의 층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일. 그게 서계동이라는 동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FA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1912년 서계동 국유지는 총 2필지, 651㎡였습니다.

1912년 서울시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2필지 651㎡가 있었으며, 이는 서계동 국유지 전체에 해당합니다.

1912년 서계동 국유지에 임야나 밭, 논은 있었나요?

제공된 1912년 국유지 자료에는 서계동 국유지 중 임야·밭·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계동 국유지 한 필지의 평균 면적은 얼마인가요?

필지당 평균 325.5㎡, 약 98평입니다.

1912년 당시 서계동은 어떤 행정 구역에 속했나요?

경성부에 속한 옛 용산방 청파계 일대였으며, 서계동이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처음 생겼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옛 토지 이용을 복원하는 기초자료로 쓰이며, 특히 대지 기록은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에서 생활 유구 가능 지점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는 2필지 651㎡였으며, 그 전부가 필지당 평균 325.5㎡의 대지로 이루어진 도성 밖 주거지의 땅이었습니다.

우리 사업 부지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면 1912년 토지 기록부터 함께 살펴보세요.


용산구 서계동의 테마

  1. 1912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 2필지 651㎡ 정리

  2. 1912년 서계동 국유지 현황: 2필지 651㎡, 전부 대지

  3. 서계동 역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으로 본 서울역 뒤편 언덕의 집터

  4. 1912년 용산구 서계동 국유지에 산도 밭도 없었던 이유는?

  5. 서계동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912년 국유지 대지 2필지 분석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계동 (1912년 당시 경성부 옛 용산방 청파계 일대, 1914년 서계동 명칭 등장)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용산구 서계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성문은 날마다 열렸고


사람들은 장작을 지고 이 언덕을 넘었다



산 한 자락도, 밭 한 뙈기도 없이


나라의 장부에 남은 것은 집터 두 자리



그 두 자리에도 아침밥 짓는 연기가 있었고


저녁이면 돌아오는 발소리가 있었다



1912년, 누군가 그 땅을 숫자로 적었다


두 필지, 육백오십일 제곱미터



숫자는 짧지만


그 위에 쌓인 삶은 길다



기차가 떠나고 또 도착하는 동안


이 언덕은 한 번도 사람을 떠나보낸 적이 없다



이제 우리가 그 오래된 집터의 기억을 읽어 줄 차례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용산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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