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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산 열한 자락과 밭 열세 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0월 16일
8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산 열한 자락과 밭 열세 뙈기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6필지국유지 전체

63,920㎡국유지 총면적

62.9%임야 면적 비중

13필지밭, 필지의 절반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는 국유지 26필지, 총 63,920㎡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임야 11필지 40,231㎡, 밭 13필지 22,919㎡, 대지 1필지 479㎡, 분묘지 1필지 290㎡였습니다.

즉 보광동 국유지는 면적의 약 63%가 산이고 약 36%가 밭인, 한강변 언덕마을의 땅이었습니다.

당신이 오늘 한남대교 아래를 지나며 본 그 언덕.114년 전, 그 언덕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대부분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답은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서울의 땅을 한 필지씩 재고 적어 내려간 토지조사 장부 속에 말이죠.

그리고 그 장부는 지금 보광동의 땅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를 알려주는 첫 번째 지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지도를 함께 펼쳐 보겠습니다. 끝까지 읽으면 보광동 골목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거예요.


목차

  1. 1912년 보광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2. 보광동 이름의 역사, 빛을 품은 동네

  3. 1912년 보광동은 어디에 속해 있었나요?

  4. 임야 11필지 40,231㎡, 땅의 63%가 산이었다

  5. 밭 13필지 22,919㎡, 필지의 정확히 절반

  6. 대지 1필지 479㎡, 단 한 채의 자리

  7. 분묘지 1필지 290㎡, 가장 작은 땅의 무게

  8. 숫자로 한눈에 보는 보광동 국유지

  9.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인 이유

  10. 땅속 기록이 도시를 바꾼 성공 사례

  11. 재개발 앞의 보광동, 지금 꼭 알아야 할 것



011912년 보광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나요?

먼저 답부터 드릴게요.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있던 국유지는 모두 26필지입니다. 면적을 다 더하면 63,920㎡가 됩니다.

감이 잘 안 오시죠? 축구장 한 면이 대략 7,000㎡ 남짓이니까, 축구장 아홉 개를 조금 넘는 넓이입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19,336평이에요.

이 26필지를 땅의 쓰임새, 그러니까 지목으로 나누면 네 갈래가 나옵니다. 임야, 밭, 대지, 분묘지입니다.

임야가 11필지 40,231㎡로 가장 넓었습니다. 밭은 13필지 22,919㎡로 필지 수가 가장 많았고요. 대지는 1필지 479㎡, 분묘지는 1필지 290㎡였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를 눈치채셨나요? 논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강을 바로 앞에 둔 동네인데 국유지 중에 논이 단 한 필지도 없다는 것. 이건 보광동이라는 땅의 생김새를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는 단서입니다. 물은 가까웠지만, 땅은 물을 가두기 어려운 비탈이었다는 뜻이거든요.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보광동 국유지는 26필지 63,920㎡였고, 임야와 밭이 전체 면적의 98.8%를 차지했습니다.


02보광동 이름의 역사, 빛을 품은 동네

신라의 스님이 남긴 이름

보광동의 한자는 넓을 보(普)에 빛 광(光)을 씁니다. 두루 비추는 빛, 이라는 뜻이죠.

이 이름은 신라 진흥왕 때 이곳에 절을 세웠다는 보광국사에게서 왔다고 전해집니다. 절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1,400년 넘게 동네에 남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에요. 건물은 무너지고 사람은 떠나도, 땅의 이름은 끝까지 버팁니다. 그래서 지명은 고고학자에게 가장 오래된 힌트가 되곤 합니다.

한강 짐꾼들의 언덕

조선 시대 보광동 사람들의 삶은 한강과 떼려야 뗄 수 없었습니다. 서울시가 펴낸 도시민속지 자료에 따르면, 이곳 사람들은 한강에 부려진 짐을 날라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강에서 올라온 짐을 지게에 지고 언덕을 오르내리던 사람들. 그들이 기대어 살던 산과 밭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국유지 기록 속의 땅입니다.

마을에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에 각각 부군당이 있었고, 주민들은 함께 제를 올렸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마을 공동체가 이 언덕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증거죠.


031912년 보광동은 어디에 속해 있었나요?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1912년의 보광동은 지금 우리가 아는 용산구 보광동과 행정 구역이 같지 않았어요.

조선 초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그러니까 도성 밖 십 리 안쪽 구역에 속했습니다. 1751년에는 한성부 남쪽이 한강방으로 묶이면서 그 일부가 되었고요.

토지조사가 이루어지던 1910년대 초에는 경성 외곽의 한지면 일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다시 서울로 들어온 건 1936년입니다.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일본식 이름인 보광정이 되었죠. 1943년 구제가 시행되며 용산구에 들어갔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에 지금의 보광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고요? 옛 자료를 찾을 때 지금 주소로만 검색하면 기록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보광리, 보광정, 한지면이라는 이름까지 함께 찾아야 이 땅의 전체 이력이 보입니다. 문화유산 기초조사의 첫 단추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04임야 11필지 40,231㎡, 땅의 63%가 산이었다

보광동 국유지의 주인공은 산

보광동 국유지 63,920㎡ 가운데 40,231㎡가 임야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62.94%예요.

필지 수로는 11필지, 전체의 42.3%입니다. 한 필지의 평균 넓이는 약 3,657㎡로 네 가지 지목 중 가장 큽니다.

필지는 적은데 면적이 넓다. 이건 산자락이 잘게 쪼개지지 않고 큰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왜 산이 국유지가 되었을까

조선 시대 많은 산은 개인이 문서로 소유하기보다 마을이 함께 쓰거나 나라가 관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땔감을 하고, 나물을 캐고, 조상을 모시던 곳이었죠.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은 모든 땅에 주인을 하나씩 적어 넣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때 문서로 소유를 증명하지 못한 산은 국유지로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광동 산자락의 63%가 국유지 장부에 올라간 배경에도 이런 흐름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숫자 하나에 한 시대의 소유 방식이 바뀌는 순간이 담겨 있는 셈이에요.

고고학적으로 보면 개발이 덜 된 임야는 땅속 유적이 비교적 덜 훼손된 채 남아 있을 확률이 높은 곳입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구릉 지형은 예부터 사람들이 머물기 좋아한 자리이기도 하고요.


05밭 13필지 22,919㎡, 필지의 정확히 절반

이번엔 밭입니다. 보광동 국유지 26필지 중 13필지가 밭이었어요. 정확히 절반입니다.

면적은 22,919㎡, 전체의 35.86%입니다. 한 필지 평균은 약 1,763㎡로, 대략 533평 정도예요.

임야는 넓은 덩어리였는데, 밭은 작게 여러 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비탈을 따라 계단처럼 일군 밭들이 산자락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었을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논이 없고 밭만 있었다는 건 앞에서 말씀드렸죠. 물을 대기 어려운 경사지에서는 논보다 밭이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한강 가까이 살면서도 강물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땅. 보광동 사람들은 그 땅에 채소와 곡식을 심었습니다.

밭은 문화재 조사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오랫동안 경작된 땅은 위쪽 흙이 계속 뒤집히지만, 그 아래 층은 오히려 오래 보존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밭 아래에서 옛 집터나 생활 유물이 나오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06대지 1필지 479㎡, 단 한 채의 자리

대지는 집이나 건물이 들어선 땅을 말합니다. 보광동 국유지 중 대지는 딱 1필지, 479㎡였어요. 약 145평입니다.

전체 면적의 0.75%. 숫자로는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이 한 필지가 흥미롭습니다. 산과 밭뿐인 국유지 사이에 왜 집터 하나가 끼어 있었을까요?

관리용 건물이었을 수도 있고, 주인 없는 빈집이 국유로 처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장부만으로는 알 수 없어요. 그래서 현장 조사가 필요합니다. 기록이 멈춘 곳에서 발굴이 이야기를 이어받는 거죠.

대지는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자리입니다. 구들 자리, 아궁이 흔적, 깨진 그릇 조각 같은 생활의 흔적이 남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목이기도 합니다.


07분묘지 1필지 290㎡, 가장 작은 땅의 무게

마지막은 분묘지입니다. 무덤이 있는 땅이죠. 1필지, 290㎡로 보광동 국유지 중 가장 작습니다. 약 88평, 전체 면적의 0.45%예요.

작지만, 이 땅은 문화유산 조사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곳입니다.

분묘지는 그 자체로 매장유산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조성 시기를 알 수 있는 부장품, 묘제의 형식, 주변 산자락에 흩어진 다른 무덤의 흔적까지. 290㎡라는 숫자 뒤에 마을의 오래된 장례 문화가 숨어 있을 수 있어요.

지표조사를 할 때 이런 분묘지 기록은 특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아파트와 골목으로 덮여 흔적이 보이지 않더라도, 100년 전 장부가 위치를 먼저 알려주니까요.


08숫자로 한눈에 보는 보광동 국유지

지금까지의 내용을 표 하나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표만 저장해 두셔도 보광동 1912년 국유지 현황은 다 보입니다.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 지목별 현황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임야

11

40,231

62.94%

3,657

밭

13

22,919

35.86%

1,763

대지

1

479

0.75%

479

분묘지

1

290

0.45%

290

합계

26

63,920

100%

2,458

면적 비중을 막대로 그려 보면 차이가 더 선명해집니다.

임야

62.94%

밭

35.86%

대지

0.75%

분묘지

0.45%

필지 수로는 밭이 1등, 면적으로는 임야가 1등입니다. 작은 밭이 여럿, 큰 산이 몇 덩어리. 이 두 줄이 1912년 보광동 국유지의 풍경입니다.

검증 노트

지목별 필지 수를 더하면 1 + 1 + 11 + 13 = 26필지로, 원자료의 총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을 더하면 479 + 290 + 40,231 + 22,919 = 63,919㎡로, 원자료의 총면적 63,920㎡와 1㎡ 차이가 납니다. 이는 당시 평 단위 기록을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생긴 반올림 차이로 보이며, 본문과 표의 합계는 원자료 기준 63,920㎡로 표기했습니다.

면적 비중은 63,920㎡를 기준으로 소수점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했습니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입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 보광동

보광동 국유지에는 논이 한 필지도 없습니다. 한강변 동네인데도 국유지가 산과 밭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비탈진 구릉 지형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기록입니다.

밭 13필지는 전체 26필지의 정확히 절반이며, 임야와 밭 두 지목이 면적의 98.8%를 차지합니다.


09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인 이유

땅을 파기 전에, 땅을 읽어야 한다

문화유산 조사는 삽을 드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록을 읽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 공사를 하려면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에 따라 문화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구체적인 조사 방법과 절차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의 기준을 따르고요.

이 조사는 보통 네 단계로 이어집니다.

1. 지표조사문헌, 옛 지도, 토지 기록을 검토하고 땅 위를 걸으며 유물 산포 흔적을 확인합니다.

2. 표본조사유적 가능성이 있는 곳에 작은 구덩이를 일부 파서 땅속 층위를 살핍니다.

3. 시굴조사트렌치를 넣어 유구의 범위와 성격을 확인합니다.

4. 발굴조사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 조사하고 기록·보존 방안을 정합니다.

1912년 장부가 하는 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이 중 첫 단계인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지금은 빌라와 아파트로 덮여 원래 지형을 알 수 없는 곳이라도, 100여 년 전 그 자리가 산이었는지 밭이었는지 집터였는지 무덤이었는지를 알려주니까요.

보광동처럼 임야가 많았던 곳은 개발 이전 지형을 복원하는 데 단서가 되고, 분묘지와 대지 기록은 유구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지점을 미리 짚어 줍니다. 조사 범위를 정확히 잡으면 시간과 비용이 줄고, 놓치는 유적도 줄어듭니다.

사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사 직전에 유적이 나와 일정이 멈추는 것보다, 처음부

터 기초조사로 위험 구간을 알고 시작하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10땅속 기록이 도시를 바꾼 성공 사례

종로 공평동, 빌딩 아래 남은 조선의 골목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재개발을 앞두고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골목길과 집터가 층층이 드러났어요.

놀라운 건 그다음입니다. 유적을 없애지 않고 새로 지은 빌딩 지하에 그대로 보존해 전시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입니다.

개발과 보존이 서로를 밀어낸 게 아니라, 한 건물 안에서 함께 살아남은 거죠. 이런 결과는 사업 초기부터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송파 풍납토성, 한 번의 확인이 바꾼 역사

송파구 풍납동에서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물이 확인되면서 흙으로 쌓은 성벽 일대가 본격적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 조사로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으로 주목받게 되었죠.

두 사례가 말해주는 건 같습니다. 땅 아래 무엇이 있는지 먼저 아는 것이 도시도, 역사도 지킨다는 것.

그리고 그 앎은 늘 기록에서 시작합니다. 1912년 보광동 장부도 그런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11재개발 앞의 보광동, 지금 꼭 알아야 할 것

보광동은 한남 일대와 함께 오래전부터 재개발 논의가 이어진 동네입니다. 언덕의 낡은 집들이 사라지고 새 단지가 들어서는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지금이 바로 이 땅의 기록을 다시 읽어야 할 때입니다.

공사가 시작되면 땅의 겉모습은 완전히 바뀝니다. 한 번 깎인 언덕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 전에 26필지의 국유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산자락 11필지와 밭 13필지가 어떤 지형을 이루고 있었는지, 대지와 분묘지는 어느 지점이었는지 확인해 두어야 합니다.

그게 보광국사의 이름을 1,400년 동안 지켜온 이 동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요?


FAQ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1912년 보광동 국유지는 총 26필지, 63,920㎡였습니다.

1912년 보광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1필지 479㎡가 있었습니다.

1912년 보광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분묘지는 1필지 290㎡가 있었습니다.

1912년 보광동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임야는 11필지 40,231㎡로, 국유지 면적의 약 62.9%를 차지했습니다.

1912년 보광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13필지 22,919㎡로, 필지 수로는 전체의 절반이었습니다.

1912년 보광동 국유지에 논은 있었나요?

제공된 1912년 국유지 자료에는 보광동 국유지 중 논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쓰이나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옛 지형과 토지 이용을 복원하는 기초자료로 쓰이며,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범위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는 26필지 63,920㎡였으며, 임야 11필지 40,231㎡와 밭 13필지 22,919㎡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대지·분묘지가 각 1필지씩 있던 한강변 구릉지의 땅이었습니다.

우리 사업 부지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면 1912년 토지 기록부터 함께 살펴보세요.

제목 후보

  1. 1912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임야와 밭 면적 정리

  2. 1912년 보광동 국유지 현황: 26필지 63,920㎡, 임야 40,231㎡

  3. 보광동 역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으로 본 한강변 언덕의 땅

  4. 1912년 용산구 보광동 국유지에 논이 없었던 이유는?

  5. 보광동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1912년 국유지 26필지 분석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 (1912년 당시 경성 외곽 한지면 일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강물은 날마다 짐을 내려놓았고


사람들은 그 짐을 지고 언덕을 올랐다



산 열한 자락은 땔감을 내주었고


밭 열세 뙈기는 저녁을 내주었다



집 한 채의 자리와 무덤 하나의 자리


그 작은 두 땅에도 누군가의 하루와 마지막이 있었다



1912년, 누군가 그 땅을 숫자로 적었다


스물여섯 필지, 육만 삼천구백이십 제곱미터



숫자는 차갑지만


그 숫자를 읽는 우리는 따뜻할 수 있다



두루 비추는 빛이라는 이름처럼


이제 우리가 이 땅의 기억을 비출 차례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용산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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