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텁바위와 복사골, 네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2일 전
- 6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두텁바위와 복사골, 네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4필지국유지 전체
4,528㎡총면적 · 약 1,370평
2종지목 구성
75%대지의 필지 비율
AI 브리핑 ·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에는 국유지 4필지, 총 4,528㎡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 1필지 3,752㎡, 대지 3필지 776㎡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필지 수의 75%가 대지라는 점은 이 일대가 이미 집들이 들어선 도시형 마을이었음을 보여 주며, 이는 농촌형 국유지가 많은 시리즈 안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이번 대장에는 논이 한 배미도 없습니다.
시리즈를 따라오신 분들은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룬 마을들의 국유지에는 어김없이 논이 등장했습니다.
갈대벌의 신정동에도, 언덕의 신길동에도 국유 논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록에는 논이 없습니다.
임야도 없습니다.
남은 것은 밭 하나와 집터 셋.
단출하다 못해 심심해 보이는 이 네 줄이, 사실은 시리즈에서 가장 도시적인 기록입니다.
남산이 남쪽으로 흘러내린 마지막 자락.
두텁바위의 전설이 서린 마을과 복숭아꽃 피던 골짜기.
1912년 도동2가와 후암동의 네 필지를 지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목차
한눈에 보는 도동2가·후암동 국유지 핵심 요약
1912년 도동2가와 후암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밭 1필지 3,752㎡, 남산 자락의 마지막 경작지
대지 3필지 776㎡, 도시의 문법으로 읽는 집터들
논도 임야도 없는 대장이 말해주는 것
숫자로 다시 보는 도동2가·후암동 — 표와 그래프
검증 노트 — 이번에는 오차 0㎡입니다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1. 한눈에 보는 도동2가·후암동 국유지 핵심 요약
바쁜 분들을 위해 결론부터 정리합니다.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의 국유지는 총 4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4,528㎡, 평수로 환산하면 약 1,370평입니다.
지목은 단 두 종류입니다.
밭 1필지 3,752㎡, 그리고 대지 3필지 776㎡입니다.
면적으로는 밭이 82.9%를 차지하지만, 필지 수로는 대지가 4필지 중 3필지, 75%를 차지합니다.
큰 밭 하나에 작은 집터 셋이 붙어 있는 구조.
이 단순한 구성이 남산 자락 마을의 1912년을 압축해 보여 줍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총면적 4,528㎡. 본 시리즈에서 다뤄 온 동네별 국유지 기록 가운데 최소 규모급의 총면적입니다. 직전에 다룬 영등포구 신길동의 14,750㎡보다도 3분의 1 수준입니다. 또 하나, 필지의 75%가 대지라는 구성은 논과 임야 중심의 농촌형 기록이 많은 본 시리즈에서 보기 드문 도시형 국유지의 사례로 기록해 둘 만합니다.
2. 1912년 도동2가와 후암동은 어떤 마을이었나요?
후암동이라는 이름은 바위에서 왔습니다.
두터울 후 자에 바위 암 자, 두텁바위입니다.
마을 어귀에 있던 크고 두툼한 화강암 바위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습니다.
도동은 복숭아나무에서 왔습니다.
복숭아 도 자를 쓰는 복사골, 봄이면 골짜기 가득 복숭아꽃이 피었다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바위의 마을과 꽃의 골짜기가 남산 남쪽 기슭에서 이웃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위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일대는 도성의 남대문에서 한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남산이 끝나고 용산 벌판이 시작되는 경계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 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던 관청인 전생서가 이 부근에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도성 살림과 밀접한 동네였습니다.
1912년 무렵에는 남대문 밖 성저 지역으로서 이미 집들이 골목을 이루며 들어서 있었습니다.
순수한 농촌이 아니라, 도성의 숨결이 닿는 반쯤 도시화된 마을.
이 성격이 국유지 대장 네 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3. 국유지는 모두 몇 필지, 몇 ㎡였나요?
1912년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도동2가 후암동의 국유지는 총 4필지, 4,528㎡입니다.
축구장 하나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입니다.
한 필지의 평균은 1,132㎡, 약 340평입니다.
하지만 이 평균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필지별 편차가 크기 때문입니다.
밭 한 필지가 3,752㎡로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대지 세 필지는 합쳐도 776㎡, 필지당 평균 259㎡에 불과합니다.
큰 조각 하나와 작은 조각 셋.
이 비대칭이야말로 이번 기록을 읽는 열쇠입니다.
4. 밭 1필지 3,752㎡, 남산 자락의 마지막 경작지
면적의 주인공은 밭입니다.
1필지 3,752㎡, 전체 국유지의 82.9%입니다.
약 1,135평짜리 밭 한 뙈기가 대장의 첫 줄을 차지합니다.
남산 자락의 양지바른 비탈에서 보리와 콩, 채소가 자랐을 땅입니다.
도성 바로 바깥의 밭이라는 위치가 흥미롭습니다.
남대문 안 시전과 골목 상권에 채소를 대던 근교 농업의 흔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가 커질수록 도시 언저리의 밭은 값진 땅이 됩니다.
아침에 거둔 푸성귀가 한나절이면 도성 안 밥상에 오를 수 있는 거리.
이 밭 한 뙈기는 농촌의 끝자락이 아니라, 도시를 먹여 살리던 최전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도시 인접 경작지는 머지않아 집터로 바뀌어 갈 운명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후 후암동 일대는 빠르게 시가지로 변모하며, 남산 아래 주택가로 재편됩니다.
대장 속 3,752㎡의 밭은 도시화 직전, 마지막 경작의 기록인 셈입니다.

5. 대지 3필지 776㎡, 도시의 문법으로 읽는 집터들
필지 수의 주인공은 대지입니다.
3필지 776㎡, 한 필지 평균 259㎡, 약 78평입니다.
이 숫자를 앞선 기록들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신정동의 국유 대지는 664㎡짜리 한 필지, 신길동은 644㎡짜리 한 필지였습니다.
모두 200평 안팎의 넉넉한 집터 하나씩이었습니다.
반면 도동2가 후암동은 78평 안팎의 아담한 집터가 셋입니다.
땅이 잘게 나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도시의 문법입니다.
농촌에서는 집터가 마당과 텃밭을 거느리고 널찍하게 자리 잡지만, 도시에서는 골목을 따라 집들이 어깨를 맞대며 필지가 잘게 쪼개집니다.
국유 대지가 세 필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1912년의 이 동네가 이미 골목과 집들의 세계였음을 증언합니다.
세 집터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대장은 말하지 않습니다.
관에서 쓰던 작은 시설이었을 수도, 비어 있던 관유지였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훗날 이 일대의 조사에서 이 세 지점이 가장 먼저 검토될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6. 논도 임야도 없는 대장이 말해주는 것
이번 기록에서 없는 것들의 목록은 있는 것들만큼 웅변적입니다.
논이 없습니다.
남산 자락의 경사지라 물을 잡아 둘 저지대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야가 없습니다.
등 뒤의 남산은 도성의 주산으로서 별도로 관리되던 산이었으니, 마을 단위 국유지 대장에 오를 여지가 적었습니다.
잡종지도, 수도용지도 없습니다.
범람원도 대규모 기반시설 부지도 없는, 오래 다져진 생활의 동네였다는 뜻입니다.
시리즈의 세 마을을 나란히 놓으면 서울 서남부와 도심 언저리의 스펙트럼이 완성됩니다.
물의 마을 신정동은 잡종지 86.7%, 언덕의 마을 신길동은 임야 69.8%, 그리고 골목의 마을 도동2가 후암동은 필지의 75%가 대지.
세 장의 대장이 지형과 삶의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7. 숫자로 다시 보는 도동2가·후암동 — 표와 그래프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장의 표로 정리합니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 비율 | 필지당 평균(㎡) |
밭 | 1필지 | 3,752 | 82.9% | 3,752 |
대지 | 3필지 | 776 | 17.1% | 259 |
합계 | 4필지 | 4,528 | 100% | 1,132 |
※ 면적 비율은 소수점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값입니다. 지목별 면적의 합은 제시된 총면적 4,528㎡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도동2가는 현재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산구 동자동·후암동 일대에 해당하며, 본 글은 원자료의 표기에 따라 도동2가 후암동으로 기재합니다.
면적 비율을 그래프로 보면 밭 한 필지의 무게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밭
82.9%
대지
17.1%
이미지 설명: 위 표와 그래프는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 4필지 4,528㎡의 지목별 구성을 정리한 것으로, 밭 1필지 3,752㎡와 대지 3필지 776㎡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8. 검증 노트 — 이번에는 오차 0㎡입니다
검증 노트
본 시리즈는 모든 수치를 프로그램으로 교차 검산한 뒤 공개합니다.
첫째, 필지 수 검증입니다. 밭 1필지와 대지 3필지를 더하면 정확히 4필지로, 제시된 전체 필지 수와 일치합니다.
둘째, 면적 검증입니다. 지목별 면적을 더하면 3,752 + 776 = 4,528㎡로, 제시된 총면적 4,528㎡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앞선 신정동 편과 신길동 편에서는 각각 2㎡의 환산 반올림 오차가 확인되었는데, 이번 기록은 오차 0㎡입니다. 필지 수가 적어 반올림 값이 누적될 여지가 작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차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 본 시리즈의 원칙입니다. 기초조사 자료의 생명은 정확성과 투명성이기 때문입니다.
9. 이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남산 자락의 네 필지 기록은 문화유산 조사의 관점에서 각별한 무게를 갖습니다.
이 일대가 도성 바로 바깥, 조선시대 내내 사람의 활동이 밀집했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유산 조사를 거쳐야 합니다.
조사는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그 첫 단추가 기초조사, 곧 옛 기록의 검토입니다.
1912년 대장은 이 동네의 어느 자리가 밭이었고 어느 자리에 집이 있었는지를 필지 단위로 증언합니다.
특히 도성 인접지의 대지 세 필지는 조선시대 건물지와 생활 유구가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점입니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이어지는 서울 도심에서, 이런 한 줄 한 줄이 조사 범위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나침반이 됩니다.
기초조사가 만들어 낸 실제 성공 사례들
기록에서 출발한 조사가 실제로 무엇을 찾아냈는지, 세 장면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 동대문운동장입니다.
운동장 철거에 앞서 옛 문헌과 지적 기록을 토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조선시대 군영 하도감 터와 성곽 수문 이간수문이 땅속에서 온전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핵심 유적 전시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풍납토성입니다.
아파트 재건축 과정의 조사가 한성백제 왕성의 실체를 밝혀내며 한국 고대사 연구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기록 검토와 시굴조사가 없었다면 2천 년 왕성은 지금도 콘크리트 아래 잠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 2021년 인사동입니다.
재개발 부지 발굴조사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항아리에 담긴 채 출토되었습니다.
정식 조사 절차가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실물을 서울 한복판에서 되찾아 낸 순간입니다.
세 사례 모두 도심 한가운데의 기록 검토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도성 언저리의 오래된 동네일수록, 백 년 전 대장 네 줄의 가치는 더욱 커집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총 4필지였습니다. 총면적은 4,528㎡로, 약 1,370평에 해당합니다.
Q2. 1912년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밭은 1필지 3,752㎡로, 전체 국유지 면적의 82.9%를 차지했습니다. 남산 자락에서 도성에 채소를 대던 근교 경작지로 해석됩니다.
Q3. 1912년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대지는 3필지 776㎡였습니다. 한 필지 평균 259㎡의 아담한 집터들로, 필지 수 기준 전체의 75%를 차지해 도시형 국유지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Q4. 이 기록에 논과 임야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남산 자락 경사지라 논을 만들 저지대가 부족했고, 배후의 남산은 도성의 주산으로 별도 관리되어 마을 단위 대장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1912년 토지조사 기록은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에 앞서 진행되는 기초조사의 핵심 문헌 자료입니다. 특히 도성 인접 지역의 옛 대지 위치는 조선시대 건물지 확인을 위한 우선 검토 지점이 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국유지는 총 4필지 4,528㎡였으며,
밭 1필지 3,752㎡와 대지 3필지 776㎡로 구성되어
필지의 75%가 집터인 도시형 국유지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개발 예정 부지의 문화유산 조사가 필요하신가요?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백 년의 기록을 읽는 것에서 시작하는 정확한 기초조사를 제공합니다.
출처 및 자료 기준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토지조사부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현재의 서울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일대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용산구 도동2가 후암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912년후암동#용산구도동2가#후암동국유지#토지조사사업#문화재발굴#문화재발굴기관#문화재지표조사#문화유산지표조사#발굴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매장유산#서울역사#용산구역사#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바위는 두텁고 기록은 얇았다.
겨우 네 줄.
그러나 그 네 줄 안에
도성에 푸성귀를 대던 밭 한 뙈기와
골목의 문법으로 나뉜 집터 셋이 산다.
복사꽃 지던 골짜기에
오늘은 계단길 가로등이 핀다.
소원을 빌던 두텁바위처럼
땅은 오래 듣고, 오래 기억한다.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