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부 기록 — 성북구 석관동 국유 대지 완전 분석
- 5월 29일
- 5분 분량
1912년 서울 성북구 기초조사 | 문화유산 발굴
단 2필지, 하지만 그 안에
석관동 1,676㎡가 품은 역사
1912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부 기록 — 성북구 석관동 국유 대지 완전 분석
숫자가 작다고 역사가 작은 건 아니다. 단 2필지 1,676㎡.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1912년 국유지 전부다. 그런데 이 작은 기록 하나가 문화재 지표조사의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무엇이 있었는지, 왜 국유였는지 — 그 질문이 땅속으로 향하는 첫 번째 문을 연다.
2
총 필지 수
1,676
총 면적 (㎡)
100%
전 지목 대지
838
필지당 평균 ㎡
목차
01석관동, 어떤 땅이었나
022필지 1,676㎡ — 데이터로 보는 국유 대지
03전 지목이 대지 — 이 기록이 말하는 것
04인근 지역과의 비교 — 석관동이 특별한 이유
05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 기초 분석
06이 기록이 앞으로 열어줄 가능성

01
석관동, 어떤 땅이었나
성북구 석관동(石串洞). 이름에 '돌(石)'이 들어간다. 조선시대부터 바위와 산세가 두드러진 지형으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와 도로가 가득하지만, 1912년 이 땅은 한양 도성의 동북쪽 경계 너머에 자리한 조용한 지역이었다.
석관동은 조선 왕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인근에 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이 자리하고 있다. 왕릉 인근 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엄격한 관리 하에 놓였다. 벌채 금지, 경작 제한, 거주 규제가 이뤄진 곳이 많았다. 1912년 이 지역의 국유지가 고작 2필지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땅이 그만큼 개발과 분화가 덜 진행됐다는 뜻일 수도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성북구 전 지역의 1912년 토지조사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석관동의 국유지 기록은 단 한 줄이다. 하지만 그 한 줄이 이 지역 문화재 기초조사의 출발점이 된다.
작은 기록 하나가 큰 발견의 씨앗이 된다. 역사는 항상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됐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연구 원칙 (seoulheritage.org)
02
2필지 1,676㎡ — 데이터로 보는 국유 대지
숫자부터 정확히 짚고 가자. 1912년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의 국유지는 2필지, 면적 합계 1,676㎡였다. 지목은 전량 대지(垈地)였다. 밭도 임야도 분묘지도 없이, 오직 대지 두 필지만이 국유로 기록됐다.
1912년 성북구 석관동 국유지 — 지목별 상세
대지 (垈地)
전체 국유지의 100% — 유일한 지목
2
필지 수
1,676
면적 (㎡)
838
필지당 평균 (㎡)
석관동 국유지 지목 구성 — 면적 기준
대지
1,676㎡ — 전체 100%
2필지
밭
기록 없음
임야
기록 없음
분묘지
기록 없음
1,676㎡는 약 507평이다. 두 필지를 합산한 면적이니, 한 필지당 평균 838㎡(약 253평) 규모다. 소형 단독주택 필지와는 거리가 먼 규모다. 253평짜리 필지 두 개가 국유 대지로 기록됐다는 것은, 이 땅이 공공적 목적의 상당히 큰 건물 또는 시설을 위해 사용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03
전 지목이 대지 — 이 기록이 말하는 것
석관동 국유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목이 단 하나, 대지(垈地)뿐이라는 점이다. 인근 성동구 상왕십리의 경우 대지·밭·임야·분묘지가 혼재했지만, 석관동 국유지는 오직 대지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지는 건물이 올라서 있거나, 건물을 짓기 위해 조성된 땅을 의미한다. 1912년 이 시점에 국유 대지로 기록됐다는 것은, 이미 그 위에 어떤 형태의 건물이나 구조물이 존재했거나, 국가가 건물 설치를 목적으로 해당 토지를 관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석관동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몇 가지 가능성이 떠오른다. 첫째, 의릉(懿陵) 관리와 관련된 능참봉(陵參奉) 또는 수복(守僕)의 근무처나 거주지였을 가능성이다. 조선시대 왕릉에는 능을 지키는 관원과 수복들이 상주하는 시설이 반드시 따라붙었다. 둘째, 역(驛)이나 봉수대(烽燧臺)와 연결된 관리 시설이었을 수 있다. 한양 외곽의 이 지역은 조선시대 군사·통신 인프라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조선 왕실 직속의 내수사(內需司)나 궁방(宮房) 소속 관리 건물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가능성이 맞는지는 추가적인 고문서 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이 '그냥 빈 국유지'가 아니라 무언가 의도된 공공적 기능을 갖고 있던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국유 대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히 중요한 지점으로 분류된다. 건물지 유구, 기단석, 우물터, 담장 흔적 같은 건축 관련 매장문화재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 공공 건물 터에서는 기와 파편과 도자기 조각 같은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경향이 있다.

04
인근 지역과의 비교 — 석관동이 특별한 이유
서울 내 다른 지역의 1912년 국유지 기록과 비교해보면 석관동의 특수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성동구 상왕십리
688 필지
213,600㎡ · 4개 지목
성북구 석관동
2 필지
1,676㎡ · 대지 단일지목
일반 국유지 평균
다수 지목
대지·밭·임야·묘지 혼재
상왕십리 688필지와 비교했을 때 석관동 2필지는 규모 면에서 압도적으로 작다. 그러나 이 차이가 오히려 의미 있는 단서다. 상왕십리처럼 규모가 크고 지목이 다양한 지역은 복합적 생활 공간이었던 반면, 석관동처럼 소수 대지만 국유로 존재하는 경우는 특정 목적을 위한 단일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주목할 점은 필지당 면적이다. 석관동 838㎡/필지는 상왕십리 대지 평균 210㎡/필지의 약 4배다. 단순 주거지라면 이렇게 큰 필지가 국유로 관리될 이유가 없다. 무언가 공적이고 규모 있는 시설이 있었다는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필지당 평균 면적 비교
석관동
838㎡/필지
2필지
상왕십리
210㎡/필지
630필지

05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 기초 분석
문화재 지표조사(地表調査)는 땅을 파기 전, 지표면과 문헌 기록을 통해 해당 부지의 매장문화재 존재 가능성을 사전에 파악하는 조사다. 국유지 기록은 이 지표조사의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자료 중 하나다.
1912년 석관동 국유 대지 기록을 지표조사 체계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 해당 필지의 1912년 이전 용도를 조선시대 고지도 및 고문서를 통해 추적해야 한다. 의릉 관련 시설, 능역(陵域) 경계, 인근 관청 위치와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시굴조사(試掘調査) 단계에서는 1,676㎡라는 비교적 소규모 면적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트렌치(좁은 발굴 도랑)를 일정 간격으로 배치할 때 전체 부지를 균일하게 커버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굴조사는 전체 면적의 5% 이상을 조사하는 것이 기준인데, 1,676㎡의 5%는 약 84㎡로 관리 가능한 규모다.
표본조사(標本調査)는 시굴 결과 유구나 유물이 확인된 구역에 한해 진행된다. 만약 건물지나 도자기 파편이 확인된다면, 해당 구역을 집중적으로 표본조사해 유구의 성격과 시대를 특정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이 과정이 완료되면 비로소 정식 발굴조사(本調査)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석관동 국유 대지 2필지는 규모는 작지만, 조선시대 왕릉 인근이라는 입지와 필지당 838㎡라는 규모를 감안할 때 문화재 존재 가능성 평가에서 '주의' 등급 이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지점이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7조에 따라 건설공사 시행 전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에 의무 시행된다. 1912년 토지조사부 분석은 이 의무 지표조사를 위한 사전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06
이 기록이 앞으로 열어줄 가능성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단은 이 기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석관동 국유 대지 2필지 기록은 현재 성북구 전체 지역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의 일환으로 정리됐다. 이 데이터는 향후 해당 구역에서 건설 공사가 이뤄질 경우 문화재 지표조사 계획의 기초 자료로 제공된다.
성북구는 의릉(懿陵) 외에도 성락원(城樂園), 흥천사(興天寺) 등 조선시대 문화유산이 밀집한 지역이다. 이런 환경에서 석관동의 국유 대지 기록은 단순한 행정 데이터를 넘어 문화재 분포 지도의 한 점이 된다.
유사한 사례를 보면 가능성이 보인다. 서울 성북구 내 다른 지역에서도 1912년 국유 대지 기록을 토대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시대 건물 기단과 기와 파편이 확인된 사례가 있다. 작은 2필지가 중요한 역사 발견의 출발점이 됐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 110년 전 누군가가 기록해 둔 이 두 줄의 숫자를 읽고 있다. 당시 기록을 남긴 관리는 자신이 남긴 숫자가 한 세기 뒤 문화재 발굴의 단서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역사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작고 사소해 보이는 기록 위에 쌓인다.
성공 사례 — 소규모 국유 대지에서 출발한 발견
서울 종로구 일대 조사에서 2필지 규모의 국유 대지 기록을 추적한 결과, 조선 후기 관청 건물의 적심석(積心石, 기둥 받침돌) 구조가 완전한 형태로 확인된 사례가 있다. 필지 수가 적을수록 건물의 성격이 단일하고 집중적이어서, 오히려 구조물 유구가 온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조사단의 분석이다.

단 두 줄. 필지 수 2, 면적 1,676㎡, 지목 대지. 1912년 석관동의 기록은 이게 전부다. 하지만 이 두 줄 안에는 왕릉을 지키던 사람의 집이 있었을 수도 있고, 봉수대 근무자의 숙소가 있었을 수도 있으며, 오래전 이름 모를 관리의 하루하루가 담겨 있을지 모른다. 작다고 해서 덜 소중한 역사는 없다. 오늘 이 기록을 읽어준 당신 덕분에, 석관동의 그 두 필지가 오늘 하루 더 기억됐다.
서울 성북구 석관동 문화유산 조사 더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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