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유산 기초조사 | 성북구 안암동1912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밭·대지·임야·논 면적 완전 정리
- 2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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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기초조사 | 성북구 안암동
1912년 서울 성북구 안암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밭·대지·임야·논 면적 완전 정리
고려대 캠퍼스 아래 잠든 110년 전 기록 — 토지조사사업이 새긴 안암동 국유지의 진짜 역사
30필지
전체 국유지
65,603㎡
총 면적
4종
지목 구분
81.4%
밭 비율
고려대 캠퍼스 그 땅 아래, 110년 전엔 국가가 소유한 거대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당신이 안암역에서 내려 고려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 길 위를 생각해봐. 붉은 벽돌 건물, 캠퍼스 잔디밭, 참살이길의 카페들. 근데 딱 110년 전, 이 동네 국유지 열에 여덟은 밭이었어. 국가가 소유한 땅 65,603㎡, 30필지 중 17필지가 그냥 밭이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 밑에는 아직 아무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잠들어 있어.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네가 걷는 그 길이 다시 보일 거야.
AI 브리핑 요약 — 핵심 수치 3문장
1912년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는 국유지 30필지, 총 65,603㎡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전) 17필지 53,425㎡(81.4%), 대지 7필지 4,885㎡(7.4%), 임야 4필지 4,357㎡(6.6%), 논 2필지 2,935㎡(4.5%) 순이었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의 역사 기초자료로 활용되며,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SECTION 01
1. 안암(安岩), '앉일바위'에서 시작된 동네 이야기
안암동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금의 안암동3가 일대,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자리에 한때 10여 명이 편히 앉아 쉴 수 있을 만큼 넓고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앉일바위'라고 불렀고,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안암(安岩), 편안하게 앉은 바위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1395년 조선 태조 4년 문헌에도 이미 등장하는 이 이름은, 그러니까 630년의 역사를 가진 동네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이 일대는 산수가 빼어나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주목받던 땅이었다. 북악산 자락이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지점에 자리한 안암동은, 한성부 인근 외곽 자연 취락의 전형이었다. 계곡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산이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그 안암동이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낱낱이 기록됐다. 전국의 모든 땅을 측량하고, 지목을 분류하고, 소유자를 확정하는 이 사업은 근대적 토지 행정의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실상은 식민 지배를 위한 수탈 기반 구축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안암동에 국유지로 등록된 땅이 30필지, 65,603㎡였다. 이 숫자는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니다. 이 땅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걷는 땅의 깊은 기억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은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한 동씩 분석하는 장기 기초조사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안암동의 이 기록도 그 아카이브의 중요한 한 장이다. 지금부터 그 숫자들을 하나씩, 천천히 들여다보자.
SECTION 02
2. 1912년 안암동 국유지 현황 — 숫자로 읽는 땅의 기억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국유지는 총 30필지, 65,603㎡였으며, 밭 17필지(53,425㎡)·대지 7필지(4,885㎡)·임야 4필지(4,357㎡)·논 2필지(2,935㎡)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30필지, 65,603㎡. 이 면적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감이 안 온다면, 이렇게 생각해봐. 축구장 한 개가 약 7,140㎡다. 안암동 국유지 총면적은 축구장 약 9개 크기다. 그 넓이가 전부 국가 소유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지목은 네 가지였다. 밭, 대지, 임야, 논. 이 네 가지 지목이 어떤 비율로 분포했는지를 보면, 1912년 안암동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밭 (전, 田) | 17필지 | 53,425 | 81.4% |
대지 (垈地) | 7필지 | 4,885 | 7.4% |
임야 (林野) | 4필지 | 4,357 | 6.6% |
논 (답, 畓) | 2필지 | 2,935 | 4.5% |
합계 | 30필지 | 65,602 * | 100% |
* 지목별 면적 합산값 65,602㎡로 원자료 총계 65,603㎡와 1㎡ 차이가 있습니다. 평(坪) 단위에서 ㎡ 환산 시 발생하는 반올림 오차입니다.
밭
81.4%
대지
7.4%
임야
6.6%
논
4.5%
53,425㎡
밭 · 17필지 · 81.4%
4,885㎡
대지 · 7필지 · 7.4%
4,357㎡
임야 · 4필지 · 6.6%
2,935㎡
논 · 2필지 · 4.5%
시리즈 기록 밭 비율 81.4%는 이 시리즈에서 손에 꼽히는 높은 수치입니다. 30필지 중 17필지가 밭이라는 건, 안암동 국유지의 성격이 농업 생산 공간으로 압도적으로 쏠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네 가지 지목이 모두 등장하는 구성도 이 시리즈에서 다양성 측면에서 주목할 사례입니다.
SECTION 03
3. 밭 17필지 53,425㎡ — 안암동 땅의 81%가 밭이었다는 놀라운 사실
숫자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81.4%. 1912년 안암동 국유지의 열 중 여덟이 밭이었다. 17필지, 53,425㎡. 지금 고려대 정문에서 안암역까지 이어지는 거리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봐. 카페, 편의점, 고시원, 빌라, 학원. 그런데 110년 전 그 자리의 절반이 넘는 국유지가, 그냥 밭이었다는 거야.
53,425㎡가 어느 정도 규모냐고? 축구장 약 7.5개다. 전체 안암동 국유지에서 밭이 아닌 땅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나머지 18.6%밖에 안 남는다. 그 정도로 밭이 압도적이었다.

왜 이렇게 밭이 많았을까. 안암동의 지형적 특성이 단서가 된다. 북악산 자락이 동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구릉 지형은 논보다 밭에 더 적합한 환경이었다. 물이 쉽게 빠지는 경사지에서는 벼를 심기 어렵고, 대신 잡곡이나 채소 재배가 훨씬 유리하다. 국유지로 등록된 17필지 밭은, 조선 시대부터 왕실이나 관청이 관리하던 공전(公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성들의 세금을 받아 운영되던 국가 농지, 그게 이 17필지의 정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이 밭이 있었던 17필지의 지하에는 지금 무엇이 남아 있을까? 문화재 발굴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경작지는 교란이 적어 지하 유구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 시대 농업 관련 시설의 흔적, 경계 표시물, 물길 구조물,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층위가 이 밭 아래에 숨어 있을 수 있다.
SECTION 04
4. 대지 7필지 4,885㎡ — 이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밭 다음으로 많은 필지를 차지한 건 대지였다. 7필지, 4,885㎡. 전체의 7.4%에 해당하는 면적이지만, 이 7필지가 가진 의미는 면적 이상이다. 대지(垈地)란 건물이 세워져 있거나 세워질 예정인 땅이다. 국유 대지라면, 관아·창고·역원·군사 시설 같은 공공 건축물이 여기에 있었다는 뜻이다.
7필지 4,885㎡. 필지당 평균 약 698㎡. 이 크기의 공공 건물이 7개 자리에 흩어져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당시 안암동이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국가 행정의 말단 기능을 일부 담당하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지를 관리하는 관청, 세금을 수납하는 창고, 또는 지역 행정을 담당하는 소규모 관아가 이 7개 필지 위에 서 있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대지 7필지는 가장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구역이다.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기단부, 적심(積心), 온돌 구조, 우물, 배수로 같은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건물이 철거된 이후에도 지하에는 도자기 파편, 기와, 철기류, 동전 같은 생활 유물이 폐기층을 이루며 묻혀 있는 경우가 많다. 지표에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트렌치 하나를 파는 순간 역사가 튀어나온다.
SECTION 05
5. 임야 4필지 4,357㎡ · 논 2필지 2,935㎡ — 구릉과 물의 기억
임야(林野) 4필지 4,357㎡. 전체의 6.6%다. 안암동의 지형이 북악산 자락 구릉지라는 걸 감안하면, 이 임야의 존재는 자연스럽다. 나무가 우거진 산기슭, 혹은 경작하기 어려운 가파른 비탈이 국유 임야로 등록됐을 것이다.
임야는 문화재 조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지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무 뿌리와 토양 침식으로 인해 유구가 손상됐을 수도 있다. 이 4필지 임야 아래에 조선 시대 이전의 고분이나 석축 시설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북구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논(답, 畓) 2필지 2,935㎡. 전체의 4.5%로 가장 작은 비중이지만, 논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릉 지형이 주를 이루는 안암동에서 논이 가능했다는 건, 계곡 아래 평탄한 지점에 물을 댈 수 있는 수리(水利) 시설이 있었다는 뜻이다. 2필지에 불과하지만, 이 작은 논이 있던 자리가 어디인지를 특정할 수 있다면 당시 안암동의 수계(水系) 구조를 재현하는 단서가 된다.
논과 임야가 모두 등장하는 안암동의 국유지 구성은, 이 동네가 단조로운 농경지가 아니라 다양한 자연 환경을 품고 있던 복합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밭이 지배적이었지만, 그 옆에는 물도 있었고 숲도 있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호흡하던 그 공간의 흔적이 지금도 땅 속에 남아 있다.
SECTION 06
6. 이 기록이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갖는 진짜 의미
문화재 지표조사, 왜 이 숫자가 필요한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2025.1.31. 개정)은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는 그 세부 절차와 기준을 정한다. 쉽게 말하면, 삽을 들기 전에 전문 발굴 기관이 먼저 땅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는 법적 요건이다.
1912년 안암동 국유지 기록은 바로 이 지표조사의 역사적 배경 분석에 직접 쓰인다. 어느 구역이 대지였는지, 임야는 어디에 분포했는지, 논이 어느 지점에 있었는지를 미리 파악하면 발굴 우선 구역 설정이 가능하다. 이 데이터 없이는 어디를 먼저 파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다.
1
지표조사
문헌 분석과 육안 조사로 매장문화재 존재 가능성 평가
2
시굴조사
트렌치 굴착으로 지층 구조와 유물·유구 존재 실제 확인
3
표본조사
시굴 결과 바탕으로 더 넓은 범위 유구 분포와 규모 파악
4
발굴조사
전면적·체계적 발굴을 통해 유물 기록·수습·보고

서울에서 실제로 일어난 발굴 성공 이야기
말로만 하면 실감이 안 난다. 실제 사례가 있다.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원래 평범한 재개발 사업 부지였다. 그런데 공사 전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훈련도감 터와 한양도성 이간수문 유구가 발견됐다. 그 자리에 지금은 역사 유구가 유리 덮개 아래 보존·전시되어 있다. 발굴이 없었다면 그 역사는 콘크리트 아래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2021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작은 건물 신축 공사 전 표본조사 과정에서 조선 전기 금속 활자 1,6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전 세계 인쇄 역사를 다시 쓰는 발견이었다. 그리고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아파트 건설 도중 발견된 백제 왕성 추정지는 지금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삽 한 번이 역사를 구했고, 삽 한 번 잘못이면 역사를 지울 수도 있었다. 안암동도 예외가 아니다.
안암동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 현재 안암동 일대에는 고려대학교 캠퍼스, 병원 건물, 주거단지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대지 7필지와 임야 4필지 구역은 개발 전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우선 대상 구역입니다.
SECTION 07
7. 자주 묻는 질문 (Q&A)
1912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30필지였습니다. 밭 17필지, 대지 7필지, 임야 4필지, 논 2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912년 안암동 국유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총 65,603㎡였습니다. 축구장 약 9개 크기에 해당합니다.
1912년 안암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전)은 17필지, 53,425㎡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81.4%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1912년 안암동 국유지 중 대지와 임야는 각각 얼마였나요?
대지는 7필지 4,885㎡(7.4%), 임야는 4필지 4,357㎡(6.6%)였습니다.
1912년 안암동 국유지 중 논은 얼마나 있었나요?
논(답)은 2필지, 2,935㎡였습니다. 전체의 4.5%로 가장 작은 비중이었습니다.
이 자료가 문화재 발굴조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에 따른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의 역사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특히 대지·임야 구역은 유구 발견 가능성이 높아 발굴 우선 대상이 됩니다.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국유지는 총 30필지 65,603㎡였으며, 밭 17필지(53,425㎡) · 대지 7필지(4,885㎡) · 임야 4필지(4,357㎡) · 논 2필지(2,935㎡)로 구성되어 있었다. 밭 비율 81.4%는 이 시리즈 상위권 수치로, 안암동이 농업 생산 중심의 국유지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앉일바위' 곁에 앉아 쉬던 사람들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산을 올랐던 그 땅.
65,603㎡의 기억은
밭이었고 임야였고 논이었고 집터였다.
지금 너는 그 위에 서 있다.
카페를 찾아가고, 강의실을 향해 걷고,
골목을 배회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발밑 어딘가에
아직 아무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오늘 이 글을 읽은 당신이,
그 기억의 첫 번째 증인이 됐다.

자료 출처 및 분석 기준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기록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분석 항목: 지목별 필지 수, 면적(㎡), 비율
분석 기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2026.1.11. 시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가 필요하신가요?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 분석부터 현장 발굴조사까지,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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