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북구 성북동 국유지 6필지 25,421㎡한양도성 자락에 숨겨진 땅의 이야기
- 6월 1일
- 6분 분량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 토지조사부 시리즈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국유지 기초조사
1912년 성북동 국유지 6필지 25,421㎡한양도성 자락에 숨겨진 땅의 이야기
선잠단, 성락원, 간송미술관이 자리한 이 땅. 112년 전 이곳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밭과 산림의 땅이었다. 그 기록이 지금 발굴조사의 단서가 된다.
6총 필지 수
25,421총 면적(㎡)
3지목 유형
1912토지조사사업 연도
밭 한 뙈기가 남긴 기록이 110년 뒤 발굴조사의 나침반이 된다.
1912년, 일제는 조선의 땅을 한 뼘도 빠짐없이 측량했다. 이름하여 토지조사사업. 이 과정에서 성북동의 국유지 6필지가 공식 기록으로 남았다. 총면적 25,421㎡. 지금의 축구장 세 개 반을 합친 크기다.
당시 이 땅들은 대지 1필지, 임야 2필지, 그리고 밭 3필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지목(地目) 분류가 고고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다. 어떤 땅에 무엇이 있었는지, 왜 국가가 그 땅을 직접 보유했는지,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를 추론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한양도성 북쪽 자락에 자리한 성북동. 선잠단지, 성락원, 간송미술관이 이곳에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문화와 예술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동네. 그 땅의 1912년 기록을 지금부터 펼쳐본다.
목차
11912년 성북동 국유지 통계 분석
2지목별 상세 데이터 — 대지·임야·밭
3성북동은 왜 특별한 땅인가
4국유지가 품고 있는 고고학적 가능성
5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에 필요한 이유
6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절차
7성북동 발굴 성공 사례들
8땅이 기억하는 것들

1
1912년 성북동 국유지 통계 분석 — 숫자가 말하는 것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기록한 성북동 국유지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총 6필지에 걸쳐 25,421㎡. 이 땅들의 지목 구성을 보면 당시 성북동 국유지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6필지총 필지 수
25,421㎡총 국유지 면적
3종류지목 유형 수
88.6%밭 면적 비율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구성비 |
밭(田) | 3필지 | 22,505㎡ | 88.6% | |
임야(林野) | 2필지 | 2,793㎡ | 11.0% | |
대지(垈) | 1필지 | 122㎡ | 0.5% | |
합계 | 6필지 | 25,421㎡ | 100% |
이 데이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밭의 압도적 비율이다. 전체 국유지의 88.6%, 면적으로는 22,505㎡가 밭이다. 대지는 고작 122㎡, 전체의 0.5%에 불과하다. 이것은 1912년 성북동 국유지가 관청 건물이나 시설 부지보다는 국가 직속 경작지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했음을 뜻한다.
임야 2필지 2,793㎡는 산림 자원을 국가가 직접 보전하던 흔적이다. 조선시대 한양 주변의 산림은 봉산(封山)이나 금산(禁山)으로 지정되어 민간의 벌채가 금지된 경우가 많았다. 성북동의 임야가 그 연장선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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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목별 상세 분석 — 대지·임야·밭이 말해주는 것
세 가지 지목이 각각 어떤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이 땅의 1912년 이전 모습이 조금씩 복원된다.
1필지대지(垈)122㎡건물 부지
2필지임야(林野)2,793㎡산림 보전
3필지밭(田)22,505㎡국가 경작지
대지 1필지 · 122㎡
122㎡는 약 37평 규모다. 작지만 그 존재 자체가 흥미롭다. 조선 후기 또는 구한말에 세워진 관아 부속 건물, 수직소(守直所, 국유지를 관리하는 이가 머무르는 시설), 혹은 기타 국유 시설의 자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 122㎡의 대지 위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첫 번째 과제다. 건물지가 확인된다면 조선 후기 관영 시설의 배치와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임야 2필지 · 2,793㎡
성북동의 산림은 조선시대부터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한양 북쪽 북악산 자락에 이어진 이 일대는 도성의 방어와 경관 보전을 위해 민간 개발이 제한됐다. 국유 임야는 조선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목재와 땔감을 공급하거나, 풍수지리적 이유로 보전된 금산(禁山)의 성격을 가졌을 수 있다. 임야의 토층에는 수백 년간 유기물이 쌓인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산림 경계를 표시했던 표석이나 소규모 제단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밭 3필지 · 22,505㎡
국유 밭, 즉 역둔토(驛屯土) 계통의 경작지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역(驛)과 둔전(屯田)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토지였다. 성북동 일대에 이렇게 넓은 밭이 국유로 유지됐다는 것은 조선 왕실이나 중앙 관청이 이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물에 의존했음을 시사한다. 현재 간송미술관이나 성락원 주변 일대와 공간적으로 겹칠 가능성도 있어 문화재 분포 가능성이 특히 주목된다.

3
성북동은 왜 특별한 땅인가 — 한양도성 자락의 역사
성북동은 서울에서도 역사 밀도가 유독 높은 동네다. 한양 도성의 북쪽 성벽이 이 동네를 감싸고 지나가고, 조선 왕실이 직접 제사를 올리던 선잠단지(사적 제83호)가 이곳에 있다. 선잠단은 조선 왕비가 친히 누에를 치며 양잠을 장려하던 국가 의례의 장소였다.
성락원은 조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이 거처하던 별궁의 정원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이 정원은 조선 말기 왕족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민간 박물관으로, 일제강점기에 흩어질 뻔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보존한 문화재 수호의 현장이다.
1912년 국유지 기록에서 성북동에 밭 3필지 22,505㎡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 동네의 역사 밀도를 생각할 때 단순히 농사를 짓던 땅으로만 볼 수 없다. 선잠단 주변 국유 경작지는 왕실 의례용 누에 먹이인 뽕나무 재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선잠제를 위한 뽕밭이 국유지로 관리됐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가설이 맞다면, 이 밭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조선 왕실 의례 문화유산의 일부다.
성북동은 2013년 서울시로부터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됐다. 지구 지정 이후 건물 높이는 최대 2층(8m)으로 제한되고 용적률도 150% 이하로 관리되고 있다. 이는 이 땅의 역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행정 조치다. 그리고 이런 지역에서 개발 행위가 발생할 경우, 문화재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닌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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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유지가 품은 고고학적 가능성 — 땅 아래 무엇이 있을까

성북동 국유지 25,421㎡ 안에는 어떤 문화층이 잠들어 있을까? 지목과 역사 자료를 교차 분석하면 몇 가지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매장문화재 유형
대지 필지(122㎡): 조선 후기 관영 건물지, 기와편, 관용 백자. 임야 필지(2,793㎡): 조선시대 봉산 표석, 제단 유구, 능묘 관련 흔적. 밭 필지(22,505㎡): 조선 왕실 뽕밭 관련 유구, 역둔토 경계 표석, 고려~조선 생활 유구, 기와편·도자기편이 포함된 문화층.
특히 밭 필지가 선잠단지 인근이라면 왕실 의례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선잠단지 발굴조사에서는 이미 조선시대 제단 유구와 관련 유물들이 확인된 바 있다. 국유 밭이 이 제단 주변에 분포했다면 그 경계 지역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한 법적 절차가 아니라 역사를 복원하는 실질적 첫 단계가 된다.
5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에 필요한 이유
성북동 국유지에서 어떤 개발 행위가 이루어지든,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특히 이 지역은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된 곳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문헌 조사.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처럼 역사 문서를 분석하여 해당 토지의 과거 이용 현황과 문화재 분포 가능성을 파악한다. 둘째, 지표 답사. 현장을 직접 걸으며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을 채집·기록한다. 셋째, 종합 보고서 작성 및 시굴 필요 여부 판단.
단계 | 명칭 | 성북동 적용 시 주목 포인트 |
1단계 | 문화재 지표조사 | 선잠단·성락원 인접 여부, 1912 국유지 지목 분석, 조선 관영 시설 문헌 조사 |
2단계 | 시굴조사 | 대지 122㎡ 건물지 트렌치 확인, 밭 지역 문화층 깊이 측정 |
3단계 | 표본조사 | 임야 내 제단·봉산 표석 유구 선택 발굴 |
4단계 | 본발굴조사 | 유적 전면 발굴·국가유산청 보고·보존 결정 |
1912년 토지조사부가 남긴 국유지 6필지 기록은 바로 이 1단계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문헌 자료가 된다. 당시 국유지의 지목, 위치, 면적을 파악함으로써 발굴 우선 구역을 선정하고 트렌치 배치를 계획하는 데 직접 활용할 수 있다. 과거의 기록이 현재의 발굴 계획을 이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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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 — 성북동 국유지에 적용하면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 유적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로 넘어간다. 시굴조사는 좁은 트렌치를 굴착해 지층의 구조와 유구의 유무를 확인하는 단계다. 성북동 국유지의 경우 대지 122㎡ 구역과 밭 경계부를 중심으로 시굴 트렌치를 배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시굴 결과 유적이 확인되면 표본조사를 통해 유적의 범위와 성격을 보다 넓게 파악한다. 표본조사는 전체 유적 면적의 일정 비율을 선택적으로 발굴하여 전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다. 성북동처럼 역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표본조사 단계에서 이미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본발굴조사에서는 유적 전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가유산청에 보고한다.
혐기성 환경과 유기물 보존
성북동처럼 계곡부를 낀 지형에서는 지하수위가 높아 혐기성 환경이 형성되는 곳이 있다. 이런 구역에서는 목재, 씨앗, 직물 등 유기물이 수백 년간 썩지 않고 보존되는 경우가 있다. 1912년 밭이나 임야 구역 중 저습지 가능성이 있는 곳은 유기물 유물 출토 가능성이 높아 조사 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7
성북동 발굴 성공 사례 — 이미 역사는 증명됐다
성북동과 그 인근 지역에서의 발굴조사 사례들은 이 일대의 고고학적 잠재력을 충분히 입증한다.
성공 사례 01
한양도성 발굴 — 성북동 능선에서 드러난 축성의 역사
성북동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 구간에서 태조(14세기), 세종(15세기), 숙종 이후(18~19세기)가 쌓은 세 시기의 성벽이 하나의 유적 안에서 확인됐다.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으로 보수된 성벽의 실물이 드러난 것이다. 이 발굴은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단계를 통해 발굴 구역이 특정되었고, 본발굴조사에서 전체 구조가 밝혀졌다.
성공 사례 02
선잠단지 조사 — 조선 왕실 의례 공간의 복원
성북동 선잠단지(사적 제83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제단 유구와 제례 관련 유물들이 확인됐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성북선잠박물관이 건립됐으며, 선잠제의 역사와 의미가 시민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발굴이 단순한 유물 발견을 넘어 지역 문화 자산으로 이어진 모범 사례다.
성공 사례 03
성락원 인근 조사 — 조선 왕실 별궁 조경의 흔적
명승으로 지정된 성락원 일대에서는 조선 왕실 정원 문화의 흔적이 지표조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의친왕이 거주하던 별궁 정원의 원형을 파악하기 위한 문헌 조사와 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성락원 보존·복원 계획에 반영됐다. 1912년 국유지 기록이 이 조사의 문헌적 근거 중 하나로 활용됐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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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땅이 기억하는 것들 — 기록의 끝에서 발굴이 시작된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록은 냉정한 숫자들의 집합이다. 6필지, 25,421㎡, 대지 122㎡, 임야 2,793㎡, 밭 22,505㎡. 이것이 전부다. 당시 그 땅에서 살고 일하고 제사를 올렸던 사람들의 이름은 없다. 그 밭에서 자라난 뽕나무가 선잠단 의례에 쓰였는지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 임야에서 어떤 나무가 왕실 제례의 땔감이 됐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땅 속에 있다. 사람이 살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기와 한 조각, 분청사기 파편 하나, 숯으로 변한 뽕나무 가지 하나. 이것들이 문화층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에 응답하는 것이 문화재 발굴조사다.
112년 전 국가가 직접 쥐고 있던 땅.
그 땅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나를 기억하는가?
삽 하나, 붓 하나, 기록 하나로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한다.
— 성북동 국유지 6필지의 기억을 위해
1912년의 기록은 끝났지만, 그 기록이 가리키는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북동 땅 아래에서 기다리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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