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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대문구 4,458필지 5,471,303㎡6개국 외국인 토지, 창덕궁 4필지, 독립문의 땅이 품은 근대사

  • 6월 1일
  • 7분 분량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 토지조사부 시리즈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전역 · 문화재 기초조사 데이터

1912년 서대문구 4,458필지 5,471,303㎡6개국 외국인 토지, 창덕궁 4필지, 독립문의 땅이 품은 근대사

미국인 20필지, 프랑스인 21필지, 러시아인 2필지, 중국인 2필지, 덴마크인 1필지, 창덕궁 소유 4필지. 1912년 서대문구는 근대 한국사의 모든 충돌이 토지 위에 새겨진 땅이었다.

4,458총 필지

2,308대지

6외국인 소유 국적

4창덕궁 소유 필지

21프랑스인 최다

1912년 서대문구의 땅에는 미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중국인, 덴마크인, 그리고 창덕궁이 동시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4,458필지. 이 시리즈에서 가장 다층적인 소유 구조를 가진 지역이다. 조선인의 땅, 국유지, 동척의 수탈지가 공존하는 것은 다른 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서대문구는 여기에 6개국 외국인 토지창덕궁 소유 4필지가 더해진다.

미국인 20필지.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온 이후 서대문 일대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집과 학교와 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1917년 서대문구 신촌동에 캠퍼스를 조성하기 전, 이미 1912년에 미국 선교사들의 토지가 이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프랑스인 21필지는 더욱 복잡한 역사를 담고 있다.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된 이 땅에서, 46년 뒤 프랑스인이 21필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창덕궁 4필지. 이미 조선 왕실이 붕괴해가던 1912년, 창덕궁이 서대문구에 직접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 왕실과 서대문 지역의 깊은 역사적 연결을 증언한다.


목차

11912년 서대문구 토지 통계 총괄

26개국 외국인 토지 — 근대사의 지도

3미국인 20필지 — 선교사의 땅과 근대 교육

4프랑스인 21필지 — 병인박해와 재건의 역사

5창덕궁 4필지 — 조선 왕실이 남긴 마지막 흔적

6성씨 7종과 독립문 인근 마을 사람들

7독립문·영은문 — 서대문구가 역사의 무대인 이유

8분묘지 15필지와 사사지 8필지의 의미

9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10성공 사례와 감동의 마무리



1

1912년 서대문구 토지 통계 총괄

1912년 서대문구의 토지 전체 현황이다. 4,458필지 5,471,303㎡. 이 시리즈의 다른 구들과 비교하면 면적은 비교적 소규모다. 하지만 내부 구성의 복잡성은 이 시리즈 최고 수준이다.

2,308필지대지

1,654필지

398필지

168필지국유지

152필지동양척식(주)

140필지일본인

54필지잡종지

47필지법인

21필지프랑스인

20필지미국인

19필지임야

15필지분묘지

8필지사사지

4필지창덕궁 소유

2필지러시아인·중국인

1필지덴마크인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비율 시각화

밭(田)

1,654

2,770,822

50.6%


논(畓)

398

1,417,689

25.9%


대지(垈)

2,308

818,787

15.0%


잡종지

54

283,267

5.2%


임야(林野)

19

60,955

1.1%


분묘지

15

103,197

1.9%


사사지(寺社地)

8

8,436

0.15%


지소(池沼)

2

8,148

0.15%


합계

4,458

5,471,301

≈100%


밭 50.6%, 논 25.9%로 농경지가 76.5%를 차지하지만, 대지는 2,308필지로 전체 필지의 51.8%에 달한다. 마포구(4,464필지)보다는 적지만 필지 비율로는 비슷한 수준이다. 서대문구 역시 도성 서쪽 외곽의 주요 취락 지대로 사람이 밀집해 있었다. 그리고 이 대지 2,308필지의 상당수에 선교사들의 주택, 교회, 학교, 병원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 ✦


2

6개국 외국인 토지 — 1912년 서대문구의 국제 지도

이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국적의 토지 소유가 기록된 지역이 서대문구다. 마포구(중국·프랑스), 영등포(미국), 성동구(없음), 송파(프랑스), 성북동(없음)과 비교하면 서대문구의 6개국 외국인 소유는 압도적이다.

1912년 서대문구 외국인·특수 소유자 토지

🇫🇷프랑스인21필지 · 최다

🇺🇸미국인20필지

🏯창덕궁4필지 · 왕실 소유

🇷🇺러시아인2필지

🇨🇳중국인2필지

🇩🇰덴마크인1필지 · 최희귀

러시아인 2필지는 1896~1898년 아관파천 시기 러시아 공사관이 덕수궁 인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흔적일 수 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했고, 러시아 공관 관계자들이 서울 곳곳에 거주하며 토지를 취득했다. 서대문구의 러시아인 2필지는 그 역사의 물적 증거다.

덴마크인 1필지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덴마크 국적 소유자다. 1906년 대한제국과 덴마크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덴마크 상인이나 외교관이 서울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단 1필지이지만, 한국-덴마크 근대 관계사를 추적하는 데 있어 귀중한 물적 단서가 된다.

6개국 토지와 문화재 조사의 연결점

미국·프랑스·러시아·중국·덴마크 5개국 외국인이 소유했던 필지에서는 조선 유물 외에 서양식 건물 기초석, 수입 도자기, 선교 관련 유물, 외교 문서 보관함 등 이국적 근대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유물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극히 희귀한 자료다. 6개국 필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최우선 과제다.


3

미국인 20필지 — 선교사의 땅, 근대 교육의 씨앗



미국인 20필지는 단순한 외국인 토지가 아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인천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도착했다. 같은 날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도 상륙했다. 이후 서대문 일대는 미국 개신교 선교의 거점이 됐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가 세워졌고, 1912년 당시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 설립 자금을 미국에서 모아 귀국한 직후였다.

이 미국인 20필지는 선교사들의 주택, 학교 부지, 예배당 터, 병원 부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부지에서는 개항기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온 수입 물품, 서양식 건물 기초, 근대 의료 기구 등이 발굴될 수 있다. 한국 근대 교육·의료·종교사를 물적으로 증명하는 유물들이다.


4

프랑스인 21필지 — 병인박해의 땅에서 재건된 역사

프랑스인 21필지는 미국인 20필지보다 1필지 더 많다. 그리고 이 차이가 하나의 역사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한 수천 명의 조선 가톨릭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프랑스는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다(병인양요). 박해와 전쟁, 순교와 보복. 그 역사로부터 46년이 지난 1912년, 프랑스인이 서대문구에 2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21필지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재건한 천주교 시설과 관련된 부지일 가능성이 크다. 병인박해 이후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은 지하에서 신앙을 이어갔고, 1882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공개적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약현성당(현 중림동 성당), 명동성당 등이 잇달아 세워졌고, 서대문 일대에도 가톨릭 관련 시설이 들어섰다.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독립문이 대성공을 거두길. 후세들이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이 그들 선조의 성취를 기릴 때처럼 이 문을 바라보길 바란다."

— 1896년 독립문 건립 당시 외국인 논평 (오마이뉴스 재인용)

독립문 건립 당시 외국인들도 이 땅의 자주 독립을 응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프랑스인 21필지의 소유자들 역시 단순한 식민지 자본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복잡한 맥락 안에 있었다. 이 필지들의 문화재 조사는 단순한 유물 발굴을 넘어 한불 관계의 근대사를 물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이 된다.

✦ ✦ ✦


5

창덕궁 4필지 — 조선 왕실이 서대문구에 남긴 마지막 흔적

1912년은 조선이 사라지고 일제 강점이 시작된 지 2년이 된 해다. 국권을 잃은 조선 왕실의 법적 지위는 일본 황실에 종속된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됐다. 그럼에도 창덕궁이 서대문구에 4필지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함의를 가진다.

창덕궁 소유 4필지는 어떤 땅이었을까. 조선 시대 왕실은 서울 곳곳에 궁방전(宮房田)을 보유했다. 왕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직속 경작지가 도성 내외에 분산되어 있었다. 서대문구의 창덕궁 4필지는 그 궁방전의 마지막 흔적이거나, 왕실 관련 시설(능묘 관련 제전, 별궁 부속지 등)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왕실 궁방전의 문화층에서는 왕실 관련 의례 유물이 발굴될 수 있다.

창덕궁 소유 4필지와 국유지 168필지의 관계도 주목해야 한다. 일제는 조선 왕실 소유지를 단계적으로 국유화했다. 1912년 창덕궁 소유로 기록된 4필지는 이 과도기의 상태를 반영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창덕궁 소유 4필지의 위치를 특정하고, 주변 국유지 168필지와의 연관성을 분석하면 조선 왕실 영지의 분포와 변천을 추적하는 데 핵심 자료가 된다.


6

성씨 7종과 독립문 인근 마을 사람들의 이름

이 복잡한 국제 토지 지형 속에서 조선인들은 여전히 이 땅의 주인이었다. 1912년 서대문구의 성씨 분포다.

김씨889필지1위

이씨757필지2위

박씨318필지3위

장씨220필지4위 · 주목

최씨203필지5위

정씨132필지6위

조씨119필지7위

서대문구는 이 시리즈 다른 구들과 비교해 성씨 다양성이 낮다(7종). 하지만 각 성씨의 필지 수가 타 구 대비 고르게 분포한다. 특히 장씨 220필지가 4위에 오른 것은 특징적이다. 장씨는 전국적으로 비교적 희귀한 성씨 중 하나인데, 서대문구에서 220필지를 보유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장씨 집성촌 또는 장씨 가문의 대규모 토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선 시대 서대문 일대 사족 가문의 흔적을 추적하는 데 있어 장씨 집성촌의 위치 파악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7

독립문·영은문 — 서대문구가 왜 근대사의 무대인가



1897년 완공된 독립문. 조선이 청나라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하기 위해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 부근에 세운 기념비다. 높이 14.28m, 너비 11.48m. 파리 개선문을 모델로 한 이 석조 문은 1912년에도 서대문구에 우뚝 서 있었다.

영은문은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의례 공간이었다. 그 영은문의 주초(柱礎)는 지금도 독립문 앞에 보존되어 있다. 1912년 토지조사부의 국유지 168필지에 독립문 주변 부지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독립문 부지 지하에는 영은문 시기의 석조 구조물 잔재, 조선 시대 의례 관련 유물이 묻혀 있을 수 있다.

1394~1910년 · 조선 시대

서대문 밖은 한양 도성의 서쪽 관문이었다. 의주로를 통해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영은문은 그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 공간이었다. 서대문 일대의 대지 구역에는 조선 시대 하급 관리, 역졸, 나루터 종사자들의 취락이 형성됐다.

1885~1910년 · 개항기~대한제국

미국·프랑스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건립하고 민권 운동을 전개했다. 서대문형무소(1908년 개소)가 이 시기에 지어졌다. 외세와 자주독립의 긴장이 이 좁은 구역 안에서 충돌했다.

1910~1912년 · 일제강점 직후

조선이 사라지고 일제 강점이 시작됐다. 창덕궁은 '이왕가'로 격하됐지만 서대문구에 여전히 4필지를 보유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20필지에서 계속 활동했고, 동척이 152필지를 장악해갔다. 이 시기의 지층 안에 한국 근대사의 모든 모순이 압축되어 있다.


8

분묘지 15필지와 사사지 8필지 — 비교적 소규모지만 깊은 의미

분묘지 15필지 103,197㎡. 필지 수는 이 시리즈 최소 수준이지만 면적은 1필지 평균 6,880㎡로 매우 크다. 이것은 서대문구의 분묘지가 개인 무덤이 아니라 대규모 가문 묘역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뜻한다. 조선 시대 서대문 일대는 도성 밖 첫 번째 구역으로 사대부 가문들의 선산이 집중됐다.

사사지 8필지 8,436㎡는 성동구와 동일한 필지 수다. 서대문구의 사사지는 조선 시대 불교 사찰과 함께 개신교·가톨릭 선교 시설이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성리학적 조선의 불교 시설 흔적과 근대 기독교 선교 시설이 사사지라는 하나의 분류 안에서 공존한다. 이 8필지의 각각이 어떤 신앙 시설에 해당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한 과제다.


9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 서대문구의 4단계 전략

6개국 외국인 토지, 창덕궁 4필지, 독립문과 영은문, 조선 사대부 선산 15필지, 선교 시설 가능성의 사사지 8필지. 서대문구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가 가장 복잡하게 교차하는 지역 중 하나다.

조사 단계

서대문구 핵심 적용 지점

기대 성과

문화재 지표조사

외국인 6개국 필지 위치 현장 확인·창덕궁 4필지 구 영지 현황·독립문 주변 국유지 분포·분묘지 15필지 묘역 성격 파악

조사 우선 구역 선정

시굴조사

영은문 유구 잔존 여부 확인·미국·프랑스 선교 부지 문화층 확인·장씨 집성촌 추정 구역 건물지 트렌치

유구 성격·층위 확인

표본조사

창덕궁 궁방전 관련 유구 선택 발굴·덴마크·러시아 필지 근대 유물 조사·사사지 8필지 신앙 시설 구분

유적 성격 파악

본발굴조사

전면 발굴·기록·국가유산청 보고·서대문형무소역사관·독립공원 연계 전시

역사 복원 완성

✦ ✦ ✦


10

성공 사례와 감동으로 닫는 이야기

서대문구와 인접 지역의 발굴 성과들이 이 일대의 고고학적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성공 사례 01

독립문·영은문 주초 보존 — 역사의 물적 증거를 지키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독립문이 약 70m 이전될 때, 영은문의 주초(柱礎)도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됐다. 문화재 지정과 체계적인 기록·이전 작업이 없었다면 영은문의 마지막 흔적은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이 사례는 1912년 국유지 기록에 포함된 독립문 주변 부지의 지하 유구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성공 사례 02

연세대학교 캠퍼스 근대 건축 문화재 지정 — 선교사 유산의 보존

연세대학교 신촌 캠퍼스의 스팀슨관(1920년), 언더우드관(1924년), 아펜젤러관(1924년) 등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석조 건물들이 사적으로 지정됐다. 1912년 미국인 소유 20필지의 일부가 바로 이 선교 교육 시설의 부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지정이 단순한 건물 보존을 넘어 한국 근대 교육사 전체를 기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성공 사례 03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고통의 공간을 역사 교육의 장으로

1908년 건립된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의 일부 시설이 복원되어 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옥사, 지하 고문실, 사형장 등이 발굴·복원됐다. 1912년 서대문구 국유지 168필지에 이 형무소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과 보존이 역사 교육으로 이어진 가장 강력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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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20필지에서 학교가 세워지고,


프랑스인 21필지에서 신앙이 재건됐으며,


창덕궁 4필지엔 사라져가는 왕조의 숨결이 남았다.


독립문은 영은문이 서 있던 자리에서


조선인들의 다짐을 돌 위에 새겼다.


그 모든 것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있다.


발굴은 그 다짐을 다시 꺼내는 일이다.


— 서대문구 4,458필지, 근대사의 기억을 위해

1912년 서대문구의 땅에는 조선인의 꿈과 외세의 힘과 신앙의 씨앗이 동시에 뿌려져 있었다. 그 씨앗들 중 어떤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지, 땅 아래에서 그 답을 찾는 일이 문화재 발굴조사다. 역사는 언제나 땅에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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