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집 한 채 자리와 솔숲 한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중구 편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집 한 채 자리와 솔숲 한 자락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2필지국유지 전체
3,176㎡총면적 · 약 961평
67.6%임야 비중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2가에는 국유지 2필지, 총 3,176㎡가 있었습니다.
이 중 대지는 1필지 1,028㎡, 임야는 1필지 2,148㎡였습니다.
즉 남산동2가 국유지는 대지와 임야로 이루어졌고, 임야가 대지보다 1,120㎡ 더 넓었습니다.
명동에서 남산 쪽으로 딱 한 블록.그 골목 아래에 114년 전 장부가 묻혀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면, 아마 남산동2가를 지나쳤을 겁니다.
오르막 골목, 오래된 단독주택, 그 사이사이 들어선 오피스텔.
평범해 보이죠. 그런데 1912년, 이 동네에는 나라 이름으로 등록된 땅이 딱 두 필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사는 땅, 대지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임야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작습니다. 합쳐서 3,176㎡. 평으로 치면 약 961평입니다.
하지만 잠깐만요. 이 두 필지가 놓인 자리가 하필 남산 자락이라는 걸 떠올리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무렵 남산 아래는 조선 사람의 마을이 빠르게 다른 얼굴로 바뀌던 현장이었거든요.
오늘은 그 두 필지를 단서로, 남산동2가 역사를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내일 그 골목을 걷는 발걸음이 분명 조금 달라질 거예요.
목차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남산동2가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남산동2가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와 임야, 숫자로 비교하면 무엇이 보이나요?
남산동2가 역사, 1912년 남산 아래는 어떤 곳이었나요?
1912년 지적 기록은 실제 발굴조사에서 어떻게 쓰였나요?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문화유산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남산동2가에서 공사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하나요?
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이미지 설명: 남산 자락 아래 오르막 골목을 걷는 20대 한국인 여성.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 이야기의 시작을 여는 장면입니다.
1.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장부를 펼치면 숫자는 단 두 줄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2가에 국유지는 2필지 3,176㎡가 있었습니다.
이 문장이 오늘 이야기의 뼈대입니다.
1912년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던 한가운데 시기입니다. 땅마다 번호를 붙이고, 쓰임새를 정하고, 주인을 적어 넣었죠.
그 장부에서 땅의 쓰임새를 지목이라고 부릅니다. 대지, 전, 답, 임야, 분묘지 같은 이름이 바로 지목입니다.
남산동2가 국유지 장부를 펼치면 지목은 딱 두 개만 등장합니다. 대지 하나, 임야 하나.
논도 없고 밭도 없습니다. 도심 한복판, 산 바로 아래 동네다운 구성이죠.
3,176㎡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
3,176㎡는 표준 축구장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넓이입니다.
요즘 서울 도심 기준으로 보면 중형 오피스 빌딩 두세 개가 들어설 만한 땅이에요.
작다고 넘기기엔, 남산 바로 아래라는 위치가 너무 묵직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는 총 2필지 3,176㎡였습니다.
2.남산동2가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사람의 온기가 남은 땅, 1,028㎡
1912년 서울시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 중 대지는 1필지 1,028㎡가 있었습니다.
평으로 바꾸면 약 311평입니다.
대지란 집이나 건물이 서 있거나, 세울 수 있는 땅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 밥을 짓고, 잠을 자고, 문을 여닫던 자리라는 뜻이에요.
311평이면 그 시절 기와집 몇 채가 마당을 끼고 앉을 만한 크기입니다. 관청 부속 건물이었을 수도, 관리가 살던 집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장부는 그 안에 누가 살았는지까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죠.
대지는 왜 발굴조사에서 중요할까
고고학에서 오래된 대지는 늘 첫 번째 관심 대상입니다.
사람이 오래 산 땅에는 건물터, 아궁이, 우물, 담장 기초, 깨진 그릇 조각이 켜켜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1912년에 이미 대지였다는 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생활 공간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조선 후기 남산 아래 마을의 흔적이 지금 아스팔트 밑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 대지는 1필지 1,028㎡, 약 311평이었습니다.
3.남산동2가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남산이 흘러내린 자리, 2,148㎡
1912년 서울시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 중 임야는 1필지 2,148㎡가 있었습니다.
약 650평입니다. 대지의 두 배가 넘습니다.
임야는 숲과 산비탈 땅입니다. 남산동2가라는 이름 그대로, 남산의 몸이 마을 쪽으로 흘러내린 자리였던 셈이죠.
조선 시대 남산은 목멱산이라 불리며 나라를 지키는 산으로 여겨졌습니다.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관리하던 산이었어요.
그 산자락 한 조각이 1912년 장부에 국유 임야로 올라 있었다는 것, 꽤 상징적이지 않나요?
임야는 왜 지표조사에서 놓치면 안 될까
도심의 산자락 임야는 개발이 늦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옛 지형과 유구가 덜 훼손된 채 남아 있을 확률이 있습니다.
성곽 기초, 옛 길, 제사 터, 무덤 같은 흔적은 대부분 이런 비탈에서 발견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할 때 경사지 표면을 꼼꼼히 걸어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 임야는 1필지 2,148㎡, 약 650평이었습니다.

이미지 설명: 1912년 남산 자락. 왼쪽은 대지 1필지 1,028㎡, 오른쪽은 임야 1필지 2,148㎡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입니다.
4.대지와 임야, 숫자로 비교하면 무엇이 보이나요?
한눈에 보는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 표
구분 | 필지 수 | 면적(㎡) | 환산(평) | 비율 |
대지 | 1필지 | 1,028 | 약 311 | 32.4% |
임야 | 1필지 | 2,148 | 약 650 | 67.6% |
국유지 전체 | 2필지 | 3,176 | 약 961 | 100% |
대지
1,028㎡
임야
2,148㎡
이미지 설명: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를 정리한 표와 막대그래프로, 대지 1필지 1,028㎡와 임야 1필지 2,148㎡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숫자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
첫째, 임야가 대지보다 1,120㎡ 더 넓습니다. 약 2.09배입니다.
둘째, 국유지 셋 중 두 몫이 숲이었다는 뜻입니다. 남산동2가 국유지의 성격은 마을보다 산에 더 가까웠어요.
셋째, 필지 수는 같고 면적만 다릅니다. 한 필지씩이니 각 필지 위치만 찾아내면 현재 지번과 겹쳐 보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조사하는 입장에서는 반가운 조건이죠.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는 임야 67.6%, 대지 32.4%로 숲의 비중이 두 배 이상 높았습니다.
5.남산동2가 역사, 1912년 남산 아래는 어떤 곳이었나요?
남촌, 조용히 주인이 바뀌던 동네
청계천 북쪽을 북촌, 남쪽 남산 아래를 남촌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촌은 원래 벼슬 없는 선비들이 많이 살던, 소박하고 조용한 동네였어요.
그런데 개항 이후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남산 아래 진고개 일대로 일본인이 몰려들기 시작했거든요.
구한말 선비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남산동을 비롯한 남촌의 여러 동이 하나둘 일본인 거주지로 넘어갔다고 통탄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남산동이라는 이름은, 그 아픈 문장 속에 직접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남산 위로 올라간 식민의 건물들
1906년 무렵 남산 기슭 예장 자락에는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0년 이후 그 건물은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였습니다.
남산 곳곳에는 신사가 세워졌고, 1925년에는 한양도성 성벽을 허물어 가며 거대한 조선신궁이 지어졌습니다.
1912년 남산동2가 장부에 적힌 두 필지는, 바로 그 변화가 한창 진행되던 무대 위에 놓여 있었던 거예요.
그 땅이 나라 소유로 적힌 이유, 그 뒤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는 장부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기록이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아주 정직한 창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미지 설명: 1912년 무렵 남산 아래 남촌 골목에서 변해가는 마을을 바라보는 한국인 선비의 뒷모습입니다.
6.1912년 지적 기록은 실제 발굴조사에서 어떻게 쓰였나요?
성공 사례, 100년 만에 다시 나타난 남산 성벽
여기서부터 소름 돋는 이야기입니다.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은 남산 회현자락 중앙광장 일대를 발굴조사했습니다.
그곳 한양도성 성벽은 1912년에 만든 지적원도 같은 옛 지도에만 선이 남아 있었고, 지상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어요. 조선신궁을 지으며 헐려 나갔기 때문입니다.
조사단은 옛 기록이 가리키는 자리를 파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땅속 약 3m 깊이에서 성돌이 층층이 쌓인 채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 5개월간의 조사 끝에 확인한 옛 성곽은 94.1m. 태조 때 처음 쌓고 세종과 숙종 이후까지 보수한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관청 이름 일부가 새겨진 기와 조각, 분청사기 조각 같은 유물도 함께 나왔습니다.
장부 한 줄이 왜 이렇게 강력할까
지상에서 흔적이 지워져도, 1912년 장부와 지도는 그 자리를 기억합니다.
필지 경계, 지목, 면적은 땅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려주는 좌표 역할을 합니다.
남산 성벽 사례는 1912년 기록이 단순한 옛날 서류가 아니라, 땅속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지도라는 걸 증명했습니다. 남산동2가 두 필지 기록도 바로 같은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7.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문화유산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네 단계로 이해하는 매장유산 조사
문화재 발굴이라고 하면 바로 땅을 파는 장면부터 떠올리기 쉽죠. 실제로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 과정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근거해 진행됩니다.
첫 단계는 지표조사입니다. 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1912년 지적 자료를 검토하고 현장 표면을 걸으며 유물과 지형을 살핍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품질은 기초자료를 얼마나 깊이 읽었느냐에서 갈립니다.
두 번째는 표본조사입니다. 넓은 땅 가운데 일부만 골라 작게 파 보며, 유적이 있을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세 번째는 시굴조사입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트렌치를 넣어 유구의 범위와 깊이, 성격을 확인하는 단계예요.
마지막이 발굴조사입니다. 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합니다.
1912년 기록은 어느 단계에서 빛날까
가장 크게 쓰이는 단계는 지표조사입니다.
남산동2가처럼 지금은 건물로 빽빽한 도심에서는 현장 표면에서 볼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럴수록 1912년 대지와 임야의 위치가 조사 방향을 잡는 나침반이 됩니다.
대지였던 자리는 생활 유구, 임야였던 자리는 지형과 성곽, 분묘 흔적을 우선 의심해 볼 수 있으니까

8.남산동2가에서 공사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하나요?
시행자라면 꼭 체크할 세 가지
남산동2가는 남산과 한양도성, 남촌 역사가 겹치는 자리입니다. 개발 전 기초조사가 그만큼 중요해요.
첫째, 사업 부지가 1912년 대지 또는 임야 필지와 겹치는지 확인하세요. 옛 필지와 현재 지번을 대조하는 작업이 출발점입니다.
둘째, 일정 규모 이상 사업이라면 지표조사 대상 여부를 미리 검토하세요. 착공 직전에 알게 되면 일정과 비용이 크게 흔들립니다.
셋째, 주변 조사 이력을 살펴보세요. 남산 일대는 이미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진 지역이라, 인근 결과가 좋은 참고 자료가 됩니다.
미리 알면 시간이 돈이 됩니다
문화유산 조사는 공사를 막는 절차가 아닙니다. 땅의 이력을 먼저 알고 리스크를 줄이는 절차예요.
1912년 기록을 먼저 읽어 두면 조사 범위가 선명해지고, 불필요한 시굴이나 일정 지연을 줄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과 상담할 때도 훨씬 구체적인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9.검증 노트와 시리즈 기록 노트
검증 노트
대지 1,028㎡와 임야 2,148㎡를 더하면 3,176㎡로, 제시된 총면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필지 수도 대지 1필지와 임야 1필지를 합쳐 2필지로 일치합니다.
평 환산은 1평을 3.3058㎡로 계산했으며, 비율은 소수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했습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남산동2가 국유지는 논과 밭이 전혀 없는 대지와 임야만의 구성입니다.
국유지의 3분의 2가 임야인 점은, 남산 바로 아래라는 입지가 장부 숫자에 그대로 새겨진 사례로 기록해 둡니다.
10.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2필지, 3,176㎡였습니다.
Q.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1필지 1,028㎡였습니다. 약 311평입니다.
Q. 1912년 남산동2가 국유지 중 임야는 얼마나 있었나요?
A. 임야는 1필지 2,148㎡였습니다. 약 650평입니다.
Q. 대지와 임야의 면적 차이는 얼마인가요?
A. 임야가 대지보다 1,120㎡ 더 넓었으며, 약 2.09배입니다.
Q.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
A.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옛 땅의 쓰임새와 위치를 파악하는 기초자료로 쓰이며, 이후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범위를 정하는 근거가 됩니다.
11.한 줄 결론과 마지막 이야기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는 총 2필지 3,176㎡였으며, 대지 1필지 1,028㎡와 임야 1필지 2,148㎡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이 지나친 골목은 사실 기억의 지층입니다
처음에 말했죠. 숫자만 보면 작다고.
그런데 이제는 다르게 보이지 않나요?
311평의 대지 위에는 누군가의 아침이 있었습니다. 650평의 솔숲에는 남산이 품어 온 수백 년의 바람이 있었고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나라의 주인이 바뀌던 해, 장부 두 줄로 남았습니다.
우리는 그 두 줄을 읽을 수 있는 세대입니다. 읽고, 확인하고, 다음 세대에게 땅속 이야기를 지켜서 넘겨줄 수 있는 세대예요.
내일 남산으로 가는 길, 남산동2가 골목에서 잠깐 걸음을 멈춰 보세요. 발밑 어딘가에서 114년 전의 기록이 조용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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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2가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중구 남산동2가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참고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참고 사례: 서울시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발굴조사(2013, 서울역사박물관) 공개 자료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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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흘러내린 자리에 숲 한 자락
사람이 머문 자리에 집 한 채
장부는 두 줄만 남겼지만
땅은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귀 기울이는 동안
남산 아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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