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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앞, 중구 남대문4가 5필지의 땅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114년 전 종이 위에 남은 숫자 하나가, 지금 우리 발밑을 설명하고 있다

  • 22시간 전
  • 7분 분량

"숭례문 앞, 5필지의 땅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114년 전 종이 위에 남은 숫자 하나가, 지금 우리 발밑을 설명하고 있다

5필지

전체 국유지

12,185㎡

전체 면적

77.3%

대지 비율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는 국유지 5필지, 총 12,185㎡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대지는 3필지 9,418㎡, 잡종지는 2필지 2,766㎡로, 대지가 전체 면적의 약 77%를 차지했습니다. 이 수치는 숭례문과 남대문시장을 낀 도심 한복판의 토지 이용 실태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쓰입니다.

1912년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대부분은 교과서 어딘가에 묻어둔 먼 과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해에 작성된 토지조사부 한 장이, 지금 이 순간 남대문로4가에서 삽을 뜨기 전 반드시 펼쳐 봐야 하는 서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땅은 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종이는 말을 한다. 114년 전 조사원이 손으로 눌러 쓴 숫자 몇 개가, 지금 이 자리에 무엇이 있었고 누가 그 땅을 쥐고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증언한다. 그 증언을 오늘,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려 한다.


목차

  1. 1912년, 남대문 앞 골목에서 시작된 이야기

  2. 국유지 5필지, 12,185㎡의 전체 그림

  3. 대지 3필지 9,418㎡ — 국가가 쥐고 있던 노른자 땅

  4. 잡종지 2필지 2,766㎡ — 이름부터 낯선 땅의 정체

  5. 대지 vs 잡종지, 숫자로 보는 비교

  6. 왜 하필 국유지였을까 — 토지조사사업의 이면

  7. 문화유산 지표조사와 이 기록이 만나는 지점

  8. 발굴로 증명된 이야기 — 한양도성과 남대문 일대 사례

  9. 자주 묻는 질문

  10. 한 줄 결론


11912년, 남대문 앞 골목에서 시작된 이야기

잠깐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1912년, 숭례문 앞 큰길에는 벌써 조선 최대의 저잣거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600년 넘게 이어져 온 상업의 심장, 그 앞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마다 상인들의 목소리가 오갔다.

그런데 바로 그해, 조선총독부는 조용히, 그러나 아주 치밀하게 전국의 땅을 재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토지조사사업. 밭두렁 하나, 담장 한 뼘까지 측량해 종이 위에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는 토지조사부이고, 남대문로4가 역시 예외 없이 이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남대문로4가는 원래 남대문통4정목이라 불렸다. 1914년 도로 이름이 남대문통으로 정리됐고, 이후 1946년에야 지금의 남대문로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 이름이 바뀌기 불과 몇 년 전, 이 골목의 땅 다섯 필지는 이미 국가의 소유로 장부에 올라 있었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그 문이 실제로 위치한 곳이 바로 이 남대문로4가라는 사실도, 이 이야기를 더 각별하게 만든다.

남대문시장은 조선 초기부터 무려 600년 넘게 이어져 온 상업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조선인 상인들이 밀려나 염천교 쪽으로 점포를 옮겨야 했던 아픈 역사도 있었다. 세금 부담 역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형평이 맞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이 골목의 땅 한 뼘, 한 뼘에는 시대의 그늘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런 골목 한복판에, 국가의 이름으로 등록된 다섯 필지가 있었다. 장사꾼들의 흥정 소리, 짐을 실은 수레바퀴 소리 사이로, 정작 그 땅의 주인은 조용히 국가였다. 이 아이러니가, 이 기록을 단순한 숫자 이상으로 만든다.



2국유지 5필지, 12,185㎡의 전체 그림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1912년 남대문로4가에 있던 국유지는 모두 5필지, 합쳐서 12,185㎡였다. 평수로 환산하면 약 3,686평, 요즘 감각으로 옮기면 축구장 절반을 조금 넘는 규모다.

이 다섯 필지는 크게 두 종류의 지목으로 나뉜다. 하나는 대지, 다른 하나는 잡종지다. 숫자만 놓고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이 두 지목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지목

필지 수

면적

비율

전체 국유지

5필지

12,185㎡

100%

대지

3필지

9,418㎡

77.3%

잡종지

2필지

2,766㎡

22.7%

한 줄 요약 · 1912년 남대문로4가 국유지는 대지 3필지 9,418㎡, 잡종지 2필지 2,766㎡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지가 전체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했다.


3대지 3필지 9,418㎡ — 국가가 쥐고 있던 노른자 땅

대지(垈地)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땅, 즉 사람이 살거나 장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뜻한다. 농사를 짓는 논밭과 달리, 대지는 그 자체로 값이 나가는 도심의 알짜 부지였다.

남대문로4가의 대지 3필지는 합쳐서 9,418㎡, 필지 하나당 평균 3,139㎡에 이른다. 당시 기준으로도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숭례문과 시장통이 맞닿은 이 자리에 국가가 대지를 쥐고 있었다는 것은, 이 땅이 얼마나 상업적으로, 또 전략적으로 중요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왜 하필 개인이 아니라 국가였을까. 답은 간단하지 않다. 조선시대부터 관아나 국가 시설이 있던 자리였을 수도 있고,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소유 관계가 불분명해 국유로 편입됐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이 세 필지가 남대문 앞 상권의 한 축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4잡종지 2필지 2,766㎡ — 이름부터 낯선 땅의 정체

잡종지(雜種地)라는 단어는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러 종류가 뒤섞인 땅, 즉 논도 밭도 대지도 아닌, 어느 하나의 용도로 딱 잘라 규정하기 어려운 자투리 성격의 토지를 가리킨다. 공터, 제방, 도로 부속지, 자갈밭처럼 명확한 지목을 붙이기 애매한 땅이 대부분 여기 속했다.

남대문로4가의 잡종지는 2필지, 2,766㎡였다. 필지당 평균 1,383㎡로, 대지보다는 확실히 작은 규모다. 번화한 시장 골목 사이사이 남아 있던 자투리 공간, 혹은 아직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완충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다. 잡종지는 그 이름처럼 애매한 땅이었기에, 오히려 훗날 도로가 넓어지거나 건물이 들어설 때 가장 먼저 손을 대는 땅이 되곤 했다. 지금 남대문로가 왕복 여러 차선의 큰길로 확장된 배경에도, 이런 자투리 국유지들이 조용히 자리를 내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5대지 vs 잡종지, 숫자로 보는 비교

대지9,418㎡ (77.3%)

잡종지2,766㎡ (22.7%)

숫자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격차가 확연하다. 대지는 잡종지보다 필지당 평균 면적이 두 배 이상 크고, 전체 면적에서도 세 배 이상을 차지한다. 이는 남대문로4가의 국유지 대부분이 실제로 건물을 짓고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땅'이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 자료 하나만으로도 1912년 당시 이 골목이 이미 상당히 개발된, 밀도 높은 시가지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논이나 밭 같은 농경지가 단 한 필지도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남대문로4가가 도심 한복판이었음을 웅변한다.

시리즈 기록 노트남대문로4가는 시리즈 내에서 보기 드물게 국유지 전 필지가 대지와 잡종지로만 구성된, 즉 농경지 지목이 단 한 건도 없는 사례다. 도심형 국유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표본으로 기록해 둔다.


6왜 하필 국유지였을까 — 토지조사사업의 이면

1912년 토지조사사업은 단순한 측량 작업이 아니었다. 소유 관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서류를 제때 갖추지 못한 땅은 대거 국유로 편입됐다. 관습적으로 마을이나 문중이 함께 쓰던 공유지, 궁방이나 관아에 속했던 옛 관유지도 이 과정에서 국가 소유로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대문로4가처럼 숭례문 바로 앞, 도성의 관문에 해당하는 자리는 조선시대에도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구역일 가능성이 높다. 성문 앞 광장, 관아의 부속 공간, 혹은 순찰과 통행을 위한 완충지대였을 수 있다. 이런 땅들이 근대적 토지 제도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국유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지 시기 토지 편입 구조 역시 이 시기 국유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겉으로는 하나의 표에 불과한 숫자지만, 그 이면에는 소유권을 둘러싼 시대의 격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토지조사사업은 단순한 행정 정비가 아니라 근대적 소유권 개념을 이식하는 사업이었다. 서류로 증명되지 않는 관습적 권리는 인정받기 어려웠고, 그 공백을 국가가 그대로 흡수했다. 남대문로4가의 다섯 필지 역시, 그 거대한 제도 전환의 한 단면으로 남게 된 셈이다.

그래서 이 숫자는 그저 옛 기록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소유였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국가가 새로 그은 선이었다. 11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선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7문화유산 지표조사와 이 기록이 만나는 지점

그렇다면 100년도 더 된 이 숫자가, 지금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답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있다. 땅에 삽을 대기 전, 그 부지의 과거 이력을 확인하는 절차가 지표조사이고, 이 지표조사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바로 1912년 토지조사부와 같은 근대 지적 기록이다.

지표조사는 문헌 검토와 현장 답사를 통해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가늠하는 첫 단계다. 그 다음이 표본조사, 이어서 시굴조사, 마지막이 본격적인 발굴조사다. 이 네 단계 중 그 무엇도, 과거 이 땅이 어떤 용도였고 누구의 소유였는지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

남대문로4가처럼 오랜 세월 국유지로 관리되어 온 도심 부지는, 지표 아래 조선시대 이전 층위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조사 기관과 시행사 모두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개발이나 재건축을 앞둔 사업 부지라면, 이런 기초 자료를 미리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향후 조사 일정과 비용을 훨씬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절차를 건너뛰면 어떻게 될까. 공사가 이미 시작된 뒤 지하에서 매장유산이 확인되면, 공사는 그 즉시 멈춰야 한다. 공정표는 무너지고, 인건비와 장비 임차 비용은 하루하루 그대로 손실로 쌓인다.

지표조사를 미리 거치지 않은 채 착공했다가, 한창 진행 중이던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유구가 나와 몇 달씩 공사가 중단된 사례는 서울 도심에서 결코 드물지 않다. 그 몇 달의 손실은, 애초에 하루 이틀이면 끝나는 지표조사 비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8발굴로 증명된 이야기 — 한양도성과 남대문 일대 사례

숫자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실제 사례를 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05년부터 도심 곳곳에서 발굴조사를 이어 왔고, 그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가 한양도성 성벽 구간이다. 평범해 보이던 도로 아래, 혹은 건물 터 아래에서 조선시대 성벽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 사례다.

동대문운동장 부지에서 발견된 이간수문과 하도감 유구, 백제 시기 도성으로 확인된 풍납토성, 그리고 2021년 인사동 한복판에서 쏟아져 나온 조선시대 금속활자까지. 이 모든 발견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겉으로는 이미 개발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도심 한복판에서, 지표 아래 전혀 다른 시간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는 것.

특히 인사동 사례는 상징적이다. 평범한 상업지구 재개발 부지였던 그곳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도자기, 유물 수백 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있었기에 이 유물들은 훼손 없이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지표조사 없이 그대로 굴착기가 들어갔다면, 이 발견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동대문운동장 부지 역시 마찬가지다. 운동장이라는, 문화유산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공간 아래에서 조선시대 수문과 훈련도감 하도감의 흔적이 통째로 드러났다. 이 발견은 이후 서울 도심 개발 사업에서 지표조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 사례로 남아 있다.

남대문로4가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600년 넘게 사람과 물자가 오간 성문 앞 자리라면, 오히려 다른 어떤 곳보다 그 아래 켜켜이 쌓인 시간의 층위가 두터울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서 재건축이나 신축이 예정되어 있다면, 지표조사를 통해 이 가능성을 먼저 짚어보는 것이 순서다.



9자주 묻는 질문

Q. 1912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4가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5필지, 12,185㎡였습니다.

Q.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대지는 3필지, 9,418㎡로 전체의 약 77.3%를 차지했습니다.

Q. 국유지 중 잡종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잡종지는 2필지, 2,766㎡로 전체의 약 22.7%였습니다.

Q. 대지와 잡종지의 면적 차이는 얼마나 되나요?

A. 대지가 잡종지보다 6,652㎡ 더 넓었으며, 필지당 평균 면적도 대지가 두 배 이상 컸습니다.

Q. 이 자료가 문화유산 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A.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기초 단계에서, 해당 부지의 과거 소유와 이용 이력을 확인하는 핵심 문헌 자료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10한 줄 결론

1912년 남대문로4가 국유지는 총 5필지 12,185㎡, 대지 3필지 9,418㎡와 잡종지 2필지 2,766㎡로 구성되어 있었다. 숭례문 앞 도심의 국유지는 오늘, 지표조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그 땅을 말하게 한다.

데이터 검증 노트


대지 9,418㎡ + 잡종지 2,766㎡ = 12,184㎡로, 제시된 전체 면적 12,185㎡와 1㎡ 차이가 확인된다. 이는 1912년 원자료가 평(坪) 단위로 기록된 뒤 ㎡로 환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상적인 반올림 오차로 판단되며, 원문의 숫자를 임의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병기한다.

서울 곳곳의 1912년 국유지 기록을 하나씩 되짚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동네의 잊힌 숫자를 꺼내 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토지조사부 기반)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2026.1.11. 시행)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의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문화유산 기초조사 참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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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년 전, 누군가 붓끝으로 눌러 쓴 숫자 다섯. 그 숫자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이 땅을 딛고 선 당신은, 그 아래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아느냐고. 대지 세 필지, 잡종지 두 필지. 사람이 살고, 사람이 오가던 자리. 지금 이 순간에도 남대문은 그 자리에 서 있고, 그 앞의 땅은 여전히 말이 없다. 다만 우리가, 그 침묵을 읽어낼 뿐이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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