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인사동 골목 옆, 939평 한 필지 대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편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인사동 골목 옆, 939평 한 필지 대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國有
垈地
1필지1912년 관훈동 국유지
3,104㎡총면적 (약 939평)
100%지목 대지(垈地)
AI 브리핑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는 국유지가 1필지, 총 3,104㎡ 있었습니다.
이 1필지의 지목은 대지였으며, 관훈동 국유지 3,104㎡는 모두 대지로 기록되었습니다.
약 939평 규모의 이 국유 대지는 한양 도성 중심부의 토지 이용을 보여주는 자료로, 문화유산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기초자료가 됩니다.
인사동에서 커피 한 잔 들고 걷던 그 골목.바로 그 발밑에 ‘나라 땅’ 939평이 숨어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솔직히 저도 처음엔 그냥 숫자인 줄 알았어요.
1필지. 3,104㎡. 대지. 딱 세 단어로 끝나는 기록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세 단어를 붙잡고 며칠을 들여다보니,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이건 그냥 땅 한 조각이 아니었어요.
조선 600년 수도의 한복판. 인사동과 안국동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동네. 그 안에 단 하나뿐인 국유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었죠.
왜 하필 한 필지일까요? 왜 논도 밭도 아닌 대지였을까요? 그리고 그 땅 밑에는 지금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요?
지금부터 그 질문을 하나씩 풀어볼게요. 끝까지 읽으시면, 다음에 인사동을 걸을 때 발걸음이 분명 달라질 거예요.
목차
단 한 필지, 939평이 던진 수수께끼
관훈동 역사, 이름 속에 숨은 두 동네
1912년 관훈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3,104㎡는 대체 어느 정도 크기일까?
왜 논도 밭도 아닌 ‘대지’였을까?
사대문 안 땅속, 600년의 지층
성공 사례, 바로 옆 인사동에서 터진 발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문화유산 조사
1912년 토지 기록이 조사기관에 주는 단서
문화유산 조사 관점에서 본 관훈동 국유지의 의미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01단 한 필지, 939평이 던진 수수께끼
1912년은 우리 땅의 운명이 크게 흔들리던 해였어요.
일제는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며 전국의 땅을 하나하나 재고, 번호를 붙이고, 주인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부가 바로 토지대장과 지적도예요.
이 기록은 아픈 역사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100여 년 전 서울의 땅 모습을 가장 촘촘하게 남긴 자료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죠.
그 장부 속 관훈동 페이지를 넘기면, 국유지 항목에는 딱 한 줄이 적혀 있어요. 대지 1필지, 3,104㎡.
다른 동네 기록을 보면 국유지가 임야, 논, 밭, 도로, 잡종지로 복잡하게 흩어진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관훈동은 달랐습니다. 깔끔하게 한 필지, 그것도 집터인 대지 하나뿐이었죠.
숫자가 단순할수록 오히려 궁금해지는 법이에요. 이 땅은 원래 무엇이었을까요? 그 단서를 찾으려면, 먼저 동네 이름부터 뜯어봐야 합니다.

02관훈동 역사, 이름 속에 숨은 두 동네
관훈동이라는 이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사실 두 개의 옛 지명이 합쳐진 이름이에요.
조선 초기에 이 일대는 한성부 중부에 속한 관인방이라는 행정구역 안에 있었습니다. 방(坊)은 지금으로 치면 동보다 조금 큰 단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이 안에는 ‘훈동’이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어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관리하던 관청, 충훈부가 있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집니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관인방의 ‘관’과 훈동의 ‘훈’을 따서 관훈동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어요. 이름 자체가 이 동네가 관청과 가까운 땅이었다는 힌트를 품고 있는 셈이죠.
지금의 관훈동은 어디일까?
지금 관훈동은 북쪽으로 안국동과 송현동, 동쪽으로 경운동, 남쪽으로 인사동, 서쪽으로 견지동과 맞닿아 있어요. 행정동으로는 종로1·2·3·4가동에 속합니다.
인사동길 북쪽 구간을 걸으셨다면, 이미 관훈동을 밟아보신 거예요. 쌈지길 주변과 화랑, 필방, 표구사가 이어지는 그 거리가 바로 이 동네의 얼굴이죠.
예쁜 골목, 감성 카페, 전통 공예 숍. 우리가 아는 관훈동은 그런 모습이에요. 하지만 그 아래에는 조선 관청 동네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031912년 관훈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국유지는 1필지 3,104㎡가 있었습니다. 지목은 대지였으며, 국유지 전체가 대지 1필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아주 명확해요. 관훈동 국유지는 필지 수도 하나, 지목도 하나입니다.
보통 국유지 통계를 만들면 지목별로 비율을 나누고 막대그래프를 그리는데, 관훈동은 그럴 필요조차 없었어요. 100%가 대지니까요.
구분 | 지목 | 필지 수 | 면적(㎡) | 면적(평) | 비율 |
국유지 | 대지(垈地) | 1 | 3,104 | 약 939 | 100% |
합계 | — | 1 | 3,104 | 약 939 | 100% |
표 설명: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국유지 현황. 대지 1필지 3,104㎡(약 939평)로 국유지 전체를 차지한다. 평 환산은 1평 = 3.3058㎡ 기준.
1912년 관훈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국유지 중 대지는 1필지 3,104㎡가 있었습니다.
이 문장이 오늘 글의 뼈대예요. 숫자는 짧지만, 이 짧은 기록이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043,104㎡는 대체 어느 정도 크기일까?
제곱미터로 말하면 감이 잘 안 오죠. 그래서 익숙한 것들과 나란히 놓아봤어요.
3,104㎡는 평으로 약 939평입니다. 요즘 30평대 아파트 한 채를 떠올려 보면, 그 바닥 면적의 서른 배쯤 되는 넓이예요.
농구장 하나가 대략 420㎡니까, 농구장 7개를 붙여놓고도 조금 남습니다. 국제 규격 축구장 7,140㎡와 비교하면 약 43% 정도 크기고요.
농구장
420㎡
관훈동 국유 대지
3,104㎡
축구장
7,140㎡
그래프 설명: 관훈동 국유 대지 3,104㎡를 농구장(약 420㎡), 국제 규격 축구장(약 7,140㎡)과 같은 축척으로 비교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하나. 이곳은 사대문 안, 그것도 조선의 심장부예요.
한양 도심의 대지는 대부분 잘게 쪼개진 민가 필지였어요. 몇십 평짜리 집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던 동네에서, 939평이 한 덩어리로 남아 있었다는 건 꽤 특별한 일입니다.
관훈동의 현재 전체 면적이 약 0.07㎢, 즉 7만㎡ 정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와닿아요. 경계가 1912년과 똑같지는 않지만, 참고로 비교하면 동네 면적의 4% 남짓을 한 필지가 차지하는 규모입니다.
05왜 논도 밭도 아닌 ‘대지’였을까?
토지대장에서 지목이 대지라는 건, 그 땅에 건물이 서 있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에요.
사대문 안 도심에 논밭이 거의 없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나라 소유의 큰 대지’라는 조합은 생각해볼 거리를 던집니다.
조선 관청 터였을 가능성
1910년대 국유지로 잡힌 도심 대지 중에는 대한제국과 조선시대 관청, 궁가, 관사가 있던 땅이 적지 않았어요. 갑오개혁 이후 없어진 관청들의 터가 그대로 국유 재산으로 넘어간 경우가 많았거든요.
앞에서 본 것처럼 관훈동은 이름부터 충훈부와 얽혀 있는 동네예요. 그렇다면 이 939평이 옛 관청 시설과 관련된 땅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을 분명히 그을게요.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지번과 옛 지도를 겹쳐 보고,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바로 그 확인 작업이, 이 시리즈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1912년 지적 기록은 “여기를 먼저 봐야 한다”고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지도 역할을 하거든요.

06사대문 안 땅속, 600년의 지층
서울 도심을 파 내려가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요. 정말이에요.
맨 위에는 아스팔트와 현대 건물 기초가 있고, 그 아래 일제강점기 벽돌 층, 다시 그 아래 조선 후기와 중기의 집터, 그리고 더 깊은 곳에 조선 전기 한양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화재가 나면 그 위에 흙을 덮고 다시 집을 지었고, 길을 넓히면 또 흙을 돋웠어요. 그래서 사대문 안은 말 그대로 시간의 시루떡 같은 땅이에요.
관훈동처럼 조선 초부터 사람이 살고 관청이 들어섰던 동네는 특히 층이 두껍고 복잡합니다. 기와 조각 하나, 주춧돌 하나가 몇백 년의 생활을 증언하죠.
그런데 이런 땅에 재개발이나 신축 공사가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포크레인 한 번에 그 기억이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법으로 정해두었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 전에는 반드시 땅속을 먼저 확인하라고요. 그 첫 단추가 바로 문화유산 지표조사입니다.

07성공 사례, 바로 옆 인사동에서 터진 발견
“에이, 설마 도심 땅 밑에 뭐가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셨다면, 이 이야기를 꼭 들어보세요.
2021년 6월, 관훈동과 이웃한 인사동 79번지 일대에서 전국이 들썩일 만한 소식이 나왔어요. 공평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를 발굴조사하던 중에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쏟아져 나온 겁니다.
도기 항아리 안에 활자가 가득 담겨 있었대요. 한자 활자가 약 1,000점, 한글 활자가 약 600점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훈민정음 창제 무렵인 15세기에만 쓰였던 동국정운식 표기를 반영한 한글 활자도 있었어요. 기록으로만 알던 것이 실물로 확인된 순간이었죠.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세종 시대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의 부품, 물시계 장치의 일부로 보이는 동제품, 총통 여러 점과 동종까지 함께 나왔습니다.
이 유물들이 나온 깊이는 지금 땅바닥에서 약 3m 아래,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층이었다고 해요. 우리가 매일 걷는 길 3m 아래에 세종의 시간이 잠들어 있었던 거예요.
이 발견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이 성공 사례의 핵심은 운이 아니었어요. 개발 전에 정해진 절차대로 조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발견이었습니다.
만약 조사 없이 바로 공사를 했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죠. 1,600여 점의 활자는 흙과 함께 트럭에 실려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인사동 79번지와 관훈동은 걸어서 몇 분 거리예요. 같은 한양 중심부, 같은 시간의 지층을 공유하는 땅이죠. 관훈동 국유 대지 939평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08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4단계 문화유산 조사
그럼 땅속 유산은 어떤 순서로 확인할까요? 크게 네 단계로 나뉘어요. 순서대로 깊어진다고 생각하시면 쉬워요.
STEP 1지표조사땅을 파지 않고 문헌, 옛 지도, 현장 답사로 유적 가능성을 살펴요.
STEP 2표본조사일부 지점을 골라 작게 파서 유구와 유물 흔적을 확인해요.
STEP 3시굴조사트렌치를 넣어 유적의 범위와 깊이, 성격을 파악해요.
STEP 4발굴조사유적이 확인된 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해요.
문화재 지표조사는 무엇을 보나요?
지표조사는 말 그대로 땅의 겉면에서 시작하는 조사예요. 삽을 대기 전에 기록부터 뒤지는 단계죠.
옛 문헌, 고지도, 지적 기록, 주변 발굴 사례를 모아서 이 땅에 유산이 묻혀 있을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자료가 가장 먼저 빛을 보는 곳이 바로 여기예요.
표본조사와 시굴조사는 어떻게 다른가요?
표본조사는 몇몇 지점을 골라 작게 파 보는 거예요. 유물이 나오는지 빠르게 확인하는 단계죠.
시굴조사는 조금 더 본격적이에요. 길쭉한 시굴 트렌치를 여러 줄 넣어서, 유적이 어디까지 퍼져 있고 얼마나 깊이 있는지 윤곽을 잡습니다.
발굴조사는 언제 하나요?
앞 단계에서 유적이 확인되면 마지막으로 발굴조사를 해요. 층위를 한 겹씩 걷어내며 모든 것을 기록하고, 중요한 유구는 보존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절차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진행돼요. 예전에는 ‘매장문화재’, ‘문화재 발굴’이라고 많이 불렀지만, 지금은 ‘매장유산’, ‘국가유산’이라는 용어로 바뀌었습니다.
조사는 아무나 할 수 없고, 법에 따라 등록된 매장유산 조사기관, 흔히 문화재 발굴 기관이라고 부르는 전문 기관이 맡아요. 인사동 금속활자를 찾아낸 곳도 바로 이런 조사기관이었습니다.
091912년 토지 기록이 조사기관에 주는 단서
그렇다면 관훈동 국유지 1필지라는 기록은 실제 조사에서 어떻게 쓰일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 볼게요.
단서 하나, 위치를 좁혀준다
1912년 지번을 현재 지번과 맞대어 보면, 그 939평이 오늘날 어느 건물, 어느 골목 아래에 있는지 추적할 수 있어요. 막연한 ‘관훈동 일대’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점이 생기는 거죠.
단서 둘, 땅의 성격을 알려준다
대지라는 지목은 그곳에 건물이 있었다는 신호예요. 그것도 국유였다면, 일반 민가와는 다른 공공 시설이었을 가능성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조사 계획을 세울 때 어떤 유구를 기대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는 거예요.
단서 셋, 변화의 출발점을 남긴다
1912년 이후 이 땅이 언제 쪼개지고, 언제 팔리고, 언제 어떤 건물이 들어섰는지 따라가다 보면 땅속이 얼마나 훼손되었을지도 짐작할 수 있어요. 지하층이 깊은 건물이 들어섰다면 유적이 사라졌을 수 있고, 낮은 건물만 있었다면 오히려 잘 남아 있을 수도 있죠.
이렇게 종이 한 장의 기록이, 수십억 원짜리 공사의 조사 범위와 일정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기초조사가 괜히 ‘기초’라고 불리는 게 아니에요.

10문화유산 조사 관점에서 본 관훈동 국유지의 의미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볼게요. 왜 이 한 필지가 중요할까요?
첫째, 관훈동은 한양 도성 한가운데, 조선 전기부터 관청과 사람이 모여 살던 땅이에요. 땅속에 유산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서울에서도 손꼽히게 높은 곳입니다.
둘째, 바로 옆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라는 역대급 발견이 나왔어요. 같은 지층을 공유하는 이웃 동네라는 사실만으로도 관훈동은 조사의 우선순위가 올라갑니다.
셋째, 939평이라는 덩어리 땅이 국유 대지로 남아 있었다는 점은, 이곳이 평범한 민가 터와는 다른 역사를 가졌을 수 있다는 신호예요.
그래서 관훈동에서 개발이나 신축이 계획된다면, 문화유산 지표조사 단계부터 1912년 토지 기록을 반드시 함께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 기록이 표본조사와 시굴조사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하다면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주니까요.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관훈동 국유지는 대지 1필지 3,104㎡였으며, 이 기록은 한양 중심부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이 됩니다.
검증 노트
입력 자료의 총계(1필지 3,104㎡)와 지목별 내역(대지 1필지 3,104㎡)이 일치함을 확인했습니다.
평 환산값은 3,104 ÷ 3.3058 = 938.96으로, 약 939평으로 표기했습니다.
면적 비교는 농구장 약 420㎡, 국제 규격 축구장 약 7,140㎡를 기준으로 계산했습니다(각각 약 7.4배, 약 43.5%).
관훈동 현재 면적(약 0.07㎢)은 참고용이며, 1912년 당시 경계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관청 터 관련 내용은 지명 유래에 근거한 가설이며, 지번 대조와 현장 조사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시리즈 기록 노트
단일 필지형: 관훈동 국유지는 1필지로만 구성되었습니다.
단일 지목형: 국유지 100%가 대지로, 사대문 안 도심형 국유지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인접 발굴 사례: 이웃한 인사동 79번지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출토되어, 시리즈 중 주변 성공 사례와 가장 가까운 동네 가운데 하나로 기록합니다.
11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필지였습니다.
1912년 관훈동 국유지의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총 3,104㎡, 약 939평이었습니다.
1912년 관훈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1필지 3,104㎡로, 국유지 전체가 대지였습니다.
관훈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관인방의 ‘관’과 충훈부가 있던 훈동의 ‘훈’을 합친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이 자료가 문화유산 지표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1912년 지번과 지목은 땅의 옛 위치와 성격을 알려주어, 지표조사 이후 표본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범위를 정하는 기초자료가 됩니다.
한 줄 결론 · 1912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국유지는 대지 1필지 3,104㎡(약 939평)였으며, 한양 도성 중심부의 문화유산 조사를 위한 중요한 기초자료입니다.
관훈동, 인사동 일대의 문화유산 조사가 궁금하신가요?
지표조사부터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 1912년 기록으로 시작하는 서울 문화유산 이야기를 계속 만나보세요.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의 국유지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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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골목을 걷는 당신의 발밑,그 아래 3미터쯤에누군가의 아침이 묻혀 있습니다.
장부에 남은 건 고작 한 줄.대지, 한 필지, 삼천백사 제곱미터.
하지만 그 한 줄을 붙잡고 내려가면관청 마당을 쓸던 비질 소리,활자를 고르던 손끝의 떨림이아직 거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땅을 먼저 읽는 이유는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다음 세대가 같은 골목에서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편 · 관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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