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의금부 터에 남은 대지 1필지, 7,130㎡의 기록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편
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의금부 터에 남은 대지 1필지, 7,130㎡의 기록
문화유산 지표조사 · 표본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
국유지 1필지면적 7,130㎡지목 대지1912년 토지조사사업
제목 후보 ①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의금부 터의 대지 기록 ②1912년 공평동 국유지 현황: 대지 1필지 7,130㎡의 비밀 ③서울 한복판, 공평동 땅속엔 무엇이 있었나: 1912년 국유지 정리 ④600년 역사가 잠든 공평동, 1912년 토지 기록으로 다시 읽다 ⑤공평동 국유지 7,130㎡는 왜 문화유산 조사의 출발점인가
서울 한복판, 26층 빌딩 지하 4미터 아래에서
600년 전 골목길이 그대로 나왔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종로 한복판, 스타벅스와 은행 본점이 늘어선 그 거리 밑에 조선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겹겹이 쌓인 시간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그 동네 이름이 바로 공평동이다.
그리고 그 공평동의 출발점에는 아주 단순한 숫자 하나가 있다. 1912년, 국유지 1필지, 면적 7,130㎡, 지목은 대지. 이 짧은 세 줄이 왜 100년 넘게 이어질 발굴의 실마리가 되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본다.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는 국유지 1필지, 총 7,130㎡가 등록되어 있었다.
지목은 전부 대지였으며, 이는 당시 이 일대가 이미 건물과 생활 터전으로 쓰이던 시가지였음을 보여준다.
공평동은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자리로, 실제로 2015년 이 땅 밑에서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108개 동에 이르는 건물지가 발굴되며 전국적 화제가 되었다.
목차
1912년 공평동 국유지, 정확히 얼마나 있었을까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공평(公平)이라는 두 글자의 유래
대지 1필지 7,130㎡가 말해주는 것 — 토지조사사업 데이터로 읽기
조선의 심장부, 견평방이었던 공평동의 진짜 얼굴
2015년, 빌딩 아래에서 벌어진 실화 — 공평동 도시유적전시관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이 땅에 삽을 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4단계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1912년 공평동 국유지, 정확히 얼마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답은 명확하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 등록된 국유지는 단 1필지, 면적으로는 7,130㎡였다. 축구장 절반보다 조금 못 미치는 크기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국유지가 1필지밖에 없었다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동네 아니었나?" 오히려 정반대다. 필지 수가 적다는 건 그만큼 이 땅이 나뉘지 않고 하나의 통으로, 오랫동안 특정 목적을 위해 관리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특정 목적이란, 바로 조선을 지탱하던 사법 기관, 의금부였다.
구분 | 필지 수 | 면적 | 지목 |
공평동 국유지 전체 | 1필지 | 7,130㎡ | 대지 |
대지 비율 | 100% | 7,130㎡ | - |
1
필지 수
7,130㎡
국유지 총면적
100%
대지 비율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공평동 국유지는 대지 1필지 7,130㎡가 전부였고, 지목 100%가 대지였다. 논도 밭도 아닌, 처음부터 사람이 살고 일하던 땅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자체를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토지를 필지 단위로 나누고 소유자, 지목, 면적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지금 우리가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듯, 그 시절 처음으로 땅에 '주민등록번호' 같은 고유 번호가 매겨진 셈이다. 그런데 이 조사에는 명암이 함께 있다. 조선의 전통적인 토지 소유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된 측면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토지가 국유지로 분류되기도 했다. 공평동의 국유지 1필지 역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록된 기록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좋든 싫든, 이 시기의 토지 기록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되고 체계적인 근대 지적 자료다. 우리가 오늘날 어느 골목 밑에 유적이 있을지 가늠할 때, 가장 먼저 펼쳐보는 문서가 바로 이 1912년 토지대장이다. 100년도 더 된 숫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문화유산 조사를 위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2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공평(公平)이라는 두 글자의 유래
공평동이라는 이름, 곱씹어보면 좀 이상하다. 서울에 이렇게 대놓고 '정의롭다'는 뜻을 담은 동네 이름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여러 동네를 하나로 합치면서 붙여졌다. 일제가 여러 마을을 통합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로, 관할 구역에 있던 의금부가 일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데 착안해 붙인 이름이다.
즉 공평동이라는 이름 자체가 의금부, 조선시대 최고 사법기관의 흔적이다. 죄인을 심문하고 형벌을 논하던 그 엄중한 자리가, 아이러니하게도 '공평하다'는 온화한 이름으로 남게 된 셈이다. 지금도 공평동 어딘가에는 의금부 터를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서 있다. 매일 그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발밑 몇 미터 아래 조선의 법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등록된 국유지 1필지 7,130㎡ 역시, 바로 이 의금부와 관청 부지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국가가 소유한 땅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곳이 개인 소유의 농경지가 아니라 관청이나 공공 목적의 시설이 있던 자리였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3대지 1필지 7,130㎡가 말해주는 것 — 토지조사사업 데이터로 읽기
1912년의 토지조사사업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었다. 조선 전역의 땅을 필지 단위로 쪼개고, 소유자를 확정하고, 지목을 매기는 대규모 조사였다. 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100여 년 전 종이 위에 적힌 숫자 하나가, 오늘날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매장 문화재를 찾는 첫 번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공평동의 경우 국유지가 대지 1필지 7,130㎡로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히 흥미롭다. 다른 동네처럼 논, 밭, 임야가 섞여 있지 않고 오직 대지 하나뿐이다. 이는 이 땅이 처음부터 끝까지 '건물이 서 있던 자리'였다는 뜻이며, 동시에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단절 없이 사람이 살고 일한 공간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100여 년 뒤, 이 추정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 일대 지하에서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무려 네 개의 시대층이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점이 있다. 필지 하나, 면적 하나짜리 단순한 표를 보고 "겨우 이 정도 정보로 뭘 알 수 있나"라고 넘기기 쉽다. 하지만 문화유산 조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지목이 대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 면적이 7,130㎡로 꽤 넓은 편이라는 것. 이 세 가지 단서만으로도 "이곳은 오랫동안 특정 기관이 독점적으로 사용한 공공 시설 부지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실제 조사 현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토지대장 한 줄, 지적도 한 장에서 시작해 몇 년에 걸친 발굴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4조선의 심장부, 견평방이었던 공평동의 진짜 얼굴
조선시대 이 일대는 견평방이라 불렸다. 견평방은 조선 최고의 번화가이자 시전 중심지였으며, 왕실과 관련된 가옥들도 자리했던 지역이었다. 쉽게 말해 지금의 광화문, 종로 상권을 합쳐놓은 것 같은, 조선 500년 내내 사람과 돈과 권력이 오가던 진짜 도심이었다.
그런 땅이었기에 이곳의 지층은 단순하지 않다. 한 겹만 걷어내도 다음 시대가, 또 그 아래에는 또 다른 시대가 나온다. 실제 발굴 결과 현재 지표면에서 4미터 아래부터 조선시대 초기 모습에서 일제강점기 건물까지 차곡차곡 쌓인 대규모 도시 유적이 확인되었다. 시기별로 구분되는 네 개의 문화층에서는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건물지 108개 동과 골목길, 그리고 조선백자를 포함한 1,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쯤에서 소름이 돋지 않는가.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종로의 보도블록, 그 몇 미터 아래에 이렇게 방대한 시간의 지층이 눌려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겨우 종이 한 장에 적힌 국유지 1필지 7,130㎡라는 기록이었다는 사실이.
52015년, 빌딩 아래에서 벌어진 실화 — 공평동 도시유적전시관
여기서 정말 극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2015년, 낡은 건물을 허물고 26층짜리 최신 오피스 빌딩 센트로폴리스를 세우려던 공평동 도심재개발 현장. 이곳에서 진행된 발굴조사가 완료된 시점부터 서울역사박물관이 전 과정을 주도해, 108개 동에 달하는 건물지와 골목길, 1,000점이 넘는 생활유물을 원 위치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보통이라면 유적은 기록만 남기고 철거된 뒤 그 위에 새 건물이 올라간다. 하지만 공평동은 달랐다. 공평동 일대 개발 과정에서 만든 이 원칙, 즉 매장 문화재를 최대한 원래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는 방식이 이곳에서 처음 적용되었고, 이후 '공평동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연면적 3,817㎡ 규모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3년의 준비 끝에 문을 열었고, 이는 서울에서 가장 큰 유적전시관이 되었다.
더 놀라운 건 관람 방식이다. 투명한 유리 바닥 위를 걸으며 발아래 펼쳐지는 옛 건물터와 골목길을 내려다볼 수 있고, 실제로 약 42미터 길이의 옛 골목길을 직접 걸어볼 수도 있다. 재개발과 보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지금도 문화유산 업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케이스다. 개발 이익과 역사적 가치가 충돌할 때, 답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공평동이 몸소 증명한 셈이다.

6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이 땅에 삽을 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4단계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공평동처럼 극적인 발견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과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라, 땅을 파기 전 반드시 정해진 절차를 밟도록 하고 있다.
순서는 이렇다. 먼저 지표조사, 문헌과 지표면 관찰만으로 이 땅에 유산이 있을 가능성을 가늠하는 단계다. 그다음 표본조사, 일부 구간을 시범적으로 파보며 실제 유물 존재 가능성을 확인한다. 여기서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로 넘어가 더 넓은 범위를 조사하고,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 전체를 드러낸다.
재미있는 건 이 네 단계가 그냥 형식적인 요식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단계마다 조사 범위와 투입되는 인력, 기간이 완전히 다르다. 지표조사는 며칠 안에 끝날 수도 있지만, 발굴조사는 공평동 사례처럼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개발업자 입장에서는 이 절차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 절차 덕분에 굴착기가 먼저 들어가 유적을 뭉개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공평동처럼 개발과 보존이 함께 성공한 사례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4단계 절차가 촘촘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만약 1912년의 이 국유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만약 지표조사 단계에서 누군가 "여긴 그냥 평범한 도심 대지"라고 대충 넘겨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108개 동의 건물지도, 1,000점이 넘는 유물도, 조선백자도 전부 굴착기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과 전국 곳곳에서 재개발과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그 땅 밑에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우리는 미리 알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이런 기초 조사 자료를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는 것.
공평동 국유지 1필지 7,130㎡라는 짧은 기록이, 결국 100년 뒤 600년 역사를 통째로 살려낸 셈이다. 숫자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이 사례만큼 잘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7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필지였습니다.
공평동 국유지의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총 7,130㎡였습니다.
공평동 국유지의 지목은 무엇이었나요?
지목 100%가 대지였습니다.
공평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이 지역에 있던 의금부가 일을 공평하게 처리했다는 데서 착안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공평동 국유지 기록이 문화유산 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기록이 있었기에 이후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 2015년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지는 108개 동 건물지와 1,00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개관으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8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종로구 공평동 국유지는 대지 1필지 7,130㎡가 전부였으며, 이 짧은 기록이 훗날 108개 동 건물지와 1,000여 점 유물이 발굴된 공평동 도시유적전시관으로 이어졌다.
이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종로구 공평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향후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 검증 노트
국유지 1필지, 면적 7,130㎡, 지목 대지 100% — 입력 자료와 일치하며 별도 산술 오차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공평동 유적 관련 통계(108개 동 건물지, 1,000여 점 유물, 문화층 4개, 전시관 연면적 3,817㎡)는 서울역사박물관 및 국가유산청 공개 자료를 근거로 인용했으며, 1912년 국유지 기록과는 별개의 후대 발굴조사 성과임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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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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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록 밑, 아무도 모르게 눌려 있던 골목 하나
누군가 남긴 종이 한 장이 그 골목을 다시 불러냈다
100년 전의 숫자가, 100년 후의 우리에게
"여기, 잊지 말아 달라"고 속삭인다
공평동, 이름처럼 공평하게
지나간 시간에게도 자리를 내어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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