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청계천의 물살을 지켜보던 준천사, 그 자리에 남은 국유지 한 필지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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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종로구 편 · 국유지 심층편
1912년 서울 종로구 관수동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청계천의 물살을 지켜보던 준천사, 그 자리에 남은 국유지 한 필지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필지1,114㎡대지 100%준천사 옛터
제목 ①1912년 서울 종로구 관수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대지 1,114㎡의 기록 ②청계천의 물살을 지켜보던 준천사, 그 자리에 남은 국유지 한 필지 ③1912년 관수동 국유지 1필지, 관수교 이름의 유래를 따라 ④청계천 유수를 관망하던 마을, 관수동의 작은 국유지 기록 ⑤1912년 관수동 국유지 대지 현황
청계천의 물살을 지켜보며 준설을 담당하던 관청이,
이 마을 이름의 뿌리가 되었다.
관수동. 이 이름은 1914년 동명 제정 시 청계천 옆에 있으므로 청계천의 유수(流水)를 관망(觀望)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더 구체적으로는 융희 4년(1910년) 청계천 위에 가설한 '관수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청계천의 준설 사업을 담당하던 상설 기관 '준천사(濬川司)'가 지금의 관수동 152·153번지 일대에 있어, 이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조정의 하급관리인 역관·의원·일관·화공과 이들과 연결된 상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이기도 했다. 청계천의 물살을 지켜보던 이 자리, 1912년 이 조사 시점 국유지 기록을 열어보면 단 1필지, 1,114㎡가 전부였다. 이 작은 기록을 지금부터 풀어본다.
핵심 요약
1912년 종로구 관수동의 국유지는 총 1필지, 1,114㎡였다.
이 1필지는 전부 대지(垈)로, 국유지 전체 면적의 100%를 차지했다.
목차
1912년 관수동 국유지, 단 1필지의 기록
대지 1필지, 1,114㎡ — 100%
준천사에서 관수교, 그리고 관수동까지
자주 묻는 질문
한 줄 결론
11912년 관수동 국유지, 단 1필지의 기록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관수동의 국유지는 단 1필지, 면적으로는 1,114㎡였다.
지목 | 국유지 필지 수 | 국유지 면적 | 비율 |
대지 | 1필지 | 1,114㎡ | 100% |
1필지
전체 국유지 필지 수
1,114㎡
전체 국유지 면적
100%
대지가 차지하는 비율
대지 1필지 1,114㎡는 전체 국유지 필지 수·면적과 정확히 일치하며, 오차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2대지 1필지, 1,114㎡ — 100%
관수동의 국유지는 밭도, 논도, 임야도 아닌 오직 대지 1필지뿐이었다. 청계천 준설을 담당하던 준천사가 있던 이 일대는, 관청 부지 성격의 작은 국유 대지 한 필지만을 남기고 있었다.

3준천사에서 관수교, 그리고 관수동까지
조선 태조 5년(1396)
한성부 중부 장통방(長通坊)에 속함
조선시대
청계천 준설을 담당하던 준천사가 지금의 관수동 152·153번지 일대에 설치, 수위 관측
융희 4년(1910)
청계천 위에 '관수교' 가설
1912년
이 토지조사 시점 — 국유지 1필지, 전부 대지
1914년
청계천의 유수를 관망한다는 뜻에서 '관수동' 명명
1958년
인근 수표교, 청계천 복개공사로 장충단공원으로 이전
청계천의 물살을 지켜보며 준설을 담당하던 관청 하나가 마을 전체의 이름으로 남은 이 자리는, 1912년 이 조사 시점 단 1필지의 국유 대지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작은 기록이지만, 청계천과 함께해온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이 오래된 토지 기록이 앞으로 이 일대의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도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4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종로구 관수동의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단 1필지, 1,114㎡였습니다.
관수동 국유지는 어떤 지목이었나요?
전부 대지(垈)로, 국유지 면적의 100%를 차지했습니다.
관수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청계천 위에 놓인 '관수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청계천 준설을 담당하던 준천사가 이곳에서 수위를 관측한 데서 유래했습니다.
준천사는 어떤 기관이었나요?
청계천의 준설(바닥을 파내는 작업) 사업을 담당하던 조선시대의 상설 관청이었습니다.
관수동은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나요?
조정의 하급관리인 역관·의원·일관·화공과 이들과 연결된 상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습니다.

5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종로구 관수동의 국유지는 단 1필지 1,114㎡로, 전부 대지였다. 이 동네는 청계천의 유수를 관망한다는 뜻과, 청계천 위에 놓인 '관수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청계천 준설을 담당하던 준천사가 있던 자리였다.

이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문화유산 기초조사 자료입니다. 향후 지표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데이터 검증 노트
대지 1필지 1,114㎡는 전체 국유지 필지 수·면적과 정확히 일치하며, 오차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관수동·준천사·관수교 관련 역사 정보는 종로구청 공식 자료(종로문화플랫폼), 나무위키, 서울사랑(서울시 시정간행물) 공개 자료를 근거로 인용했으며, 1912년 토지조사 수치와는 별개의 역사적 배경 설명임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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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현황 자료 ·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국유지 ·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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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물살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 작은 관청 하나가
마을 전체의 이름을 오래도록 품게 되었다
역관과 의원, 화공들이 이 골목을 오가며 살아가는 동안
준천사의 관리들은 해마다 강바닥을 파내며 물길을 살폈다
관수교라는 다리도 준천사라는 이름도 이제는 낯설지만
이 작은 국유지 한 뙈기가 그 물빛의 기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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