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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국유지는 몇 필지였을까? 왕실 얼음창고 곁, 무덤의 땅 다섯 필지의 기록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 7월 13일
  • 7분 분량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용산구 편

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

왕실 얼음창고 곁, 무덤의 땅 다섯 필지의 기록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국유지 12필지총 58,387㎡분묘지 29.8%지목 4종


핵심 요약

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는 국유지 12필지, 총 58,387㎡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밭이 5필지 26,343㎡로 가장 넓었고, 분묘지 5필지 17,381㎡, 잡종지 1필지 11,722㎡, 대지 1필지 2,938㎡ 순이었습니다. 특히 무덤의 땅인 분묘지가 국유지의 약 29.8%를 차지해, 조선왕실 제사용 얼음창고였던 동빙고의 역사와 맞닿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이 동네 국유지의 3분의 1은, 무덤이었습니다.

장부를 열자 낯선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분묘지.

논도 밭도 대지도 아닌, 무덤의 땅.이 시리즈에서 좀처럼 주역으로 등장하지 않던 지목이 동빙고동에서는 5필지 17,381㎡, 국유지의 29.8%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의 이름을 다시 봐주세요.동빙고동.조선왕실의 얼음창고, 동빙고가 있던 마을입니다.

동빙고의 얼음은 아무 데나 쓰이지 않았습니다.오직 한 가지 용도, 종묘와 사직의 제사.조상을 모시는 가장 신성한 의례를 위해서만 꺼내던 얼음이었습니다.

제사를 위한 얼음이 잠들던 언덕과, 조상들이 잠든 무덤의 땅.

우연이라기엔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이 조합.1912년의 장부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일이 이 동네의 오래된 정체성이었음을 숫자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얼음과 무덤, 그리고 밭.열두 필지에 새겨진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겠습니다.


목차

1.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 얼마나 있었나요?

2.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3.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4. 분묘지라는 지목은 왜 특별한가요?

5. 잡종지와 대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6. 동빙고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7. 왕실 얼음창고 동빙고, 이 언덕의 역사는 어땠나요?

8. 지목별 현황표와 데이터 검증 노트

9.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10.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와 시리즈 기록 비교

11.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 얼마나 있었나요?

답부터 명확하게 정리하겠습니다.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국유지는 총 12필지, 58,387㎡였습니다.

58,387㎡는 평으로 환산하면 약 17,662평.축구장 8.2개에 해당하는 넓이입니다.

지목 구성이 눈길을 끕니다.밭, 분묘지, 잡종지, 대지.네 가지 지목이 등장하는데, 정작 강변 동네에서 흔한 논은 한 필지도 없습니다.

직전에 다룬 두 동네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합니다.삼전동은 잡종지 하나, 양화동은 밭 하나.단일 지목으로 수렴하던 한강변 동네들과 달리, 동빙고동은 네 가지 지목이 어우러진 입체적인 구성을 보여줍니다.

강가이면서도 언덕이 있고, 밭이 있으면서도 무덤과 집터가 공존하던 동네.지목의 다양성은 곧 지형과 삶의 다양성이었습니다.


2.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지목부터 보겠습니다.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밭은 5필지, 26,343㎡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45.1%.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면적이 밭이었습니다.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5,269㎡.양화동의 거대한 단일 필지에 비하면 아담하지만, 축구장 4분의 3 크기의 밭이 다섯 곳에 나뉘어 있었던 셈입니다.

동빙고동은 한강 북안의 완만한 구릉지대입니다.강을 등지고 언덕을 오르는 비탈에는 물을 가두는 논보다 물이 잘 빠지는 밭이 어울렸습니다.

왕실 얼음창고에서 일하던 빙부들과 나루 언저리 주민들의 살림을 받쳐주던 채마밭.다섯 필지의 밭은 그런 생활의 기반이었을 것입니다.


3.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이번 편의 주인공입니다.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5필지, 17,381㎡였습니다.

전체 국유지의 29.8%.국유지 세 평 중 한 평 가까이가 무덤의 땅이었습니다.

필지 수로 보면 밭과 똑같이 5필지.산 사람의 밭과 죽은 사람의 무덤이 정확히 같은 수의 필지로 장부에 나란히 올라 있는 풍경입니다.

분묘지 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3,476㎡.개인 묘 한두 기가 아니라, 여러 무덤이 모인 묘역 단위의 규모입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풍수에서 말하는 배산임수의 명당 조건을 갖춘 이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크고 작은 묘역이 자리 잡았고, 주인이 끊기거나 나라가 관리하던 묘역들이 국유 분묘지로 장부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4. 분묘지라는 지목은 왜 특별한가요?

분묘지는 말 그대로 무덤이 있는 땅을 가리키는 지목입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의 지목 체계에서 분묘지는 독립된 항목으로 분류됐습니다.세금을 매기기 위한 장부에 무덤의 땅을 따로 구분해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조상의 묘를 둘러싼 권리가 당시 사회에서 무겁게 다뤄졌다는 뜻입니다.

조선 사회에서 묘지는 단순한 땅이 아니었습니다.묘를 쓸 자리를 둘러싼 산송, 즉 묘지 소송은 조선 후기 민사 분쟁의 대명사였을 만큼 치열했습니다.

문화유산 조사의 눈으로 보면 분묘지의 가치는 더 커집니다.

분묘지는 한 번 조성되면 수백 년간 파헤쳐지지 않는 땅입니다.경작으로 갈아엎어지지도, 건축으로 파괴되지도 않은 채 지표 아래의 시간이 고스란히 봉인됩니다.

묘역 자체가 유구이기도 합니다.봉분, 상석, 문인석 같은 석물, 회곽묘의 구조, 부장품까지.분묘지 한 필지는 그 자체로 작은 박물관이 될 수 있습니다.

1912년 장부의 분묘지 5필지는 그래서 오늘의 조사자에게 보물지도의 표시와 같습니다.


5. 잡종지와 대지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남은 두 지목도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잡종지는 1필지 11,722㎡.전체의 20.1%를 차지하는, 단일 필지로는 동빙고동에서 가장 큰 땅입니다.

삼전동 편에서 살펴봤듯 잡종지는 어느 지목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다목적의 땅입니다.한강변이라는 입지, 그리고 축구장 1.6개가 넘는 규모를 생각하면 강변의 모래벌이나 나루 관련 부지, 혹은 옛 관영 시설의 터였을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동빙고 창고 건물이 있던 자리와 그 부속 마당이 국유 잡종지로 정리됐을 가능성도 흥미로운 가설입니다.동빙고는 1896년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능을 잃었고, 1912년이면 창고 터가 빈 땅으로 남아 있었을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대지는 1필지 2,938㎡.전체의 5.0%로 가장 작지만, 건물이 들어서 있던 집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관사나 창고지기의 거처, 혹은 관영 시설의 부속 건물 터였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네 지목을 한 줄로 이으면 이렇게 읽힙니다.언덕의 무덤, 비탈의 밭, 강가의 벌판, 그리고 그 사이의 집 한 채.



6. 동빙고동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동빙고(東氷庫)는 글자 그대로 동쪽의 얼음창고라는 뜻입니다.

조선은 건국 직후인 1396년, 태조 때 한강가에 두 개의 국영 얼음창고를 세웠습니다.둔지산 기슭의 서빙고, 그리고 두모포 곧 지금의 옥수동에 자리한 동빙고였습니다.

동빙고가 지금의 동빙고동으로 옮겨온 것은 1504년, 연산군 때의 일입니다.원래 자리가 사냥터에 포함되자 창고를 통째로 한강 하류 쪽으로 이전시킨 것입니다.

이후 약 400년간 이 언덕에는 왕실의 얼음이 잠들었고, 1896년 제도가 사라진 뒤에도 마을 이름에는 얼음창고가 남았습니다.

1912년 당시 이 땅의 행정구역은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였습니다.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어 동빙고정이 되었고, 1943년 용산구 신설을 거쳐 1946년 지금의 동빙고동이 되었습니다.

본 시리즈는 검색 편의를 위해 현재 행정구역인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표기하되, 당시 소속을 이렇게 본문에 투명하게 밝혀둡니다.


7. 왕실 얼음창고 동빙고, 이 언덕의 역사는 어땠나요?

조선의 국영 빙고는 네 곳이었습니다.동빙고, 서빙고, 그리고 궁궐 안의 내빙고 두 곳.

규모로는 동빙고가 가장 작았습니다.저장량 10,244정, 무게로 약 192톤.13만 정을 넘게 쌓던 이웃 서빙고의 12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양입니다.

그러나 격으로는 동빙고가 으뜸이었습니다.동빙고의 얼음은 오직 국가 제사, 곧 종묘와 사직의 제향에만 쓰였기 때문입니다.

한겨울 새벽, 한강이 네 치 두께로 얼면 채빙이 시작됐습니다.얼음을 뜨기 전에는 추위의 신에게 사한제라는 제사부터 올렸습니다.얼음 한 덩이를 뜨는 일조차 의례로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갈무리된 얼음은 봄부터 가을 상강까지, 조상의 신위 앞에 오르는 제수를 신선하게 지키는 데 쓰였습니다.

얼음으로 조상을 모시던 언덕에, 조상들이 잠든 분묘지가 국유지의 3할.1912년 동빙고동의 지목 구성은 이 동네가 수백 년간 맡아온 역할, 즉 기억하고 모시는 일의 지리적 각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8. 지목별 현황표와 데이터 검증 노트

숫자를 표로 정리하겠습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5필지

26,343㎡

45.1%

분묘지

5필지

17,381㎡

29.8%

잡종지

1필지

11,722㎡

20.1%

대지

1필지

2,938㎡

5.0%

전체 국유지 합계

12필지

58,387㎡

100.0%

표 각주: 지목별 필지 수 합계(5+5+1+1=12필지)는 총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목별 면적 합계는 58,384㎡로 총계 58,387㎡와 3㎡의 차이가 있으며, 이는 1912년 조사 당시 평 단위 기록을 지목별로 ㎡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반올림 오차로 판단되어 원자료의 총계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1912년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였으며, 본 글은 현재 행정구역(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을 기준으로 표기했습니다.

지목별 면적 비중

밭 45.1%

분묘지 29.8%

잡종지 20.1%

대지 5.0%

이미지 설명: 위 표와 그래프는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현황을 정리한 것으로, 밭 5필지 26,343㎡, 분묘지 5필지 17,381㎡, 잡종지 1필지 11,722㎡, 대지 1필지 2,938㎡의 구성을 보여줍니다.


9. 이 기록이 문화유산 지표조사·발굴조사에 왜 중요한가요?

현행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은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에 앞서 매장유산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절차는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표본조사, 시굴조사를 거쳐 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땅을 파지 않는 문헌 검토에서 출발해, 확인의 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가는 구조입니다.

동빙고동의 1912년 기록은 이 첫 단계에서 세 가지 강력한 신호를 보냅니다.

첫째, 분묘지 5필지 17,381㎡의 존재입니다.옛 분묘지는 조선시대 회곽묘와 석물, 부장품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은 지점입니다.해당 위치에서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시굴조사 이상의 정밀한 확인이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근거가 됩니다.

둘째, 동빙고라는 관영 시설의 터입니다.동빙고와 서빙고는 목조 건물이라 지상에는 흔적이 남지 않았지만, 땅속에는 기초와 배수시설, 저장 구덩이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잡종지와 대지 필지의 위치는 그 터를 추적하는 단서가 됩니다.

셋째, 밭 5필지의 보존 환경입니다.깊은 교란 없이 경작만 이어진 땅은 그 아래 층위가 온전할 확률이 높아, 조사 우선순위 판단의 중요한 참고가 됩니다.

문화재 발굴, 문화재 지표조사를 준비하는 분들께 1912년 지목 기록이 필수 문헌인 이유입니다.



10. 실제 발굴조사 성공 사례와 시리즈 기록 비교

옛 분묘지 기록이 발굴로 이어진 사례는 서울 곳곳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은평뉴타운입니다.2000년대 개발에 앞선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분묘 수천 기가 확인되며, 서울 서북부가 한양 도성 밖 최대의 공동묘역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회곽묘의 구조, 복식, 묘지명이 쏟아져 나오면서 조선 사람들의 장례 문화를 통째로 복원하는 학술적 보고가 되었습니다.

정비 이전의 문헌 검토에서 옛 묘역 기록을 확인하고 조사 범위를 넓게 잡았기에 가능했던 성과였습니다.

얼음창고 쪽에서도 발굴의 전례가 있습니다.경주 월성 곁의 석빙고를 비롯해 전국의 옛 빙고 유적들이 조사를 통해 보물로 지정되었고,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는 백제 왕실의 얼음 저장 흔적까지 확인된 바 있습니다.목조 빙고였던 동빙고 터 역시 땅속 조사로만 되찾을 수 있는 유산입니다.

시리즈 기록 등재

동빙고동은 분묘지 비율 29.8%로 시리즈 분묘지 부문 최고 기록에 등재됩니다. 분묘지가 국유지의 약 3할을 차지하며 사실상 주역 지목으로 등장한 것은 이번 시리즈에서 대단히 드문 사례입니다. 아울러 직전 두 편(삼전동, 양화동)의 단일 지목 100% 행진을 멈추고 4개 지목 구성으로 복귀한 동네이기도 합니다.

삼전동의 잡종지 벌판, 양화동의 거대한 밭, 그리고 동빙고동의 무덤 언덕.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세 동네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시리즈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11.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Q1.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A. 총 12필지였습니다.

Q2.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총면적은 얼마였나요?

A. 총 58,387㎡로, 약 17,662평에 해당합니다.

Q3.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분묘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 분묘지는 5필지 17,381㎡로, 국유지 전체의 약 29.8%를 차지했습니다.

Q4. 1912년 동빙고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A. 밭은 5필지 26,343㎡로, 전체의 약 45.1%를 차지한 최대 지목이었습니다. 이 밖에 잡종지 1필지 11,722㎡, 대지 1필지 2,938㎡가 있었습니다.

Q5. 이 자료는 문화유산 조사에 어떻게 활용되나요?

A.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문헌 검토 단계에서 옛 분묘지의 위치와 관영 시설 터, 개발 이전 토지 이용 양상을 확인하는 기초자료로 활용됩니다.


한 줄 결론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국유지는 총 12필지 58,387㎡로 밭 45.1%, 분묘지 29.8%, 잡종지 20.1%, 대지 5.0%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왕실 제사용 얼음창고의 역사와 어우러진 분묘지 비율 시리즈 최고 기록의 동네였습니다.



자료 기준 및 출처

본 글은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1912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자료 기준: 1912년 국유지 현황 자료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빙고동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 면적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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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은 녹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지키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한겨울 강에서 떠 올린 차가움으로조상의 제사상을 지키던 언덕.그 곁에는 지킴을 받는 이들이고요히 잠들어 있었습니다.얼음창고는 사라지고 봉분은 낮아졌지만,기억하는 마음만은 장부의 숫자가 되어백 년을 건너 우리 앞에 도착했습니다.누군가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땅의 이름이 되고 기록이 되는 것.동빙고동 열두 필지가 우리에게 건네는가장 따뜻한 유산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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