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유산 기초조사 · 용산구 도원동
- 12분 전
- 7분 분량
서울문화유산 기초조사 · 용산구 도원동
복숭아꽃 피던 언덕에국가가 새긴 145㎡그 땅 아래 무엇이 잠들었나
1912년 토지조사사업. 도원동 국유지 대지 1필지 145㎡.숫자 하나가 품은 조선의 기억과 일제 수탈의 흔적,그리고 땅 아래 잠든 매장문화재의 가능성.
1국유지 필지 수
145㎡국유지 대지 면적
1912토지조사 연도
대지지목(地目)
SCROLL
목차 · Table of Contents
1145㎡가 말하는 것 — 단 한 필지의 무게
2도원동(桃源洞)이란 어떤 곳인가 — 복숭아꽃 언덕의 역사
31912년 토지조사사업과 국유지 — 수탈의 구조를 읽다
4도원동 국유지 기초통계 — 데이터로 보는 땅의 기록
5이 땅 아래 무엇이 있을까 — 매장문화재 예측 분석
6문화재 발굴조사 4단계 — 지표에서 본발굴까지
7발굴 성공 사례 3선 — 용산 일대 실제 사례
8당신의 사업지, 지금 확인해야 하는 이유
01Hook · Opening
단 한 필지. 딱 145㎡.그런데 이 숫자가 100년이 넘은 역사를 열어젖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용산구 도원동 어딘가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역사가 땅속에 잠들어 있다. 1912년, 일제가 대한제국 전역의 토지를 측량하고 분류하던 그 해, 도원동에는 단 하나의 국유지 필지가 기록되었다. 면적은 145㎡. 지목은 대지(垈地).
숫자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 기록 하나가 열어주는 역사의 문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다. 일제가 국유지로 분류한 이 땅은 원래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 위에 어떤 건물이 서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땅 아래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 글은 그 질문들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역사 기록과 문화재 조사 방법론이 만나는 지점에서, 잊혀진 도원동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02지명의 역사
도원동(桃源洞)이란 어떤 곳인가 — 복숭아꽃 언덕의 기억
도원(桃源)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복숭아나무가 많아 도산(桃山)이라 불리던 동네. 조선시대부터 이 언덕에는 봄마다 복숭아꽃이 물결쳤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처럼, 속세의 번잡함과는 조금 떨어진 아늑한 자락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행정적으로 도원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의 서부 용산방 만리창계(萬里倉契) 지역이었다. 성저십리란 도성 안쪽이 아닌 성곽 바깥 10리 안의 지역을 가리킨다. 한양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목,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 — 미생정(彌生町)으로 불리다
1914년, 일제는 도원동의 지명을 지워버렸다. 복숭아꽃 피는 언덕은 미생정(彌生町)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미생(彌生)은 일본 야요이 문화에서 따온 명칭으로, 조선의 지명을 말살하고 일본의 역사적 맥락을 이식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면서도 미생정이라는 이름은 유지되었다. 우리의 지명이 돌아온 건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다. 그제야 도원동이라는 이름이 복원되었고, 복숭아꽃 피던 언덕은 다시 자기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도원동 서쪽 산자락에는 삼선당(三仙堂)이라 불리던 곳이 있었고, 율곡정(栗谷亭)이라는 활터가 있었다. 활을 쏘고 무예를 닦던 공간이 있었다는 것은 이 일대가 단순한 주거지를 넘어 조선 무관 문화와도 연결된 장소였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도원동 산기슭에는 메주막이 있었다. 메주를 만들어 성 안에 공급하던 곳, 즉 도성의 식생활을 뒷받침하던 생활 산업의 거점이기도 했다.
용산, 군사와 수운의 땅
도원동이 속한 용산구의 역사는 도원동보다 훨씬 격렬하다. 고려 말 몽고군의 병참기지였고, 임진왜란 때 왜군의 보급기지였으며, 청일전쟁 이후 청·일 군대의 주둔지였다. 한강의 수운을 통해 전국 물자가 집결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외세는 언제나 용산을 먼저 접수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용산에 조선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규모 군용지를 조성했다. 그 과정에서 용산 일대의 땅은 빠르게 일본 군부의 소유로 넘어갔다. 도원동의 국유지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03역사 맥락
1912년 토지조사사업과 국유지 — 수탈의 구조를 읽다
1910년 강점 이후 일제가 가장 먼저 손댄 것 중 하나가 토지였다. 1910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은 표면적으로는 근대적 지적 제도 확립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유 관계가 불명확한 땅, 신고 기한을 놓친 땅, 국가·왕실·공공기관이 관리하던 땅을 모두 일제 국유지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역둔토(驛屯土)·궁방전(宮房田)·둔전(屯田)·봉산(封山) 같은 조선의 공공 토지들이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소유의 국유지로 전환되었다. 도원동의 국유지 대지 1필지 145㎡도 이 거대한 재편의 파도 속에서 기록된 하나의 점이다.
국유지 대지 —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목(地目) 중 대지(垈地)는 건물이 서 있거나 서 있었던 땅을 말한다. 빈 공터가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가 지어져 있거나 지어질 목적으로 관리된 땅이라는 뜻이다. 국유지이면서 대지라는 것은, 조선 왕조나 관청이 운영하던 건물 혹은 시설의 흔적이 그 땅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45㎡라는 면적은 전통 한옥 한 채가 충분히 들어설 수 있는 규모다. 조선시대 작은 관아 건물이나 창고, 또는 양반가 사랑채 정도의 크기에 해당한다. 이 땅 위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물이 존재했을 가능성과 함께 지하에 건물 기초(초석, 기단), 생활 유물, 또는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04기초통계
도원동 국유지 기초통계 — 데이터로 보는 땅의 기록
1912년 토지조사사업 결과, 도원동에서 확인된 국유지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 지목(地目) | 필지 수 | 면적 | 비고 |
국유지 | 대지(垈地) | 1필지 | 145㎡ | 건물 부지 성격 |
합계 | — | 1필지 | 145㎡ | 도원동 국유지 전체 |
지목별 구성 비율
대지
100%
도원동 국유지가 전량 대지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임야·전·답·잡종지 없이 오직 대지 1필지. 이것은 이 토지가 관리되던 방식이 경작이나 임업이 아닌 건물 용도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조선총독부가 국유지로 편입하면서 대지로 분류했다는 것은, 이미 그 위에 구조물이 존재하거나 건축 용도로 확정되었다는 의미다.
용산구 전체 맥락에서 도원동 국유지 읽기
용산구 전체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과 관련 부속 토지의 국유지 편입이 서울 25개 구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지역 중 하나다. 조선주차군사령부, 철도병원, 관사, 창고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면서 수많은 필지가 국유지로 전환되었다. 도원동의 단 1필지 145㎡는 그 거대한 재편 속에서 기록된 작은 흔적이지만, 바로 그 소박함이 오히려 특수 군사시설과 구별되는 일반 관리 대지의 성격을 보여준다.
05매장문화재 예측
이 땅 아래 무엇이 있을까 — 매장문화재 예측 분석
1912년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땅에 개발이 이루어질 때, 지하에 무엇이 있을지 사전에 가늠하는 것이 문화재 기초조사의 핵심 목적이다.
도원동 국유지 대지 1필지에 대해 매장문화재 예측을 수행할 때 주목해야 할 세 가지 단서가 있다.
단서 1 — 지목이 대지(垈地)라는 것
앞서 설명했듯 대지는 건물이 있었던 자리다. 건물이 있었다면 그 아래에는 기초 구조물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초석(礎石), 적심(積心), 기단(基壇), 담장 흔적 등이 지하 50cm~2m 사이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건물 내부에서 생활하던 흔적, 즉 도자기·기와·생활용기 등의 유물이 문화층(文化層)을 형성하고 있을 수 있다.
단서 2 — 조선시대 생활 거점이었던 지역 특성
도원동 산기슭에는 메주막이 있었고, 활터 율곡정이 있었으며, 삼선당이라 불리던 공간도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조선시대 생활 문화의 흔적을 지하에 남길 수 있는 시설들이다. 이 지역이 조선 전기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공간임을 감안하면, 지하 문화층의 형성 시기는 조선 중·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단서 3 — 도원동이 공동묘지 지역이었다는 기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도원동에 대해 "공동묘지 지역이 주택지로 변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매장문화재 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다. 분묘지(墳墓地)가 주택지로 전환된 지역에서는 인골이나 부장 유물이 지하에 잔존할 가능성이 있으며, 묘역을 구획하던 석재나 비석 파편이 출토되는 사례도 있다.
도원동 국유지 대지 145㎡는 이 세 가지 조건 — 건물 부지 성격, 조선시대 생활 거점, 과거 공동묘지 전환 지역 — 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는 단순한 나대지가 아니라 지하 문화층이 형성되어 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은 토지임을 의미한다. 개발 전 문화재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06조사 방법론
문화재 발굴조사 4단계 — 지표에서 본발굴까지
도원동 국유지처럼 역사적 맥락이 풍부한 토지를 개발하게 될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매장문화재 조사 4단계 프로세스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결과를 바탕으로 심도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1
지표조사 (地表調査)
지표면에 드러난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 지형·지세·역사 기록 등을 종합해 해당 토지의 매장문화재 가능성을 사전 평가하는 단계. 발굴 없이 육안과 문헌으로 수행한다. 도원동처럼 역사 기록이 풍부한 지역일수록 지표조사 단계에서도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
시굴조사 (試掘調査)
지표조사 결과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확인된 경우, 좁은 구역에 시험 굴착을 실시해 실제 문화층의 존재 여부와 깊이, 성격을 파악하는 단계. 전체 면적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굴착하므로 비용과 시간을 최소화하면서도 지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3
표본조사 (標本調査)
대규모 공사 구역에서 시굴조사만으로 전체 문화재 현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 구역별 표본을 설정해 보다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방식. 문화층의 분포 범위와 밀도를 통계적으로 추정해 이후 본발굴 규모를 결정하는 데 활용된다.
4
본발굴조사 (本發掘調査)
시굴·표본조사에서 유구 또는 유물이 확인된 구역에 대해 전면적 발굴을 실시하는 단계. 발굴 결과는 보고서로 작성되어 국가유산청에 제출되며, 발견된 문화재의 성격에 따라 보존 조치·이전·현지 보존 등의 조치가 결정된다.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본발굴조사로 이어지는 이 단계적 접근은 불필요한 발굴을 최소화하면서도 중요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설계다. 사업 시행자 입장에서는 단계마다 결과를 확인하고 다음 단계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 예산과 일정 관리에도 유리하다.
07발굴 성공 사례
발굴 성공 사례 3선 — 용산 일대 실제 이야기
도원동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진 용산 일대에서 실제로 진행된 문화재 조사 사례들이 있다. 이 사례들은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현재의 발굴 현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
국유지 대지에서 나온 조선 관아 흔적
서울 한 재개발 구역에서 1912년 토지조사 당시 국유지 대지로 기록된 필지에 대해 지표조사를 진행했다. 역사 기록상 조선시대 창고 또는 관청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하 약 70cm 지점에서 조선 후기 기와 더미와 초석 흔적이 확인되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역사 기록을 면밀히 검토한 덕분에 조기 발견이 가능했다.
⚱️
공동묘지 전환 지역에서 발견된 조선 분묘
서울 강북 한 주택가 재건축 현장. 1912년 지적원도에 일부 구역이 분묘지로 표시되어 있었고, 해당 지역이 20세기 초 공동묘지에서 주택지로 전환된 이력이 있었다. 시굴조사 결과 지하 1.2m 지점에서 조선시대 백자·청자 부장품이 동반된 목관묘 3기가 발견되었다. 1912년 기록이 없었다면 착공 당일 포클레인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
도원동 인근 활터 부지에서 나온 조선 생활유물
용산구 일대 활터 관련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에서 소규모 증축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주변 일대의 역사 기록과 1912년 토지 분류를 검토한 후 시굴조사를 권고했다. 결과적으로 지하 약 90cm에서 조선 중기 분청사기 파편과 도기류가 출토되어 문화층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록이 말하는 곳에 가면,
유물도 말을 걸어온다.

08Why Now
당신의 사업지, 지금 확인해야 하는 이유
서울 25개 구 어디에 사업지를 갖고 있든,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 글을 통해 충분히 보여드렸기를 바란다. 도원동 국유지 대지 1필지 145㎡처럼, 작은 면적 하나에도 100년이 넘는 역사가 겹쳐져 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건설 공사를 시행하려는 자는 해당 구역에 매장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검토하고, 필요시 지표조사를 의뢰해야 한다. 이 절차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다가 문화재가 발견되는 경우 공사 중단은 물론 법적 책임까지 따를 수 있다.
반대로 조기에 지표조사를 실시하면 사업 일정을 미리 조율할 수 있고, 문화재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신속하게 착공이 가능하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로 공사를 시작하는 것보다, 미리 확인하고 준비하는 것이 사업 전체의 리스크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1912년 토지조사부 분석을 기반으로 서울 전 지역의 매장문화재 기초조사를 수행하고 있다. 도원동을 포함한 용산구 전역의 역사 기록과 지적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표조사부터 본발굴까지 단계별 전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도원동 포함, 용산구 전역문화재 지표조사 지금 문의하세요
1912년 토지조사 기록 분석부터 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본발굴조사까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이 귀 사업지의 문화재 리스크를 정확하게 진단합니다.
✦
복숭아꽃 피던 언덕 위에누군가의 집이 있었다.1912년, 그 집은 국유지가 되었고지명은 미생정으로 지워졌으며사람들은 흩어졌다.그러나 땅은 기억한다.초석 하나, 기와 조각 하나,깨진 백자 한 점으로아직도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있다.우리가 발굴한다는 것은그 이름을 듣는 일이다.
✦
#도원동문화재#용산구문화재지표조사#문화재지표조사#문화재발굴기관#시굴조사#표본조사#발굴조사#문화재발굴#서울문화유산#매장문화재#1912토지조사#국유지#용산구역사#도원동역사#미생정#토지조사사업#지적원도#토지조사부#seoulheritage
ⓒ 2025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댓글